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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
탁.
단조로운 나무의 소리가 그저 하얗기만한 방 안을 울렸다. 여러가지 가구들이 있었지만, 그것에 의미는 없었다. 중심에 있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은 신경 쓸 여유 따위 또한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만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탁.
데자뷰마저 느껴질정도로 맑은 나무소리가 울렸다. 움직였던 흰색의 말이 대각선을 그리며 이쪽의 진세에 맹점을 찌른다.
놀라울정도로 효율적인 자리선점. 몇수나 앞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을정도다. 경외감마저 들정도로 완벽한 그 한수는, 누구라도 고개를 조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옆에서 구경하는 단 한명의 관객조차도 그건 몰랐다는 듯이 입을 가리며 놀라고 있었다. 나 또한 식은 땀을 흘리며 반격에 나섰다.
움직이는 것은, 검은 폰.
차분한 진격이다. 상대방이 다른 누구도 아닌 누님인 이상, 운 또한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길 수 없었다. 실력차는 아직 여실히 남아 있었다. 무서운 실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낄지경.
입술이 쓰린 것을 느끼면서 누님의 다음 수를 보았다. 백옥같은 피부의 손이 백색의 나이트를 움직였다. 사람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면서도, 손에는 그러한 우악스러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탁.
일격. 그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은 움직임이 옆에서 명령을 기다리던 폰을 집어삼켰다. 누님의 손에 들어올려진 검은 부하 하나가 체스판의 밖으로 떨어졌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역시 중요한 곳의 말이다보니 아깝다는 감정이 강하게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 감정에 얽매여 있기에는 누님의 공세가 심각했기 때문에 빠르게 생각을 전환했다.
흑색의 비숍이 적진 깊숙한 곳에 둥지를 틀었다. 모든 말들의 공격 범위 밖에 있는 검은 성직자는 안전하게 그곳에 머물렀다. 슬쩍, 누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누님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탁.
"에?"
관객의, 능파의 목소리가 퍼졌다. 누님의 말이 너무나도 절묘한 곳을 찌른 탓이었다. 굉장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누님은 비숍의 약점을 정확하게 찔렀다. 대각선으로 밖에 움직이지 못 한다는 특성상 비숍은 흰칸에 있었던 말이면 흰칸 위만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맹점을 노려 누님은 순식간에 자신의 패도 이쪽의 적진에 밀어넣었다.
"흐음....."
내가 숨을 길게 쉬었다. 누님이 무언가를 알아챈 듯, 슬쩍 내 얼굴을 보았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누님도 잘 알고 있었다.
타다다닥.
"어어어?"
능파의 의문스런 목소리가 점점 톤을 높였다. 나와 누님의 손이 빨라지면서 누가 먼저 두는 것인지, 누가 늦게 두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갔다.
종국에서 누님의 손이 멎었다. 내가 움직일 차례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누님이 움직일 차례였다. 하지만, 어떤 수를 쓰건 누님은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위치였다.
누님이 양손을 들어 항복한다.
"졌다, 졌어. 여전하구나. 그 실력.... 굉장해."
순수한 누님의 칭찬, 나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능파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을 내밀었다. 체스를 하기전에 기보를 부탁했으니 알고 있었던 듯, 금방 기보를 넘겨주었다. 검은색과 흰색의 어울림에 숫자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아련한 향수가 떠올랐다.
어렸을 적에는 이것만 붙들고 다닌 적도 있었는데.
"후후."
가볍게 웃으며 체스판의 말을 다시 한번 세워 보았다.
하나씩, 하나씩.
차근, 차근.
으득.
이가 갈렸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역시, 그랬던 거다.
"누님... 전에, 어렸을 때 저는 분명히 말했다고 생각했는데요."
"으으응?"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누님이다. 하지만 저 얼굴조차, 나에게는 가식으로 보일 정도로 지금 내 심사는 삐뚤어져 있었다.
심호흡을 길게 내쉬는 것으로 잠시 정신의 안정을 되찾았다.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 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주에 처음으로 불사가 발을 딛었을 때, 그녀의 정체가 내 굴욕의 대상이라는 것은 알았다.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넘어갔지만 뭔가 걸리는 느낌이 있어서 시간 날때마다 무슨 감각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았다.
누님과의 체스 승부. 기본 스펙이 있다지만, 누님은 괴물이었다. 덧셈뺄셈으로 삼각함수(사실, 이것도 누님이 고교 중퇴를 했기 때문에 측정한 값이다. 실재로는 더 나아갔을 가능성도 있었다)까지 파악한 누님이었다. 아마, 나정도의 머리를 '속여 넘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누님의 과도한 애정, 보통은 생각할 수 없을만큼의 사랑으로, 당시의 나를 망가지지 않게 자신감을 새겨준 것이리라.
그것도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 하는 선에서.
"누니임."
"응? 자꾸 왜 불러?"
귀찮은 듯이 대답하지만 얼굴은 기쁨이 묻어나온다. 저런 얼굴을 보자니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아, 저기. 그게 말이지......"
"뭐야 동생. 갑자기. 보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정도라고?"
"하하하."
말한다고 각오는 했지만 역시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마음은 입 밖으로 내기에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였다.
그저, 최대한 나답게 웃어보였다.
"고마워요. 예나, 지금이나."
".....가, 갑자기 무슨."
얼굴을 붉히며 웃는 누님. 내가 말을 해서 부끄러운 것은 누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꽈아악.
목을 조여오는 통각, 여간 아픈 것이 아니다.
어느샌가 용의 모습으로 돌아간 능파의 꼬리가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뭔가 심히 불쾌한 눈으로 날 쏘아보는 능파가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벌떡.
누님이 갑자기 일어섰다. 능파도 갑자기 밖을 쳐다보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뭔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누님이 나를 허리에 끼고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벽을 뚫고 나간 누님과 나는 방주의 대지를 일직선으로 가로질렀다.
"갑자기 무슨 짓이...!"
"밖을 봐요, 할아버지."
"...밖?"
한순간의 도약으로 방주의 중심에서 방주의 끝자락까지 온 거란 말인가. 방주의 크기는 한반도보다도 넓은데 그 수준이라니, 여전히 괴물 같은 신체능력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밖은 밖이기에 일단 시선을 돌려보았다.
"미친....!"
방주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거대한 공중병기가 방주의 정면에 세워져 있었다. 아래로 길게 뻗은 수정을 중심으로 꽃처럼 수정이 퍼져 있었는데 그 위로 황동보다는 조금 어두운 색의 금속이 마치 봉분처럼 덮혀져 있었다.
저것이 카타스트로피의 최종병기인 '무덤'이다.
언젠가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일 줄은 몰랐다. 아니, 그 이전에 저렇게 거대한 것을 방주의 앞에 세워두다니.
명백한 시위다. 지금 당장 공격해오지는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방주 안에 있는 노동자들은 충분히 공포에 떨 것이다.
"여어!"
아랫쪽에서 한 아저씨가 손을 흔들었다. 요즘 모습을 보지 못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여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다.
누님이 날 허리에 낀체로 바닥에 내려섰다. 멋지게 바닥에 착지한 것은 아니라서 머쓱히 뺨만 긁었다.
"저거 뭔지 아니?"
"애석하게도, 아군은 아닙니다."
"그래?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방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 한다는 건 말해드릴 수 있겠네요."
저들이 무덤이란 병기를 만든 이유는 그저 방주와의 싸움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공중에서 포격만 내리꽂는다면 그들에게 승산 따위는 없으니, 그들로서도 그에 대비한 병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방주다.
방주처럼 다채로운 기능은 없겠지만, 아마 내구도만큼은 방주의 포격을 견딜 수 있게 설계 되었을 것이다.
"흐음. 저것과 싸우게 될 각오는 어떻지?"
"글쎄요. 지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일까요."
"지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슨 소리?"
"저를 포함한 치우회... 그러니까 적들을 상대하는 우리들에게는 죽음이 예언된 사람이 몇명이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지요.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다...랄까요. 이겨야 한다고 늘상 생각했지만, 저걸 보니 감회가 새로워졌다는 느낌이죠, 뭐."
"아, 응. 그래?"
당황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는 아저씨다. 그러고보면 아까부터 묻는 말이 묘하게.... 이상했다고 생각한 것은 절대로 착각이 아니다!
손을 뻗어서 아저씨의 바지 뒷주머니를 뒤졌다. 역시나랄까, 그곳에는 상당히 성능이 좋아보이는 녹음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 설마."
그냥 내버려두면 아까의 부끄러운 대사가 전세계로 송신? 만약에 대로를 걷는다면 주변에서 비웃음이 왕창?
"자, 잠깐! 돌려줘요!"
"그래."
너무나도 순순히 넘겨준다. 아저씨는 머쓱하니 뺨을 긁으면서 말했다.
"이거 말이지, 녹음하는 그 즉시 국내 방송국으로 전달되는 거라.... 아마 부숴도 소용없을텐데. 게다가 여기는 묘하게 통신사정이 좋아서 오히려 국내에 있을 때보다 빨라."
"장난해요 지금!?"
"과학의 발전도 무시할게 못 된다는 이야기지. 하핫."
하여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저씨의 얼굴에 한번 주먹을 꽂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