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너 비즈니스 좌석이야?”
“응.”
“난 아니잖아?”
“중요한 취재 거리가 있다고 말해 뒀어.”
“취재? 그게 무슨 소리지?”
“너 말야, 너.”
“응?”
남는 자리가 하나도 없었던 이코노미석과는 다르게 비즈니스석은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안재영은 가장 끝에 있는 비즈니스석 자리에 앉더니 나를 불렀다.
나는 잠자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코노미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편안한 자리.
“생각 같아서는 퍼스트 클래스로 예약하고 싶었는데, 회사에서 경비를 대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여기로 왔다.”
“회사? 너 취업했어?”
“뭐야, 몰랐어? 같이 스터디한 사이끼리 좀 서운한데?”
“미안, 내가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래, 그건 인정. 너 요즘 장난 아니더라? 언론계에서 너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오버는. 그나저나 어디 취업했어?”
“고려 일보. 지금은 문화부다.”
“이야! 축하한다, 안재영. 고려 일보면 3대 일간지 중 최고잖아?”
“다 옛날이야기지. 그나저나 너, 이번에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에 연사로 참석한다며?”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극비 사항인데.”
“그런 게 어딨어. 이미 이광우 의원이 참석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분명 이광우 의원 측이 자신들의 홍보를 위해 흘린 정보이리라.
“혹시 너희 고려 일보 말고 다른 데도 알고 있어?”
“그건 아닐걸? 우리 편집국장이 이광우 의원이랑 베프야. 우리한테만 이야기했다고 그러던데?”
“그건 다행이네.”
“왜? 나야 혼자 취재할 수 있으니 좋지만, 너희 입장에서는 널리 알려지는 게 중요한 거 아냐?”
“내신에서 보도하는 것보다 외신을 통해서 알려지면 더 효과가 크니까 그랬지.”
“아? CNN에서 직접 기사도 내준대? 이야, CNN에서 진짜 크게 쏘네.”
“그런데 미국에는 특파원도 있을 텐데 문화부인 네가 왜? 너 수습 딱지는 뗐냐?”
“몰라. 동기들은 아직 수습인데, 나는 그냥 도중에 문화부 가라더라.”
“니 집안 보고 그랬겠지. 그래도 초짜 기자한테 해외 출장은 잘 안 줄 텐데?”
“훗. 내가 좀 잘났지.”
“재수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짜식. 재미없긴. 너랑 친하다고 하니까 위에서 나보고 취재 가라더라. 원래 다른 선배가 가기로 했는데, 어제 급하게 결정됐어.”
“너도 당황스러웠겠군. 그나저나 부모님은 잘 계시지? 요즘 아버지 회사가 지면에 자주 실리던데?”
“어휴, 말도 마라. 그나마 우리 회사는 선배들이 나 때문에 기사 덜 쓰는 거라고 괜히 눈치 주고 그래.”
안재영은 대한민국의 10대 기업 중 하나인 진양 그룹의 회장, 안태익의 외아들이었다.
진양 그룹은 식품을 주력으로 하고 있지만 건설 및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의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이었다.
최근에는 문어발식 확장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서 부정적인 기사가 많이 나오는 중이었다.
“너도 참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다.”
“내가 뭐?”
“그 편한 길 다 놔두고, 왜 언론계에 들어와서는.”
“야, 너도 알겠지만, 우리 꼰대들이 언론한테 아픈 기억이 많잖니. 어떻게든 언론을 바꿔야 한다느니 뭐니 하는 말을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서 말이지.”
“하긴. 재벌가 사람들은 언론이 참 밉기도 하겠다.”
“밉기만 하면 양반이지. 아주 이를 간다 갈아.”
“그래도 다들 펜보다는 돈이라고 하지 않냐?”
“몰라 인마. 암튼 너 미국 가서 나한테 단독 인터뷰해 줘야 한다. 알았지? 나도 이번 기회에 회사에서 눈도장 좀 받자.”
“킁. 눈도장은 무슨. 이미 네 집안 자체로 회사에서 너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해맑게 웃는 안재영을 보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녀석은 그대로였다.
거만하지 않고, 솔직한.
그 누가 이 사람을 진양 그룹의 하나뿐인 외아들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다. 나 이제 가 볼게.”
“야, 근데 양옆에 그 언니들 장난 아니던데? 한 명은 나이는 있어 보이지만 나이스 바디에, 다른 한 명도 새끈하고.”
“그런 얘긴 그 둘 앞에서 절대 하지 마라.”
“당연하지. 장난이다, 인마. 쉬어라.”
나는 안재영을 뒤로한 채 비즈니스석을 빠져나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최루리는 여전히 안대를 낀 채 자고 있었고 홍지혜는 헤드셋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홍지혜가 나를 보고는 헤드셋을 벗고 물었다.
“어디 다녀왔어요?”
“아. 친구랑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꽤나 오래 있다 왔는데, 어디 다녀온 거예요? 비즈니스석 쪽으로 가는 것 같더니.”
“네. 그 친구 자리가 그쪽이었거든요.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 좀 나누다 왔어요.”
“잘 아는 사이세요? 대학 동기치고는 무척 친한 거 같던데.”
나는 대학 시절 같이 언론 고시를 준비하던 사이였다는 이야기부터 그가 진양 그룹의 후계자라는 이야기도 말해 줬다.
“헉! 진양 그룹이요? 초코과자로 유명한?”
“맞아요. 녀석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새삼 사장님의 인맥에 놀라네요.”
“인맥은 뭘요. 그냥 아는 사이죠.”
이야기하는 사이.
홍지혜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구름에 반사된 햇빛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한참 창밖을 보는 사이 기내식이 제공됐다.
기내식을 실은 카트가 분주하게 움직이자 곤히 자던 최루리가 그 소리에 깼다.
“아함~ 잘 잤다. 벌써 점심 주는 거예요?”
“네. 그 안대는 뭐예요?”
“아 이거요? 하하. 아는 지인이 스타트업에 다니는데 거기서 만들었다고 주더라고요.”
“재미있네요. 깨우면 앙대라니.”
“그렇죠? 재밌는 회사 같아요.”
“저희도 그런 거 만들어서 팔면 좋을 것 같은데요?”
“응? 안대요?”
“네. 안대도 좋고, 연필이나 공책 같은 것도 좋고요.”
“아하! 굿즈 말씀이시군요?”
“그렇죠.”
“이야, 그거 아이디어 좋은데요? 언론사에서 굿즈라니. 잘만 하면 정말 획기적인 아이템이 될 것 같아요!”
제대로 만든 굿즈는 팬덤이 어마어마하다.
고객의 충성도를 높이는 것은 물론, 성공하면 수익도 짭짤하다.
‘수익 다변화 측면에서도 좋은 방법이야. 이건 미국 다녀온 다음에 한번 제대로 추진해 봐야겠어.’
언론사의 전통적인 사업 모델은 신문 판매와 광고 매출이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광고 시장은 위축되어 갔다.
아무도 신문을 보지 않으니 예전만큼 광고가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지털은 크게 돈이 되지 않았지만, 소셜 언론이 출현하면서 새로운 수익원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어느 순간에는 한계가 찾아왔다.
‘결국 기업 삥이나 뜯는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지. 온라인 광고 이외에 다양한 사업을 함께 진행해서 포트폴리오를 넓혀야만 해.’
그런 생각을 하며 승무원이 나눠 준 기내식을 먹고 있는데, 아까 들렀던 비즈니스석 쪽이 시끄러웠다.
이코노미석을 담당하던 승무원들이 재빨리 비즈니스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내 기내 방송이 나왔다.
<조금 전 기내에 응급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만약 이 비행기에 탑승하신 승객 중 의료계 종사자가 계신다면 승무원에게 바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나가는 승무원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의사분이실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승무원은 실망감을 보이더니 매몰차게 자리를 떴다.
하지만 기자로서의 촉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강하게 외쳤다.
나는 앞에 가는 승무원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혹시 제 친구를 불러 줄 수 있습니까?”
팔을 붙잡힌 승무원은 기분 나쁘다는 듯 내 손을 뿌리쳤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안재영. 키가 무척 크고 잘 생긴 친구입니다.”
“어라? 안재영 씨 친구분이세요?”
“네.”
승무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그녀는 나를 이끌고 서둘러 비즈니스석으로 들어갔다.
비즈니스석에 들어가니 누군가가 복도에 쓰러져 있고, 그 주변으로 승무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쓰러진 사람을 살펴보고는 깜짝 놀라 외쳤다.
“재영아!”
복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금 전까지 함께 대화를 했던 안재영이었던 것이다.
나의 외침에 그를 돌보던 승무원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는 분이신가요? 여기 승객분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어요.”
“제 친구입니다. 조금 전에도 여기 옆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눴고요. 어떻게 된 건가요?”
“그게. 식사를 하시더니 갑자기……”
“식사요?”
나는 안재영이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그의 자리에는 갈색 소스가 뿌려진 닭가슴살 스테이크가 놓여 있었다.
나는 안재영과 접시를 번갈아 보고는 퍼득 생각나는 게 있어 손가락으로 소스를 찍어 먹어 보았다.
고소함이 진하게 밴 땅콩 소스.
나는 급히 안재영 쪽으로 다가가 그의 호흡을 살폈다.
피부가 여기저기 붉게 물들어 있고 호흡은 거칠었다.
남자 승무원은 아무도 나서지 않아 곤란하던 차에 내가 나타나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갑게 물었다.
“호, 혹시 의사신가요?”
“아뇨. 그건 아닌데.”
“아닌데?”
“이 친구가 왜 쓰러졌는지는 알 것 같네요.”
“네? 정말요?!”
나는 쓰러진 안재영을 쳐다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6장 인연
나는 안재영이 앉았던 좌석 위의 선반을 즉시 열었다.
“덜컹!”
선반이 열리자 검은색 가방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둘 다 재영이 겁니까?”
승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두 가방을 모두 꺼내고는 쥐 잡듯이 안을 뒤졌다.
곧 내가 원하는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다!’
내가 손바닥만 한 길이의 작은 상자를 꺼내자 옆에 있던 승무원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게 뭡니까?”
나는 대답 대신 상자를 열고는 길쭉한 막대기를 하나 꺼냈다.
화이트보드 앞에서 강의할 때 사용하는 매직펜처럼 생긴 막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