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에 마른오징어를 안주로 먹으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한탄하며 잠이 들었는데.
그 한탄의 대상이었던 오프라인에 들어가기 전의 시간대라니.
마치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가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당연하지!
다시는 기레기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신인지, 귀신인지, 누구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나에게는 엄청난 기회다. 기레기가 아니라 기자로. 해 보는 거야!’
뼈 해장국을 두 그릇이나 비워 배가 터질 듯했다.
그런 탓인지 가게 문을 나서는데 아까처럼 춥지가 않았다.
아니 따뜻했다.
* * *
고시원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부터 언시 준비에 매진했다.
실제로는 국가고시가 아니면서 언론사 입사 시험을 언론 고시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시나 행시만큼 합격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시험의 난이도가 무척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시라는 말이 생겼다.
게다가 다른 고시나 사기업 입사 시험과도 완전히 달랐다.
공부를 한다고 해서 그게 누적되는 게 아니라 매년 새롭게 리셋되었다.
올해 필기시험에 나오는 주제는 작년의 이슈가 아니라 올해의 이슈였다.
그런 탓에 회귀 전 수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실제 취재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0년 차 기자였다.
언론사에서 매일같이 기사를 썼다.
하루에 평균 20개씩.
많을 때는 30개도 넘게 써 봤다.
우라까이였지만 그래도 어쨌든 내가 쓴 기사다.
게다가 오프라인에 들어가기 전 세 군데 언론사의 서류 전형에 합격하여 필기시험도 보았다.
‘시험에 무슨 내용이 나오는지는 대략 알고 있지.’
분명 2월에 방송사 시험을 봤고, 3월에는 10대 종합 일간지 중 한 곳의 시험을 봤으며, 같은 달 말에 경제 전문지 시험을 봤었다.
나는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 다른 언론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정보를 알고 있는 3곳에만 집중했다.
서류도 딱 3곳만 내고는 매일 같은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 또 썼다.
언론사 필기 전형은 논술과 작문, 상식으로 이뤄지는데, 우선 논술과 작문에 나올 주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식에 집중했다.
일반 상식 책을 보는 한편, 매일 신문을 보면서 새로운 시사 이슈를 파악하는 데 힘썼다.
* * *
대망의 2월.
1월보다 더 추운 날씨였다.
나는 두꺼운 패딩을 걸쳐 입고 나왔다.
오늘 시험 장소가 겨울철 칼바람으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오랜만이네.’
여의도의 한 중학교.
대한민국 대표 공영방송 채널인 HBS의 필기시험이 펼쳐지는 곳이다.
역시나 문제는 그때와 같았다.
*논술
-헌법 재판소가 사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하라.
*작문
-성범죄자 신상 공개
나는 싱긋 웃으며 매일 갈고닦았던 필기시험의 답을 적었다.
거의 외우다시피 한 답안이라 다 쓰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상식 시험도 예상했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문제지를 덮고 가만히 칠판을 바라보는데, 시험 감독관이 벌써 다 풀었냐며 혀를 내둘렀다.
주어진 시간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을 때다.
그는 분명 내가 시험을 포기했으리라 생각했으리라.
씨익.
나는 그를 보고 말없이 싱긋 웃어 주었다.
그렇게 3곳의 시험을 모두 마쳤다.
결과는?
3곳 모두 무사통과!
합격의 기쁨도 잠시.
곧 실무 전형과 면접 전형이 이어졌다.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형이었지만 나이가 있어선지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그런 까닭일까.
필기에 이어 3곳 모두 최종 합격 소식을 전해 왔다.
게다가 맨 처음 보았던 HBS에서는 수석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예전 삶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는구나. 낙방만 거듭하다가 어쩔 수 없이 오프라인에 들어갔었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합격한 회사가 세 군데나 되고, 세 군데 모두 대한민국 최고의 언론사 아니던가.
방송사, 종합 일간지, 경제 전문지.
각각 영역은 달랐지만 모두 메이저 언론사였고, 기자 준비생이라면 꼭 들어가고 싶은 회사들이었다.
합격 소식을 들은 선후배와 동기들이 부러운 눈치로 물었다.
“선배, 어디 갈 거예요? 그래도 HBS가 가장 좋지 않아요? 인지도도 제일 높고, 연봉도 좋고, 안정성도 좋고요.”
“에이 무슨 소리. 거긴 가 봤자 고리타분해서 힘들다고 그러더라. 역시 센터 일보가 좀 멋지지 않아? 뭔가 개혁의 이미지가 있고.”
“쯧. 이래서 애들은. 기자도 직장인이야. 월급도 쎄구, 경제 쪽 인맥도 넓혀 둬야지. 그러기에는 시티 경제가 좋지 않겠어?”
각자 자기가 가고 싶은 언론사의 장점에 대해 말하며 상대 언론사를 깎아내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회사마다의 장단점이 있지.
하지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쿨하게 웃으며 말했다.
“셋 다 안 갈라고.”
그 한마디에 과방이 뒤집혔다.
“에?!”
“선배 미쳤어요?”
“야, 너 어디 다른 데도 합격한 거야?”
“세진스! 로또라도 된 겨?!”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너무나도 가고 싶었던 곳들이었고, 대한민국 모두가 알아주는 언론사들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곳이었다.
이론으로만 알지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경험해 보지 못했다.
회귀하기 직전까지 HBS 뉴스의 페이스북 팔로우는 고작 50만 명에 불과했다.
천만 명인 오프라인의 20분의 1.
대한민국 대표 공영 방송이라지만 뉴미디어에 있어서는 한참 뒤처져있었다.
기생 언론이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오프라인은 뉴미디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최고였다.
게다가 오프라인과 함께 시작해서 부사장의 위치에까지 오른 나다.
오프라인과 소셜 언론의 생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2010년이면 아직 SNS나 스마트폰, 유튜브 등의 기술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전.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서 오프라인을 키운다면?
기생 언론이 아니라 해외의 유명 소셜 언론인 ‘허핑턴 포스트’나 ‘버즈피드’처럼 키울 자신이 있었다.
* * *
5월의 햇살 좋은 어느 날.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단지는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알뜰장으로 분주했다.
“아줌마, 선지해장국 대(大)자요.”
“저도 대자로 하나 주세요.”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로 유독 줄이 긴 가게가 있었다.
‘세진 해장국’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선지해장국 가게는 뻘건 국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과 늦봄의 더위 그리고 길게 줄을 선 손님들의 체열이 어우러져 찜통을 방불케 했다.
초여름에 가까운 날씨, 시원한 음료수나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뜨거운 선지해장국 가게에 이토록 긴 줄이라니.
직접 맛보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일 것이다.
가게 한가운데.
아주머니 한 분이 부지런히 거대한 솥에서 선지해장국을 퍼 날랐다.
희고 둥근 플라스틱 용기에 가득 담기는 빨간색 국물.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그녀는 허리가 아픈지 해장국을 파는 틈틈이 허리를 펴고 손으로 주물렀다.
“많이 아파요?”
내가 스윽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엄마가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뭐야 너 언제 온 거니? 공부는?”
“됐고, 잠깐 쉬고 계세요.”
“아니, 너 공부…….”
나는 엄마를 돌아보며 잔뜩 인상을 썼다.
엄마도 알고 있었다.
내가 한번 고집을 부리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걸.
엄마는 할 수 없다는 듯 가게 구석에 있는 색 바랜 플라스틱 원형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낡은 부채를 부치며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해장국이 담겨 있던 솥이 바닥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1시간 뒤.
아이의 손을 잡고 줄을 서고 있던 아줌마가 자기 차례 앞에서 완판되자 울상을 지었다.
“저기 아저씨, 진짜 남은 거 없어요?”
“네. 죄송합니다, 손님. 아쉽게도 다 떨어졌네요.”
“전에도 이랬는데. 좀 더 많이 가져오시면 안 돼요?”
그녀의 말에 뒤에 있던 손님들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혼자 하셔서 더 많이 하는 건 쉽지가 않네요. 죄송합니다.”
내가 90도로 허리를 구부려 사과하자 사람들도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뿔뿔이 흩어졌다.
뒷정리를 마치고 거대한 무쇠솥을 트렁크에 실었다.
경차에 무쇠솥과 재료 상자 등을 실으니 차체가 트렁크 쪽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멀리서 아저씨 한 명이 다가왔다.
“세진이 왔나? 공부는 잘돼 가고?”
엄마랑 같이 알뜰 장터에 나선 지 6년 차가 된 채소 가게 아저씨가 푸근한 사투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와 악수를 나눴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항상 신세 지고 있습니다.”
“됐다 마, 신세는 무슨. 서로 돕고 살아야재. 그나저나 어무이 허리가 많이 안 좋아 보이데. 공부한다고 바쁘겠지만 집에도 자주자주 들러.”
“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은혜는 무슨. 이건 오늘 잘 안 팔려서 주는 거니까 언능 챙기라. 엄마한테는 이야기하지 마꼬.”
검은 비닐봉지에는 무, 당근, 양파 같은 채소가 가득했다.
딱 보기에도 신선하고 커다란 게 안 팔리기는커녕 최상품이 분명했다.
대형 트럭을 가지고 있는 그는 고맙게도 엄마 가게의 접이식 천막과 기타 장비들을 자기 트럭으로 옮기고 보관도 해 줬다.
또 틈나는 대로 채소도 챙겨 주고 말동무도 해 주는 등 신경을 많이 써 주고 있었다.
‘아저씨, 제가 성공하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 * *
쌍문동의 골목은 좁디좁았다.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골목 한편에 주차를 마쳤다.
차에서 내리니 벽돌로 된 다세대 주택이 빼곡하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려는 엄마를 붙잡았다.
“엄마, 술 한잔하실래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는지 엄마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세…… 세진아, 무슨 일 있어?”
“응. 아주 큰 일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