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호들갑을 떨자 엄마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알겠다며 내 뒤를 따라왔다.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소고기 먹자.”
“소고기?”
나는 골목을 나와 큰길가에 있는 고깃집에 들어갔다.
아직 본격적인 저녁 시간대가 아니라 그런지 가게는 한산했다.
나는 메뉴를 슬쩍 보고는 제일 비싼 항목을 골랐다.
“여기 한우 모둠 세트 2인분이요. 아, 소주도 한 병 주세요.”
“세진아, 그거 비싼 거 아니니?”
“하나도 안 비싸니까 김 여사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들이 사는 거니 많이 드세요.”
그래도 엄마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평소 잘 찾아오지도 않던 아들이 난데없이 장터에 와서 일을 돕더니 술을 마시자고 하고, 소고기까지 산다니 걱정이 될 법도 하다.
그 와중에 본인은 먹지 않고 고기를 굽기만 하는 엄마.
엄마가 구운 고기를 말없이 먹기만 하던 나는 소주가 반 정도 남았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기…… 엄마. 나 HBS에 수석 합격했어.”
엄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센터 일보에도 합격하고, 시티 경제에도 붙었어. 대단하지?”
“지…… 진짜로?”
“물론이지. 여기 합격 통지서도 보여 줄게.”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메일에서 합격 통지서를 찾아 엄마에게 보여 줬다.
그새 핸드폰은 낡은 폴더폰에서 최신형 아이폰 3GS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이었지만 아이폰은 혁명의 단초였다.
아이폰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뉴미디어나 기술을 논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였으니.
어차피 돈은 이제 곧 벌 테니 12개월 할부로 과감히 질렀다.
“아이고, 이거 핸드폰이 참 신기하게 생겼네. 화면도 큼지막하고.”
아이폰을 손에 든 엄마는 합격 통지서가 들어 있는 화면을 한참을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당황해서 외쳤다.
“어…… 엄마 왜 그래? 눈에 뭐 들어갔어?”
엄마의 들썩임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가게에 사람이 얼마 없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울음소리는 컸다.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사셨는데, 아들이 유명 언론사에 취업했다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으실까.’
나도 눈가에 눈물이 핑 맺혔다.
“우진아, 내 새끼! 우진아!”
엄마가 진짜 고생이 많으시다.
원래 우리 집은 나름 부자라면 부자였다.
종로 한가운데 커다란 선지해장국 가게가 있었고, 가게는 항상 북새통을 이뤘다.
전직 대통령은 물론 정치인, 연예인의 사인으로 한쪽 벽면이 가득했다.
종업원만 스무 명 가까이 있었다.
IMF 때에도 남들과는 달리 우리 가게는 힘든 게 없었다.
불황일수록 호황이라는 언론사의 기자들은 평소보다 더 자주 우리 가게를 찾았다.
그랬었는데.
추락에는 날개가 없다고 했었던가.
가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려다가 지인에게 사기당한 아버지가 운영에 손을 놓고 점점 술에 빠지더니 모든 게 달라졌다.
빚은 늘어났고, 종업원들은 하나둘 떠났다.
손님 역시 줄더니 어느새 가게를 다른 이에게 넘겨야만 했다.
엄마가 가게에서 챙길 수 있었던 것은 고작 무쇠솥 하나였다.
평창동 고급 저택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낡은 다세대 주택으로 도망치듯 이사 왔다.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점점 알코올 중독자가 된 아빠가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젠장.’
집에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좋은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성적은 차츰 떨어졌다.
원래라면 무난히 서울 대학교에 갈 수 있었건만 눈높이를 조금 낮추어야만 했다.
집안 사정을 아는 고3 담임 선생님이 정말 아쉬워했다.
그리고.
수능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
아빠가 알코올 중독으로 돌아가셨다.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은 빚과 병원비로 모두 날리고 엄마는 결국 무쇠솥 하나만 들고 아파트 알뜰 장터에 나가셔야만 했다.
어떻게든 아들 대학을 보내야 한다며 말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엄마가 선지해장국의 레시피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엄마의 선지해장국은 매일 완판되어, 장이 서는 날이면 다른 아파트 단지 주민들까지 와서 사서 먹을 정도였다.
엄마는 그렇게 나를 대학에 보냈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제 나의 선택을 알려 드려야만 했다.
거짓말을 할 순 없었으니까.
“근데 엄마.”
“응?”
“나 거기 말고 딴 데 가려고.”
“딴 데? 다른 곳도 붙었어?”
“그건 아닌데, 뭐 거의 100% 붙을 거야.”
“그게 뭐야? 그리고 거긴 어딘데?”
“오프라인이라고, 아직 서비스를 시작하진 않았는데 곧 하는 곳이야.”
“오프라인? 처음 들어 보는 곳인데…… 거기도 언론사니?”
“응. 이제 새로 설립하는 곳.”
“뭐? 이제 새로 설립하는 곳이라고? 유명한 사람이 만든 거야?”
엄마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뭐 오프라인을 설립한 백철웅 사장이 5년 내 유명 인사가 되는 건 맞았으니.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왕이면 만들어진 지 오래되고, 유명한 곳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아?”
“그렇긴 한데, 거기는 제약도 많고 한계도 많아서.”
“그래. 우리 똑똑한 아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아무튼 입사 축하한다, 아들.”
“아직 입사한 건 아니지만. 고마워요. 엄마.”
‘그리고 수고하셨어요.’
마지막에 수고했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못난 자식이었다.
집에 가면 괜히 우울해진다는 핑계로 고시원에 들어간 뒤로는 일부러 엄마를 잘 찾아가지 않았다.
그랬던 불효자가 갑자기 효도를 하려니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 * *
어머니를 집에 모셔다드리고 나는 근처 PC방에 들렀다.
겨우 반 병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취기가 올랐다.
엄마랑 마셔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컵라면 하나를 시켜 해장 겸 먹었다.
후루룩.
면발을 입에 문 채 나는 빠르게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그리고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창에 ‘오프라인’을 쳤다.
검색 결과가 떴다.
* 오프라인 신입 및 경력 기자 모집
오프라인은 SNS를 활용한 소셜 언론입니다.
뉴미디어와 함께 성장할 가슴 뜨거운 인재를 모집합니다.
모집 부문
취재 기자 | 신입/경력 0명 | 성별/연령/학력/전공: 무관 | 학보사 경험 우대
‘푸훗.’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마터면 면발이 모니터로 튈 뻔했다.
가슴 뜨거운 인재는 뭐고 취재 기자는 또 뭐란 말인가.
그걸 떠나서 당시 입사 지원서를 냈던 사람은 부끄럽지만 나 혼자였다.
신생 매체이기도 했지만 소셜 언론이라는 표현은 너무 낯선 언어였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지원서를 냈다.
지원서에는 HBS 수석 합격, 센터 일보 및 시티 경제 합격이라는 문구를 추가했다.
‘이걸 본 백철웅의 표정이 궁금하네.’
…….
구직 사이트 창을 닫은 나는 이어서 비트코인 포럼에 접속했다.
해외 사이트라 그런지 접속이 무척 느렸다.
포럼에 접속한 나는 검색 창에 빠르게 다음 글자를 입력했다.
‘pizza.’
그러자 단 한 건의 게시물이 화면에 나타났다.
영어였지만 내용은 단순했다.
* 비트코인으로 피자를?
비트코인으로 피자를 주문할 수 있는지 궁금해. 라지 사이즈 피자 2판을 내게 보내 주면 1만 비트코인을 보내 줄게. 관심 있으면 내게 연락해 줘.
나는 스크롤을 내려 댓글을 확인했다.
아직 아무런 댓글도 달려 있지 않았다.
‘글을 올린 시각이 우리 시각으로 어젯밤 정도였으니…… 아직 댓글도 없고 피자를 보낸 사람은 없겠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게시자에게 쪽지를 보냈다.
‘피자 내가 살게. 혹시 4판에 2만 코인은 어때?’
얼마 지나지 않아 게시자로부터 답장이 왔다.
“Good!!! It's a great offer!”
60달러.
피자 네 판의 가격이었다.
나는 미국에 유학 간 대학교 동기에게 부탁하여 게시자에게 피자를 보냈다.
동기 녀석은 타지에서 혼자 외로웠는지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빠르게 처리해 줬다.
“그나저나 피자는 왜?”
“뭐 그럴 일이 있어서. 별일 없지?”
“외롭다. 외로워! 내가 왜 여기 와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
녀석이 징징거리는 탓에 나는 한참을 녀석과의 채팅에 힘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그런 수고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뛸까…….’
외화 송금 수수료를 포함해서 2만 비트코인을 사는 데 들어간 돈은 고작 8만 원이었다.
피자 배송을 확인한 게시자는 곧바로 내 계좌로 비트코인을 보내 왔다.
다음 날.
비트코인 포럼 게시판에는 거래에 성공했다며 파파존스 라지 사이즈 피자 네 판과 함께 피자에 손을 뻗는 아기의 손이 일부 촬영된 사진이 게시물로 올라왔다.
비트코인과 현물 간의 거래가 진짜로 이뤄졌다며 포럼 곳곳에서 환호가 넘쳐났다.
‘피자 데이.’
암호 화폐 시장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날이다.
비트코인으로 첫 실물 결제가 이뤄진 ‘교환의 매개’로써 비트코인의 가치가 처음으로 입증된 날이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게시자의 글이 올라온 2010년 5월 18일에서 나흘 뒤인 5월 22일에 일어날 일이었지만, 내가 도중에 끼어들면서 5월 20일로 바뀌게 되었다.
‘원래 피자를 사려던 양반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회귀 전 비트코인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매일 관련 기사를 써서 시세도 알고 내용도 알았지만 남의 일이었다.
그냥 오르는가 보다, 떨어지는가 보다 했다.
그래서 비트코인을 직접 사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피자 데이가 언젠지는 잘 알고 있었다.
‘회귀하기 얼마 전에 관련 기사를 썼으니까 날짜도 정확히 기억해. 당장은 아니지만,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떡상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