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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
흑색의 거인. 방주의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외부 장갑이 마치 인간의 살갗처럼 움직일 때마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기이한 모습. 분명히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병인데, 움직임은 인간을 연상케 한다. 아니, 오히려 어떤 점에 있어서는 인간 이상의 움직임을 보인다.
기계와 생명체의 벽을 허물어버린 '진짜 기계'. 앤트로아의 최대병기다.
바다 아래로 곤두박질 치던 아라바다의 등에 붙어 있는 슬릿. 그것이 돌연 빛을 흩날리며 백색 날개의 형상을 취한다.
부우웅!
기묘한 전자음. 백색 날개가 만들어내는 빛의 입자가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수를 측정할 수 없는 양, 압도적인 파도가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주변을 옭아매던 힘이 서서히 끊어져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쯧."
불사가 혀를 찼다. 예상외의 복병, 날려버린다면 못할 것은 없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늪지대의 불쾌한 액체와도 같아서, 떨쳐내기에는 힘든 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저 기체, 아라바다는 공간동결을 깼다.
공간동결은 공간계의 중위권 기술이지만, 불사가 사용하는 것에 하위건 상위건 의미는 없다. 그저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세계를 부숴버릴 수 있다.
그것이 불사다.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불패정도. 아니, 불패 밖에 없다. 그럴 것이다. 헌데, 흑색의 기체는 공간동결을 망가뜨렸다.
불패의 백업이 있는 것이 분명하겠지만, 불패가 보냈다면 불사라 해도 생각없이 달려들 수는 없었다.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이곳의 상황을 역전시킬지도 몰랐다.
백색빛의 날개가 부드러운 입자를 흩날린다. 그것과 반대되는 흑색의 기체가 허공에 정지하면서 불사와 마주했다.
일촉즉발, 그 단어가 어울리는 장소였다.
"자아가 있는 것 같으니 묻겠다. 불패의 부하인가?"
삐빗.
헤드의 아랫부분에서 살짝 빛이 깜빡거린다. 자아를 가졌으나, 말로 표현할 능력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지? 덤빌건가? 아니면..... '죽음'을 자초할 건가?"
죽음을 언급하는 불사다. 아라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장갑부분을 열 뿐이었다. 장갑의 틈새로 드러나는 총구. 아니, 포구. 거대한 크기에 비견가는 포구는 사람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죽음, 그 단어를 생각하던 아라바다는 실소했다. 기계니까 입은 없지만 그런 기분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기계인 아라바다에게 죽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럴리가 없다. 자아가 있는 자들에게 죽음이 없을리가 없지 않은가. 아라바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코어. 다른 DS들과 달리 무인기동병기이기 때문에 콕핏자리를 대신하는 아라바다의 감정중추. 즉, 핵이다. 이것이 부서지게 된다면 아라바다라는 존재도 무너지게 된다.
도면이야 당연히 남아있지만, 자아가 생긴 것은 우연이었다. 다른 두기도 마찬가지로 우연으로 탄생한 자아. 같은 도면에 같은 방식으로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부서지면 그저 사라져버리고 만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리가 없다. 닿는 것만으로도 철이 찢겨나가는 상대가, 무섭지 않을리가 없다. 세계 그 자체를 눈 앞에 두고, 경외심을 갖지 못할리가 없다.
하지만. 해야한다.
"좋아, 와라. 인간이 되고 싶어 안달난 쇳덩이."
불사의 손이 도발적으로 흔들린다.
파앙!!!
공간을 도약하며 가르는 일권. 20미터가 넘어가는 키가 발휘하는 일격은 산을 쪼갤 것 같은 강맹함을 품었다. 하지만 불사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그저 맞았다.
데미지를 입지 않기에,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불사에게 있어서 아라바다의 행동은 굉장히 의외에 속했다.
아라바다가 자아가 있건 없건 기계다. 자아가 있더라도 효율적인 판단을 내릴 것임은 분명하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불사는 장갑도 열어버린 상태이니 포격을 갈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쪽이 더 세고, 만약 불패의 힘을 받았다면 그것이 유일하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수단이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너무 일찍 판단을 내린 감도 있었지만 주먹으로 공격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허나, 그래서? 데미지는 없다. 불의의 기습이기는 했지만 아프지도 않으니 반격은 쉽다.
무슨 짓을 해올까. 그것이 현재 불사의 관심사였다. 불사는 난생처음으로 다음 수를 읽지 못 하고 상대의 동태를 살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잘 들리십니까~~~?]
상대방을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아라바다의 헤드에서 울려퍼졌다. 하지만 아라바다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통신으로 인한 외부접속. 그것을 이용한 외부 스피커의 작동이다. 바다에서 서서히 후퇴해 가는 전함들과 DS, 해양 마수들의 시선이 아라바다에게 꽂혔다.
[아시는 분만 아실, 치우회의 삼왕 중 한명인 육왕 고요입니다. 이것 참 안녕하신지요.]
긴장감이 없는 인사에 사람들은 물론이고 불사조차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황 파악을 못 한다는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후퇴명령을 받으신 아군 여러분께 새로운 명령이 하달 될 겁니다. 위험한 임무이지만, 해주시길 빌겠습니다. 대신, 이 불사는 저희가 막겠습니다.]
당당한 선언. 불사의 얼굴이 굉장하게 변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저 감정의 고양. 수만년, 그 이상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무시당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정체를 몰랐을 때의 일이다. 알아챈 뒤로 그렇게 대한 사람은 없다. 혹 있다면 불패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형태로 무시당할 줄은 몰랐다.
도발? 그렇지는 않았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히 '자신감'. 승리에 대한 자신감인지, 어쩌면 그저 자신이 죽지 않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히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후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혼이 날아갈 것만 같다고, 불사는 생각했다. 천지창조 때부터 겪어온 세월의 격류에 마모된 감정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세월 속에서 흐릿해졌던 것이 확실해지는 이 기분을, 여지껏 불사는 잊고 있었다. 단지 사명을 위해, 미래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다른 신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오기만 했던 삶에서 얻지 못 했던 충족감.
아득한 옛날에 세계를 오시했던 신의 일각이, 지금 되살아났다.
"좋아, 좋다. 어디까지, 뭘 할 수 있는지 내가 지켜봐주지."
[흐음. 그 이전에, 당신의 그 오만한 콧대를 부숴봐도 될까?]
유유히 사라져가는 전함에게서 완전히 눈을 땐 불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뭘 하던지 간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태도다.
압도적인 자신감. 오만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힘이 있기에 그것은 무시될 수 없다. 하지만, 아라바다와 연결된 육왕은 그저 웃음으로 상대했다.
[흐으응. 불사양반. 아니, 불사마님. 그거 아시.. 알아? 아까 아라바다의 주먹은 내가 의도한 거야.]
"....그게 뭐?"
[당신이라면 막지 않을거라 생각했거든. 막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적중하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같지.]
"....뭘 말하고 싶은거냐."
[당신은 낚인거야. 아무리 강해도 상대할 생각이 없다면 살 수 있잖아?]
그러니까 요는, 해상의 전함들을 살리기 위해 그런 일격을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의도대로 놀아난 것이지만 그런 것을 내비친다면 상대할 방법은 있었다.
"흐음. 그렇다면 내가 저녀석들에게 눈을 돌리면 그만이지. 저런 개미들을 죽이는데 필요한 시간은 1초면 되니까."
[맞아. 인정해. 하지만 당신이 그러려고 할까?]
목소리가 바뀌었다. 남자 특유의 묵직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아니다. 점점 엷어진다고 생각하던 목소리는 종국에는 여자아이, 그것도 상당히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파동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귀와는 개념자체가 다른 불사의 귀는 그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얀 용. 육왕의 후계자로 보이는 존재로, 능파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쿡쿡쿡....제가 누군지는 아시죠?]
"육왕의 후계자, 능파."
[어머, 잘아시네요. 후후후후.]
웃음이 비웃음으로 들리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저 웃음은 완전한 비웃음, 의외의 상황이기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공포'가 느껴졌다.
압도 당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불사도 여지 없이 공포라는 것을 느낀다. 어리기 짝이 없는 존재에게, 시대를 초월한 자신이 정신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꽤 강하신 모양이던데요. 할아버지가 지략에서 졌으니 강할 것이라곤 생각해요. 다만, 솔직히 말해서 생각이하인 걸요. 강하지만, 막는 것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나요? 할아버지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저에게는 가능하죠.]
"...어째서?"
그녀가 판단한 바로는 백룡인 능파는 육왕에게 미치지 못 한다. 그것은 본인도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전에 얻었던 정보로는 분명히 그러했다. 그리고 향후 30년 동안 그건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육왕이니까.]
무언가가 비틀어졌다고, 불사는 알 수 있었다.
삐걱삐걱.
단 한순간의 우연이 불러낸 운명이, 일그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