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손놀림으로 노란색 뚜껑을 연 다음 막대기를 들어 안재영의 허벅지를 향해 강하게 눌렀다.
“어…….”
옆의 승무원은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재영의 입에서 토사물이 나오더니 숨통이 트였다.
“커억!”
나는 즉시 호흡을 확인하고 그를 옆으로 돌려 눕혀 기도가 막히는 걸 막았다.
안재영의 얼굴에 차차 혈색이 돌아오더니 나를 보며 힘겹게 말했다.
“고…… 고맙다.”
안재영이 움직이며 고맙다는 말을 꺼내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환호했다.
“와!!!”
나는 승무원들에게 안재영의 상태에 대해 말한 뒤 그를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이동하는 사이.
아까와는 다르게 승무원들이 나를 보는 표정에서 존경심과 경애감이 느껴졌다.
내가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오자 최루리와 홍지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대체?”
“우 사장님이 뭔가 했어요?”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둘은 친한 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더니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였다.
짝짝짝짝.
내가 이야기한 내용을 들은 주변 승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만석인 이코노미 전 좌석으로 번져 나갔다.
“뭐 해요? 빨리 일어나서 인사하세요!”
최루리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는 내게 외쳤다.
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수 소리는 멋진 공연이 끝난 직후의 앵콜 요청처럼 한동안 멈출 줄 몰랐다.
박수 소리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을 무렵.
제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승객께서 비즈니스석에서 쓰러진 환자분을 구하신 분이 맞나요?”
“네. 제가 그랬습니다만?”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 저는 이 비행기의 기장입니다.”
“아 네.”
“지금 당장 자리를 옮겨 주셨으면 합니다.”
“네?”
* * *
기장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비즈니스석이었다.
기장은 기내에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해결해 줘서 고맙다며 우리 일행의 자리를 모두 비즈니스석으로 승급해 주었다.
최루리와 홍지혜는 덕분에 좋은 좌석에 앉게 되었다며 신나 했다.
“와! 여기 편하고 좋네요.”
“그러게요. 이코노미석이랑은 비교도 안 되고요.”
자리를 옮기고 몇 시간 뒤.
죽다 살아난 안재영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는지 혈색이 많이 좋아 보였다.
“좀 괜찮냐?”
“응. 덕분에 살았다. 진짜 고맙다.”
“진짜 나 때문에 산 줄 알아라.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녀석이 뭘 믿고 땅콩 소스를 먹어?”
“그러게. 배가 너무 고파서 잠시 미쳤나 보다.”
“아니 그것보다 너 정도 되는 VIP 승객의 알레르기 정보에 대해서 항공사에서 모르고 있었다는 게 난 더 이상하다.”
“원래 다른 선배가 가기로 되어 있다가 내가 가는 거로 어제 급하게 결정됐다고 그랬잖아? 그러면서 항공사에서도 승객 체크를 제대로 못 했나 봐. 그렇다고 설마 스테이크에 땅콩 소스를 뿌릴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땅콩 알레르기요?”
최루리가 궁금하다는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이 녀석, 땅콩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예전에 스터디하다가도 한 번 아나필락시스가 왔었어요.”
“아나필락시스? 그게 뭐죠?”
내가 대답을 하려는 사이 안재영이 웃으며 답했다.
“갑자기 나타나는 전신 알레르기 반응이랄까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 질환이죠.”
“이런. 진짜 위험했군요. 그런데 우 사장님은 그 주사기? 그게 재영 씨 가방에 있는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에피네프린 자동 주사기요? 녀석은 위험할까 봐 항상 가방에 휴대하고 다니거든요.”
“에피네프린?”
“아나필락시스가 왔을 때 빠르게 치료할 수 있는 응급 치료제예요.”
“이런 경우가 자주 있나 봐요?”
최루리가 안재영을 바라보고 묻자 안재영이 부끄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몇 번 있었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주사기는 항상 휴대하고 다녀요. 세진이 녀석 진짜 기억력 하나는 끝내 주게 좋네요. 스터디 때 한 번 본 걸 다 기억하고.”
“그때도 너 죽는 줄 알고 난리가 났었지. 카페가 다 뒤집힌 건 기억 안 나?”
“그랬었나? 하하. 그러고 보니 그때도 네가 나한테 주사하지 않았냐?”
“그래. 덕분에 사용법을 익혔고. 넌 진짜 나 때문에 산 줄 알아라.”
“크크. 암튼 고맙다.”
“조심해라, 인마.”
나와 안재영은 조금 더 이야기를 주고받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면서 대화를 마쳤다.
응급 처치로 상태가 좋아졌다지만 2차 반응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안정이 필요했다.
다행히 비행기 안에는 여분의 에피네프린이 있으니 아까와 같은 상황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 * *
14시간에 걸친 비행의 끝에 비행기는 애틀랜타 하츠필드 잭슨 공항에 도착했다.
오전 9시 20분에 출발하였지만, 날짜 변경선을 통과한 덕에 여전히 같은 날 오전 10시 10분이었다.
“신기하네요. 14시간이 지났는데 고작 1시간여밖에 차이가 안 난다는 게.”
“대신 한국에 돌아갈 때는 역으로 하루를 손해 보죠.”
비행기에 연결된 통로를 빠져나오면서 내가 말하자, 최루리가 웃으며 답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재영이 물었다.
“세진이, 너 미국 처음이냐?”
녀석은 우리보다 먼저 비행기를 빠져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도 처음이고,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이다.”
“짜식. 서울 촌놈이었군. 나까지 부끄러워지니까 너무 여기저기 둘러보지 마라.”
“나 때문에 죽다 산 녀석이 염치도 없네.”
“크크. 몰랐냐? 나 염치없는 인간인 거?”
여행은 취미가 아니었지만, 미국은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나라였다.
비행깃값도 비쌌고, 딱히 갈 기회나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입국 심사장이 보이자 나는 살짝 긴장했다.
미국은 입국 절차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특히 2001년에 일어난 9.11 테러 이후 꾸준히 입국 심사를 강화해 외국인에게는 무척이나 까다롭게 굴었다.
‘미국 입국 심사 팁 같은 건 기사로 몇 번 쓴 기억이 나지만 아무래도 처음이라 긴장되네.’
길게 늘어선 줄의 끝에 서려던 순간.
저 멀리 있던 안재영이 내게 손짓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는 재차 손짓했다.
우리가 그쪽으로 가자 그는 여기에서 입국 심사를 하라고 알려 줬다.
“내가 신원 보증했으니까 별일 없으면 통과할 거다.”
“대기업 외아들은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거냐?”
“이걸로 빚 갚은 거다? 오케이?”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입국 심사를 받았다.
안재영이 무슨 말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심사관은 정말 간단한 질문만 던졌다.
입국 심사 영어 필수 표현을 외우고 또 외웠는데, 너무 쉽게 통과하니 허탈감이 들 정도였다.
입국을 마치고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쪽을 돌아보자 줄은 전혀 줄어 있지 않았다.
내 앞에 서 있었던 사람이 고작 몇 미터 이동했을 뿐.
새삼 안재영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모두 입국 심사를 마치고 출국장으로 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크리스티안 케이서스였다.
그녀의 손에는 삐뚤삐뚤하게 한글로 ‘오프라인의 미국 방문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팻말이 들려 있었다.
내가 반갑게 다가가 악수하자 그녀도 큰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미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미스터 우. 이거 내가 썼는데 맞나 모르겠네요.”
“오랜만입니다. 크리스티안. 글자는 정확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쪽은 어떻게?”
그녀는 내 옆에 서 있던 안재영을 보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그와 격하게 포옹했다.
“아니, 에릭! 여긴 어쩐 일이에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네. 그런데 미스터 우하고는 아는 사이예요?”
“하하,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네?”
안재영은 케이서스에게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려 주었다.
“이런, 지금은 괜찮아요?”
“네. 문제없어요. 제가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데, 기내식에 땅콩 소스가 있었던 걸 모르고 먹었다가 사달이 났네요.”
“저런. 정말 위험했군요. 미스터 우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겠어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내가 손사래를 치자 안재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녀석의 자리는 이코노미석이었고 저는 비즈니스석이었어요. 비즈니스석까지 와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보통은 자기 일 아니면 관심도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저희 우 사장님이 정말 대단하시죠.”
최루리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너 영어 이름이 에릭이었냐?
“응. 왜 마음에 안 드냐?”
“그나저나 너는 케이서스를 어떻게 아는 거야?”
“아. 예전에 그녀가 한국의 재벌들에 대해 취재를 한 적이 있었거든.”
“그래?”
“응. 아마 그때 재벌 3세로는 내가 유일한 인터뷰어였을걸?”
“뭐? 인터뷰에 응한 거야?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했더라……. 오래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사실대로 다 말했던 것 같은데? 한국 재벌은 문제가 많다고. 하하.”
“아버지가 뭐라 안 하시디?”
“크크. 엄청나게 혼났지. 그거 하고 나 바로 군대 갔잖아.”
해당 인터뷰는 내가 훈련소에 가 있는 동안 벌어진 일로 나는 잘 몰랐지만, 세간에선 엄청나게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나와 안재영이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케이서스가 홍지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옆에 분은 누구시죠? 미시즈 최는 이전 인터뷰 때 본 분이고.”
곧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오프라인의 소셜부장인 홍지혜라고 합니다.”
면접 때도 느꼈지만 정말 그녀의 발음은 끝내 줬다.
최루리의 발음도 좋았지만, 현지인이 아닌 외국인의 느낌이라면 홍지혜의 발음은 그야말로 본토.
“잠깐만, 홍지혜라고? 얼굴도 그렇고 이름도 어쩐지 낯이 익은데…….”
옆에서 지켜보던 안재영이 홍지혜라는 이름을 듣고는 턱을 긁었다.
“아 맞아! 혹시 한국 최초의 하버드 전체 수석?”
“응? 네가 그건 또 어떻게 알아?”
내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묻자 안재영이 더 크게 놀라며 답했다.
“대박! 방송이든 신문이든 아주 며칠은 떠들어 댔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겠냐! 한국에서 하버드 전체 수석이 나왔다고. 그런 인재가 너희 회사에 있다니. 이거 완전 대박감인데? 왜 아무도 몰랐지?!”
홍지혜는 자기 칭찬이 나오자 살며시 웃으며 안재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 그럼 긴 여행 끝에 모두 피곤하실 텐데 호텔로 이동해 볼까요? 에릭 당신 호텔은 어디예요? 내가 호텔까지 같이 태워다 줄까요?”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지금 바로 병원에 가 봐야 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