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한무원이 알겠다며 뒤로 물러섰다.
“네네. 뭐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걱정돼서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무슨 콘텐츠를 만들 겁니까?”
백철웅은 자신도 궁금했는지 슬쩍 물었다.
“지금은 제가 말씀을 드려도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실 겁니다. 오늘 저녁에 술 한잔하면서 말씀드릴 테니, 지금은 백 사장님도, 한 이사님도 모두 즐기시죠. 날이 너무 좋네요.”
그랬다.
따분하게 사업 이야기를 하기에는 제주도의 7월이 너무 빛났다.
* * *
치이이이익.
삼겹살이 맛깔스럽게 익고 있었다.
우리는 남자 팀이 묵은 민박집 1층 공터를 빌려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스무 명이 모두 들어오자 민박집 공터가 가득 찼다.
“어여, 많이들 먹어! 이게 제주 특산 똥돼지라고! 외지인들에게는 잘 팔지도 않아~ 그러니 많이 많이 먹어!”
박창후가 고기를 구우며 말했다.
“이야, 박 부장님. 잘 먹겠습니다. 아까 잠깐 집에 다녀오신다더니 그럼 이 똥돼지를, 직접 잡아 오신 거예요?”
“하하하, 그건 아니고. 아는 동생한테 부탁해서 많이 달라 했지.”
“우와, 제주도 주민 최고네요.”
“암, 제주도에서는 제주도 주민이 최고지~”
그는 실제로 고기를 얻는다고 정반대에 위치한 서귀포에 다녀올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왕복 3시간이나 걸리는데 말이다.
“그런데 박 부장님. 제가 알기로는 제주도는 출신에 따라 차별이 심하다면서요?”
“이야 우 사장님, 젊은 분이 많이 아시네요.”
“친구에게 들었습니다.”
‘실제론 기사 쓰다가 안 거지만.’
“맞아요. 제주도는 성골 진골이 있어요.”
“성골 진골이요? 신라 시대 골품제처럼요?”
20대 직원들이 묻자 박창후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물론. 대대로 제주에 살다 여기 있는 학교를 나와 성인이 되어서도 제주에 사는 사람은 성골이지.”
“그럼 진골은요?”
“마찬가지로 대대로 제주에 살았지만, 대학교나 직장은 육지에서 다니다가 돌아온 사람이지.”
“이야. 그럼 육두품도 있어요?”
“그렇지. 여기서 나를 제외하고 모두 육두품이야.”
“에? 모두요?”
“응. 제주랑 상관없이 육지에서 온 모든 사람은 육두품 취급이지.”
그의 말이 맞았다.
제주에서는 ‘육지 것’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육지에서 온 사람들을 지칭하는 뜻이었다.
그만큼 제주도는 육지 사람들에 대한 배척이 강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박 부장님, 같은 대한민국 사람인데 심한 거 아닙니까? 제주도 사람들 너무하네요.”
“하아. 니가 아직 젊어서 세상을 잘 몰라서 그래. 안 그렇습니까? 백 사장님?”
박창후가 백철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백철웅이 소주를 입에 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4.3 사건 등 제주도 사람들이 육지 사람들에게 피해를 받기도 했고,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도 있으니까요.”
조금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최루리가 전면에 나섰다.
가슴이 깊게 파인 꽃무늬 원피스.
서울 사무실에서는 도통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패션을 입은 그녀는 평소보다 목소리 톤을 높여 말했다.
“에이. 그런 무거운 이야기는 이따 하시고, 우리 연애 이야기해요, 연애~”
“오, 좋아요, 좋아!”
“와! 최 부장님부터~”
특히 20대 여직원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아이참. 그럼 저부터 먼저 시작할게요. 제 남편이랑 처음 만난 게 마다가스카르에 여행을 갔을 때인데…….”
유명 번역가라더니 스케일이 다른 그녀였다.
한참 동안 최루리의 연애 이야기가 이어지더니 다음 주자로 백철웅이 나섰다.
그는 예상대로.
“여러분. 평소에는 육지와 이어져 있는데, 밀물 때가 되면 섬이 되는 곳을 아십니까?”
‘무슨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었다.
한동안 제부도는 또 오프라인 직원들의 성지가 되겠지.
돌아가며 연애 이야기를 하는데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민박집 계단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는 이가 있었다.
홍지혜였다.
나는 소주잔을 놔두고 캔맥주를 하나 들고는 그녀 옆으로 갔다.
“혼자 뭐 해요? 지혜 씨는 뭐 재미난 연애 이야기 없어요?”
“연애는 무슨…….”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맥주를 마셨다.
“하하. 하버드에서 수석 한다고 공부만 했나 보죠?”
“그래요. 공부만 했어요. 왜요? 그게 뭐 잘못된 건가요?”
살짝 취기가 올랐는지 그녀는 내게 따지듯 물었다.
“워워. 아뇨. 진정하세요. 잘못은 뭘요. 하버드 전체 수석이 누구 집 멍멍이 이름도 아니고. 그냥 혼자 있길래 물어본 거예요.”
“흥. 그러는 우 사장님은 연애 많이 해 보셨나 보죠?”
그녀는 26살, 나와 동갑이었다.
물론 나의 실체는 36살이었지만.
‘동갑 주제에 어디서 건방 떠냐는 걸까?’
쓴웃음이 났다.
사실 연애야 무지막지하게 많이 했지.
CC였던 주소월에게 차이고 나서 속 빈 강정처럼 지냈다.
사랑 따윈 엿이나 먹으라면서 그냥 즐기는 인생.
쉽게 사람을 사귀고 쉽게 헤어졌다.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말하면 바람둥이라고 욕먹겠지. 아니 지금 시점에서야 소월이가 첫 여친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회귀한 뒤에는 소월이에게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문자와 전화가 계속 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모든 정신이 오프라인에 집중되어 있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또 차이는 건 아닐까 두려웠던 건지도 모르지…….’
내가 쓸쓸한 표정을 짓자 홍지혜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아, 죄송해요.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는 건데.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냥 예전 생각이 잠시 나서요. 그럼 오늘은 즐겁게 쉬다 가세요.”
“아……. 저…….”
나는 캔맥주를 들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술을 마셨다.
홍지혜가 늦게까지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 * *
어제 술자리에서 왜 제주도에 내려오게 된 건지, 한 명 한 명에게 설명을 해 준 덕분인지 아침에 일어나자 모두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 세화 해수욕장부터 해서 성산 일출봉, 우도 이렇게 찍고 옵시다.”
나는 테이블에 올려진 지도를 보며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어제 말씀드렸지만, 팀은 총 3 팀으로 나눌 거예요. A 팀은 세화 해수욕장, B 팀은 성산 일출봉, C 팀은 우도. 다들 자기 팀이 어딘지는 숙지하셨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영상부 2명에 소셜부 1명, 국제부 1명 그 외 디자이너 등으로 구성된 팀을 짜서 전날 알린 상태였다.
“목표는 단순해요. 돌아다니다가 멋진 카페나 장소가 있으면 촬영하고, 사진 찍고, 취재하세요. 그리고 저녁에 다시 여기로 집결해서 편집할 겁니다. 아셨죠?”
“네!”
“그럼 백 사장님, 한 이사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철웅이 끄덕거리고 한무원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여기까지 와서 운전기사 노릇 할 줄이야. 뭐 이사 나부랭이가 별수 있습니까. 사장님 부탁이라니 해야죠.”
나는 취재에 나갈 인력 외에 할 일이 없었던 백철웅과, 한무원에게 운전을 부탁했다.
“그나저나 우 사장만 혼자 어디 다녀오겠다니…… 혹시 혼자만 놀러 가는 건 아니죠?”
한무원이 실눈을 뜨며 내게 물었다.
“저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다음에는 제가 운전할 테니까 한번 봐주세요.”
“에이, 농담입니다. 뭐 또 엄청난 아이템을 준비하고 계시겠지. 자, 모두 출발합시다.”
사람들이 빠지면서 북적거리던 민박집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뒤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가 볼까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2층으로 올라가는 콘크리트 계단에 혼자 앉은 홍지혜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저희 둘만 따로…….”
“홍 부장님은 남아서 기사 써야 할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럼 저는 여기 남고, 사장님만 다녀오시면…….”
“이미 제가 내일 치까지 기사 다 써 뒀어요! 홍 부장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으니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내가 재촉하자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노트북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어디 가는데요?”
“좋은 곳요.”
“네?!”
홍지혜의 표정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거인이 모래성을 쌓은 뒤 엄지손가락으로 가운데를 꾸욱 누른 모양이랄까.
밑에서는 작은 산처럼 보였지만 정상에 오르니 너른 평지에 한가운데가 움푹 팬 분화구가 기이했다.
무엇보다 압권은 주변 풍경이었다.
제주도 동부에서 두 번째로 높은 표고는 제주도 동부 일대를 한눈에 들어오게 했다.
서쪽으로는 한라산이 보였고 동쪽으로는 성산 일출봉과 남해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뿐이랴.
시원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와 폭풍처럼 흘렀던 땀방울을 멀리 날려 버렸다.
다랑쉬오름.
오름의 여왕이라는 별칭답게 거대하고 장엄한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글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오니까 장난 아니구나.’
헉헉거리며 30분이나 올랐지만, 그때의 수고로움은 금방 잊힐 만큼 멋진 풍경.
넋이 나간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와……. 이렇게 멋진 풍경, 미국에서도 본 적 없어요.”
“하하, 공부만 했다면서요?”
“흥. 그랜드캐니언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정도는 가 봤거든요~”
“그럼 저한테 거짓말한 거네요.”
“아무튼, 너무 멋지네요. 진짜…….”
홍지혜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멋지게 휘날렸다.
우리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하실 말씀 없으세요?”
“응?”
“아니 저한테 하실 말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부른 거 아닌가요?”
“예리하시네요.”
“뭐 바보는 아니니까요.”
“홍 부장님. 아니 지혜 씨…….”
“네?”
내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홍지혜를 바라보자 그녀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의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저희가, 지혜 씨를 뽑은 이유는 단순히 하버드 전체 수석이어서는 아닙니다.”
“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