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00)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얼마나 절망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너도 화가 많이 났겠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소월은 카운터에 있는 김희철에게 소리쳤다.

“저기요! 혹시 여기 술도 팔아요?”

“술? 술은 없지만 내가 마시던 위스키는 있는데. 그거라도?”

주소월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희철은 유리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는 황금빛 위스키를 따랐다.

쪼르르.

여기까지 날아온 알코올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김희철은 위스키를 주소월에게 건네더니 내게도 물었다.

“우 사장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맨정신으로도 힘든데 술까지 먹으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주소월이 잔에 든 위스키를 원샷하더니 대뜸 물었다.

“그래서, 우리 아직 사귀는 거야?”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연락을 안 한 지 9개월 가까이 되었다.

당연히 헤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소월을 바라보았다.

주소월의 표정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건…….”

목젖까지 튀어나오려는 말을 애써 주워 담았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어차피 서로 상처만 주고받을 텐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주소월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결국 차인 거 맞네. 하하.”

그녀의 허탈한 웃음에 가슴이 아팠다.

“나도 무슨 기대를 한 건지.”

“미안하다.”

“됐어. 꼭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니까.”

“응?”

주소월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카페를 나갔다.

나는 그녀가 지나간 자리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많이 사랑했구먼…….”

김희철이 비워진 컵을 치우고는 물이 가득 찬 새 컵으로 바꿔 주었다.

“왜 헤어졌어?”

“…….”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되고.”

“다음에요.”

김희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월은 오래지 않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얼굴에 물기가 살짝 묻어 있는 게 세수를 한 모양이다.

그녀는 아까와는 다르게 다소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기다렸지?”

“아니. 괜찮아.”

“오늘 너를 찾아온 이유는 사실 인터뷰 요청 때문이야.”

“인터뷰?”

“그래. 오프라인 사장 우세진에 대한 국한 일보 기자 주소월의 인터뷰 요청.”

“국한 일보 들어갔구나?”

“응. 말해 주고 싶었지만 말할 기회가 없었네.”

“미안…….”

“그 얘긴 그만하자. 그래서 인터뷰 가능해?”

“괜찮긴 한데 꼭 오늘 해야 하는 건가?”

“ASAP!”

성격 급한 그녀가 자주 쓰던 용어였다.

“알았어. 이번 폭우 건으로?”

“아니 원화성에게 100억 투자받은 것부터, 어떻게 26살 아무런 사회 경험도 없는 꼬맹이가 공동 사장이 될 수 있었는지, SNS 노하우는 어떻게 키운 건지 모두 다.”

주소월은 검사가 피고인을 취조하듯 내게 물었다.

‘뭐 상관없으려나.’

나는 오프라인에 합류한 계기부터, 엔젤 머니에 투자를 받은 이유, 그리고 인재 채용 과정과 제주도 여행, 광화문 물난리 사건까지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1시간에 걸쳐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물론 회귀했다는 말은 빼고.

“진짜 어마어마하구나.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는 것 같아.”

주소월은 조금 화가 누그러진 듯 연거푸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구먼. 영화네 영화! 대단하다, 진짜.”

입을 쩍 벌린 채 옆에서 같이 듣던 김희철도 손뼉을 쳤다.

“그래서 앞으로 네 계획은 뭔데? 포털에 기사 노출하는 거?”

기자답게 포털의 중요성을 잘 아는 그녀였다.

모두 포털에서만 뉴스를 소비하고 있었으니까.

대다수의 언론사에서 브라우저 검색창에 언론사 홈페이지 주소를 쳐서 곧바로 들어오는 비율은 전체 방문자의 20%가 되지 않았다.

보통은 Never나 넥스트와 같은 대형 포털 첫 화면에 실린 뉴스를 클릭하고 들어왔다.

“그건 계획이라기보다는 당장 내일이라도 풀어야 할 숙제고.”

“그럼?”

“이렇게 말하면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모르겠는데.”

“괜찮아, 말해 봐.”

주소월은 이제 나에게 아무런 앙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세계 최고.”

“응? 세계 최고? 뭐가?”

“우리 오프라인이.”

“그러니까 뭐가 세계 최고라는 거야?”

“당연히 언론사니까, 언론사로.”

“뭐어? 세계 최고 언론사가 되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월도 김희철도 그게 말이 되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할 수 있어. 그것도 5년 안에.”

내가 5년이라는 기간까지 이야기하자 주소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오른손을 건넸다.

“그래. 응원할게. 잘해 봐. 우 사장님.”

“고마워. 기사 잘 부탁할게, 한 기자님.”

“응. 1면에 실리도록 힘 좀 써 볼게.”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 뭐야 너 지금 비웃는 거야?”

“야, 너 지금 겨우 수습 뗐을 거 아냐? 아니 아직 수습인 거 아냐?”

“아냐! 나 지금 사회부 정식 기자라고!”

“언제 입사했는데?”

“4월.”

“그런데 벌써?”

“당연하지. 4개월 만에 수습 딱지 뗐다고! 국한 일보에서 최단기간이라더라.”

주소월은 자랑이라도 하듯 우쭐거렸다.

그도 그럴 게, 보통 신입 기자는 6개월 동안 혹독한 수습 기간을 거쳐 정식 기자가 된다.

그걸 4개월 만에 끝냈다니 분명 동기 중에서도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줬음이 틀림없다.

“그래 봤자 막내잖아. 막내가 무슨 지면 1면이야.”

“두고 봐. 이거 내가 무슨 수를 쓰든 차주 월요일 1면 기사로 만든다.”

“하하.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지. 그거 하면 내가 밥 살게.”

“어! 너 지금 약속했다! 밥 산다고!”

“그래. 1면에 나오면.”

신문사에서 지면 1면이라는 건 베테랑 기자도 쉽게 낼 수 없는 영역이다.

특종이거나 엄청나게 중요한 이슈만이 1면에 실릴 수 있다.

이번 폭우 사건이 꽤 큰 이슈였다고는 해도 이미 며칠 지난 이야기.

게다가 이제 막 수습을 뗀 막내 기자가 1면을 쓴다는 건 로또 맞을 확률보다 낮다.

촬영이 필요하다고 내 사진을 몇 장 찍은 주소월은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이만 간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인터뷰 응해 줘서 고마워! 약속 잊지 마!”

“그래. 조심히 가.”

주소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떠났다.

‘성격상 지금 바로 기사 쓰려고 하는 거겠지.’

주소월의 성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해야 할 과제가 있으면 절대 미루지 않는다.

“좋은 여잔데. 아쉽지 않아?”

어느새 김희철이 바로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할 게 많으니까요.”

“재미없는 사람이네, 우 사장도.”

김희철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 * *

월요일 아침,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그리고 대로에 있는 신문 가판대에 도착했다.

‘고려 일보, 센터 일보, 서아 일보, 양자 신문…… 아 여기 있다!’

나는 국한 일보라고 적힌 신문을 집어 들고는 앞으로 펼쳤다.

‘이럴 수가! 이게 말이나 돼?’

신문을 펼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였다.

대문짝만하게 나온 내 얼굴 옆에는 <추석 물 폭탄 실시간 중계 ‘오프라인’, 세계 최고 언론사 꿈꿔>라는 오글거리는 제목이 실려 있었다.

기사에는 추석 연휴에 갑자기 터진 폭우와 관련하여 나를 인터뷰한 내용과 오프라인에 대한 소개 및 오프라인이 작성한 기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기사 하단의 바이라인에는 주소월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농담으로 말한 건데 진짜 밥 사 줘야 하나.’

복잡한 생각으로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무원이 나를 보고는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국한 일보가 들려 있었다.

“어? 뭐야 벌써 봤구먼? 에이, 김빠지게. 놀라게 해 주려 했더니.”

한무원은 내 손에 들린 신문을 아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거 언제 인터뷰한 겁니까? 연휴 기간에?”

“네. 어쩌다 보니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좋은 일이니까. 그런데 이거 쓴 기자랑 친해요? 어쩌다가 연휴 끝나자마자 1면에 나왔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내가 웃으며 사장실에 들어서자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던 한무원도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나는 신문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주소월에게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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