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야당인 민주 통일당 원내 대표 이광우.
백철웅의 고등학교 선배로 회귀 전 백철웅은 이광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의원님. 우세진입니다.”
“반갑소, 우 사장. 이광우라고 하오.”
이광우는 손이 아플 정도로 꽈악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가?’
국회의원들은 일부러 악수를 세게 해서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자리에는 이광우 외에도 민주 통일당 소속 국회의원 둘이 더 있었다.
이광우는 일어서서 다른 두 의원을 소개해 주더니 웃으며 말했다.
“여기 모두 의정부 고등학교 동문이요. 우 사장은 좀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양해 좀 구합시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우 사장은 고향이 어디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오. 서울분이시로군. 학교는?”
“성균관대 나왔습니다.”
“아, 성대. 좋은 학교죠.”
이광우의 표정에서 살짝 실망감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호구 조사도 아니고 뭔.’
그는 사람들에게 고급 정종을 따르며 호쾌하게 웃었다.
“여하튼, 백 사장 덕분에 멋진 분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되었구려. 만나서 반갑소.”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건배를 하자마자 이광우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왔다.
성격이 급한 게 백철웅과 닮았다.
“우 사장. 이번에 미국 가는 거 나도 따라갈 예정이오.”
“네? 의원님이요?”
“그렇소. 백 사장 말을 들어 보니 보통 행사가 아니라고요?”
“네.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라고, 세계의 유명한 언론사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죠.”
“그런데 거기에 오프라인이 한국 대표로 출전한다면서요?”
“한국 대표로 출전한다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CNN에서 자신들의 시간을 조금 할애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요! CNN 정도의 언론사가 한국의 신생 매체에게 자신들의 시간을 나눠 줄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안 그렇습니까?”
“감사할 일이죠.”
“이건 진짜 엄청난 성과입니다. 제2 경인 고속도로 건도 그렇고 광화문 물난리 때도 그렇고, 나도 오프라인의 팬입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의원님.”
“하하. 젊은 친구가 너무 겸손한 거 아니오? 진짜 마음에 드는구만. 자 여기 한 잔 더 받아요.”
이광우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술을 권했다.
‘늙은 여우 같으니라고. 세계적인 행사에 자신도 숟가락 하나 얹겠다는 건가.’
나는 말 없이 그가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그래도 그와 친해져서 손해 볼 건 없다. 나중에 정치권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쌓이는 술병과 함께 종로의 밤이 깊어 갔다.
* * *
미국으로 떠나는 날.
부장급 이상 인사들이 인천 국제공항에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거기에 두 명이 추가.
“아들! 조심히 잘 다녀오렴~”
“세진아, 단디해라, 단디!”
이제는 숨기지도 않고 당당히 두 손을 잡고 있는 중년의 커플.
엄마와 채소 가게 한 씨 아저씨는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엄마가 워낙 강경했다.
“아들이 저 멀리 미국에 간다는데 왜 엄마가 공항에 배웅을 가면 안 된다는 건데?”
“…….”
“너 전에도 나 인천 공항 데려다준다고 해 놓고선 혼자서 사고 처리한다고 가 버리지 않았니? 응?”
“네, 엄마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세요…….”
그렇게 말하고 엄마만 올 줄 알았는데 채소 가게 한 씨 아저씨와 같이 오다니.
‘이건 좀 배신이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손으로 머리를 감싸지자 박창후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부모님이 아직 젊으시네요. 손도 잡고 다니시고요.”
“그러게요. 우리 부모님은 내외하신 지 오랜데.”
“크하하하, 이 이사님 부모님이 벌써 그러실 연세는 아닐 텐데요.”
“그나저나 형님 서울 출신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님은 경상도 분 같은데요?”
이덕오가 궁금하다는 듯 물어 왔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백철웅에게 오프라인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남겼다.
“같이 가지 못해 아쉽습니다, 백 사장님. 오프라인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말고, 잘 다녀오세요. 남자는 우 사장 혼자니, 옆에 두 미녀분 케어 잘하시고.”
미녀라는 말에 최루리는 웃었고 홍지혜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홍지혜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녀는 잘하지 않던 화장을 하고는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고 나왔다.
“이광우 의원은 내일 비행기 타고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피곤하겠지만 그쪽도 신경 좀 써 주세요.”
“네. 걱정 마세요. 행사 끝나고 기념사진 찍을 때 이 의원과 같이 찍겠습니다.”
백철웅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와 헤어지고 출국 심사장으로 이동했다.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출국 심사도 처음이었다.
‘이게 보안 검사고 저게 출국 심사구나. 실제로 해 보니까 신기하네.’
기사로는 빠르게 출국 심사 통과하는 방법이라거나 자동 출입국 심사 노하우 같은 내용을 많이 써 봤지만 직접 해 보니 느낌이 많이 달랐다.
‘앞으로 기사를 쓸 때는 가급적 직접 경험해 보게 한 뒤에 쓰게 해야겠어. 그냥 인터넷 뒤져서 마구잡이로 베끼지 않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면세 구역으로 나오자 이미 출국 심사장을 통과한 두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늦었어요?”
“처음이라.”
“네? 국제선 처음이세요?”
“네. 비행기도 저번에 제주도 갔을 때 처음 타 봤습니다.”
“와. 우 사장님 진짜 천연기념물이네요.”
“그리고 두 미녀와 같이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고요.”
“아하하하. 뭐야, 아까 백 사장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따라 하시는 거예요?”
“아뇨. 뭐 진짜 두 분 다 미녀 맞으시니까요.”
기분 좋게 웃는 최루리와 다르게 홍지혜가 시선을 돌렸다.
옷차림도 그렇고 화장도 그렇고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내가 홍지혜를 바라보자 최루리가 재미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홍 부장이 좀 많이 예쁘죠?”
“그러게요. 평소와 좀 다르네요. 옷도 화장도.”
“그럼 저는요?”
“최 부장님이요? 항상 예쁘시지만, 오늘은 공항 패션 신경 좀 쓰셨는데요~”
“오. 역시 우 사장님 센스 있으셔.”
최루리와 한참 농담을 주고받으며 면세점 상품을 구경하는 사이 홍지혜는 혼자서 탑승 구역으로 이동했다.
‘능력은 좋은데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너무 부족하단 말이야.’
나는 최루리에게 홍지혜에 대한 고민을 넌지시 털어놓았다.
“저기 최 부장님. 홍 부장 어떤 것 같아요?”
“네? 홍 부장이요? 응?! 혹시 우 사장님 홍 부장을?!”
“아니요, 전혀요. 그게 아니라 홍 부장 성격이 어떤 것 같냐고요.”
“아 성격. 뭐 쿨하죠? 좀 목석 같다고나 할까?”
“목석?”
“감정이 무디고 무뚝뚝하잖아요. 동료로서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죠.”
“그렇군요.”
“그래도 똑똑해요. 괜히 하버드 수석은 아니구나 싶고요. 일도 열심히 하고, 이해력도 좋고.”
“다행이네요. 최 부장님이 옆에서 잘 챙겨 주세요.”
“호호. 같은 부장끼리 뭘 챙겨요.”
“박창후 부장님과 최 부장님 사이는 좋잖아요. 티키타카도 되고. 홍 부장도 신경 좀 써 주세요.”
“뭐, 우 사장님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시니 노력해 볼게요. 호호.”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면세품 쇼핑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하자 홍지혜는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최루리와 홍지혜 사이에 앉게 되었다.
미국까지 편하게 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드는 사이.
“여기 있었네? 아까부터 계속 찾았어.”
앞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키가 180㎝는 훨씬 넘어 보이는 장신의 인물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벗더니 좌우에 앉은 최루리와 홍지혜를 슬쩍 쳐다보았다.
“직원분들?”
“안재영! 니가 여긴 어떻게?!”
“그건 됐고. 너 요즘 잘나가더라?”
“내 말에 대답부터 해! 어쩐 일이야?”
그가 무언가를 얘기하려던 찰나.
뒤에서 승무원이 오더니 주의를 줬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뒤에 있는 분들이 안에 들어가지 못하니 좀 비켜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처럼 안재영의 뒤에는 꽤 많은 손님들이 서 있었다.
장신의 벽에 막힌 이들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웁스. 이런 민폐를. 넌 나중에 보자. 실례했습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안재영은 승무원에게 윙크를 날리며 앞으로 사라졌다.
“사장님. 누구예요? 저 핸섬가이는?”
최루리가 궁금하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말처럼 안재영은 키만 큰 게 아니라 연예인 뺨치는 얼굴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매너 좋고 어마어마한 집안 출신이라 대학 시절 따라다니는 여자애들 수만 해도 엄청났지.’
잠시 녀석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최루리가 다시 한번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
“사장님 아는 사람 맞아요?”
“아, 네. 대학 시절 동창이에요.”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많이 친했어요?”
“네. 같이 스터디도 하고 그랬죠.”
“스터디? 그럼 저 핸섬가이도 언론 고시 준비생? 우와 진짜 사람 얼굴만 봐서는 모르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활주로를 지나 이륙했다.
한참 고도를 높이던 비행기가 안정을 이루자 최루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안대였다.
그녀는 ‘깨우면 앙대~’라고 적힌 검은색 안대를 쓰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저는 피곤해서 먼저 좀 잘게요. 나중에 식사 나오면 깨워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냈다.
잠을 자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지만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가 바로 코앞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제는 눈만 감아도 절로 떠오르는 발표문을 외우고 또 외우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안재영이 내게 오더니 잠시 보자고 손짓했다.
그는 나를 비즈니스석이 있는 구역으로 이끌었다.
“저긴 비즈니스 구역이잖아?”
“괜찮아. 내가 이미 얘기해 뒀어.”
안재영이 앞에 있는 승무원에게 방긋 인사하자 승무원이 웃으며 커튼을 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