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00)

“그렇군요. 몸조심해요.”

“당신도요. 그럼 모두 다음에 또 봐요. 세진아, 고맙다! 연락할게.”

안재영이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럼 우리도 이동해 볼까요?”

“네. 그런데 차는 어디서 타면 될까요?”

“하하. 지금 눈앞에 있잖아요?”

“네? 어디요?”

케이서스가 자기 뒤에 서 있는 거대한 것을 가리키며 웃었다.

길이가 8m가 넘는 거대한 흰색의 물결.

단단한 군인을 연상시키는 각진 얼굴과 네모반듯한 몸매.

허머 H2.

기다란 리무진으로 개조된 허머 H2가 케이서스의 뒤에 떡하니 서 있었다.

‘허머는 군용차만 있는 줄 알았는데 리무진도 있구나.’

그 장대한 외관에 나는 물론 일행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차를 구경하고 있는데 운전석에서 2m가 훌쩍 넘는 거구의 백인 남성이 내렸다.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그를 보고 최루리가 깜짝 놀라며 내 뒤로 숨었다.

케이서스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두려워 마세요. 앞으로 4박 5일간 여러분들을 가이드해 줄 친구예요. 이름은 닉.”

우리는 리무진 운전사인 닉과 통성명을 나누었다.

무서워 보이는 외관과 달리 닉은 우리의 짐을 친절하게 차 안에 실어 주었다.

화려한 외관만큼 내부도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다.

좌우로 길게 배치된 가죽 좌석이 고급스러움을 뽐내는 가운데, 화려한 조명과 각종 전자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와! 저기 좀 보세요! 아이스박스에 샴페인과 와인잔도 있어요!”

최루리가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한 채 아이스박스를 가리켰다.

케이서스는 얼마든지 마셔도 괜찮다며 홀짝거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는 사양하지 않고 각자 자리에 앉아 닉이 따라 주는 샴페인을 나눠 마셨다.

“CNN에서 이런 차도 보유하고 있는 건가요?”

홍지혜의 물음에 케이서스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특별히 빌린 차입니다.”

“정말요? 엄청 비싸 보이는데요?”

“싸진 않죠. 한 시간 빌리는 데 200달러니까. 그래도 여러분들이 오신다니까 제가 힘 좀 썼어요.”

케이서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1달러가 1,150원 정도니까. 하루에 열 시간 빌리면 2,000달러고, 그럼 하루 빌리는 데 230만 원?!”

최루리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사장님. 이거 5일 빌리면 천만 원이 넘는데요?”

“그러게요. 엄청난 대접이네요.”

나는 케이서스의 환대에 거듭 감사를 표하며 창밖에 보이는 낯선 풍경을 구경했다.

보이는 풍경이 다른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들뜰 줄이야.

그렇게 차로 15분을 이동했을까?

금세 높은 빌딩들이 보이는 도심으로 들어서더니 차가 한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니 ‘매리어트 마퀴스 호텔’이라는 표기가 보였다.

최루리가 내게 귓속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매리어트 계열이니까 고급 호텔인 거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서스를 따라 로비로 들어갔다.

그녀는 호텔 카운터 앞에서 멈춰 섰다.

“피곤하실 것 같아서 바로 체크인을 할 수 있도록 어제 날짜로 이미 방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쉬시다가 3시쯤 이곳으로 다시 내려오시면 닉이 애틀랜타 곳곳을 안내해 줄 거예요.”

“고맙습니다, 혹시 부사장님은 회사로 돌아가시나요?”

“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아쉽지만 여기서 여러분들과 헤어져야 할 것 같네요. 오늘내일 애틀랜타 구경하시면서 쉬시고, 내일모레 아침에 CNN 본사로 오시면 제가 다시 안내해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모레 뵙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궁금한 건 닉한테 물어보세요. 그는 정말 친절하거든요.”

케이서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떠났다.

우리는 체크인을 마친 뒤 1시에 로비에서 보자고 하고는 각자 방으로 올라갔다.

스위트 룸으로 예약을 해 주었는지 방이 무척 넓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높고 낮은 빌딩들과 그 사이사이 우거진 숲들이 무척 이국적이었다.

쏴아아아-

나는 장시간 비행으로 지친 몸을 달래 주기 위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피로와 긴장이 흘러내리는 물과 함께 씻기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알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너무나 넓어서 혼자 눕기 민망할 정도였다.

푹신한 침대의 마력에 빠져 빈둥거리다 시계를 보니 1시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사람 구경이나 해 볼까 싶어 방에서 나오는데 반대쪽에서 홍지혜가 걸어왔다.

“응? 약속 시각은 아직 멀었는데 벌써 나왔어요?”

“아 네. 그냥 밑에 구경 좀 하려고요. 그러는 사장님은요?”

“저도요.”

우리는 로비로 내려가기 위해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향긋한 비누 향기.

머리카락에 물기가 마르지 않은 걸 보니 홍지혜도 방금 씻은 게 틀림없다.

“방 넓죠?”

“네. 엄청 넓어요. 화장실 가는 데만 한참 걸리던데요?”

“그러게요. 리무진도 그렇고 호텔도 그렇고 케이서스가 진짜 우리한테 신경을 많이 써 주네요.”

“그만큼 우리한테 기대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CNN 방문이랑 콘퍼런스에서 사장님이 잘해 주셔야겠네요.”

“저야 뭐 발표만 하는 건데요. 홍 부장님을 비롯해서 다들 열심히 해 주셨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겠죠.”

로비에 도착한 우리는 가볍게 호텔 주변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애틀랜타의 10월은 한국의 가을과 비슷했다.

후드티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길을 걸었다.

“우 사장님 후드티 입은 건 처음 보네요.”

“원래 좋아하는데, 회사에 후드티 입고 가기는 좀 그렇잖아요? 평사원이면 모를까 사장이기도 하고요.”

“그러네요. 후드티 잘 어울리세요.”

“고마워요. 홍 부장님도 화장이랑 옷이랑 잘 어울리네요.”

“뭘요. 고맙습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화장하고 옷 입고 다니면 남자들이 많이 쳐다볼 거 같은데요?”

“네? 저 놀리는 거면 그만두시는 게 좋아요.”

“아뇨 진심이에요. 평소랑 많이 달라서 놀랐어요.”

“저도 미국에 그냥 놀러 온 건 아니니까요. 오프라인을 대표해서 온 거니까 신경 좀 썼어요.”

“하하. 서울 가서도 계속 신경 좀 써 주세요.”

홍지혜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홍 부장님은 왜 한국에 들어왔어요? 하버드 전체 수석 정도면 미국에서도 유명하다는 기업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했을 텐데.”

홍지혜가 오프라인에 있다는 사실에 안재영이 호들갑을 떨었던 게 생각났다.

“한국인은 힘들거든요.”

“네? 뭐가요?”

“인종 차별이요. 겉으로는 없다지만 미국의 인종 차별은 정말 엄청나요. 백인이 아닌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죠.”

“아니 하버드 전체 수석인데도요?”

“물론 그게 방패막이 되어 주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백인과 동양인의 벽은 건너뛸 수 없어요.”

“그렇군요. 하버드 전체 수석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인종 차별이 심하다니.”

“네. 미국이 인종 차별이 없다는 건 허구예요. 가식이죠.”

“좋아요. 미국은 그렇다 치고 오프라인은 왜요?”

“면접 때 그렇게 질문하셨는데도 또 궁금하세요?”

“면접 본 지 오래돼서 이제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때 너무 많은 분을 봐서 더 그렇고요.”

“킁. SNS를 통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기사를 배포한다는 데 끌렸어요. 재미난 공고 글도 흥미로웠고요.”

“하하. 그거 쓴다고 골머리 좀 썩었죠.”

“뭣보다. 이런 공고 글을 올리는 사람이 있는 조직이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도 있었고요.”

“그래서 어떤 거 같아요? 괜찮나요?”

그녀는 살짝 나를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좋네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지혜만 제대로 조직에 녹아든다면 오프라인은 훨씬 빨리 성장할 수 있으리라.

시계를 보니 어느덧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최 부장님 기다리시겠네요. 돌아가죠.”

“네.”

호텔 로비로 돌아오니 최루리가 우리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입구에서 들어오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니, 말도 없이 둘이 나가면 어떡해요!”

“미안해요. 최 부장님. 한 바퀴만 돌고 오려고 했는데, 초행길이라 길을 헤맸네요.”

“흥! 나만 빼고 둘이 데이트했다 이거죠!”

“아니에요. 데이트는 무슨. 그냥 동네 산책.”

우리는 점심으로 근처에 있는 유명 수제 버거집에서 햄버거를 시켰다.

최루리가 추천한 가게였다.

주문한 지 오래지 않아 나온 햄버거는 일단 크기부터 달랐다.

미국인들이 먹는 거라 그런지 한국에서 파는 버거의 2배에 가까운 크기.

게다가 이 맛은!

일반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파는 햄버거와는 차원이 다른 맛.

나는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음에도 버거를 하나 더 주문해야만 했다.

“어머, 우 사장님 배 많이 고프세요?”

“아뇨. 이거 진짜 너무 감동이네요.”

“하하. 친구가 애틀랜타 오면 이 집 꼭 들르라고 했거든요. 다행입니다.”

“정말 제 인생 버거예요. 고맙습니다, 최 부장님.”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나온 우리는 다시 호텔 로비로 돌아왔다.

로비 입구에는 거대한 체구의 닉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얌전하게 서 있었는데, 멀리서도 그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햄버거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최루리가 그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닉, 점심 먹었어요?”

“네. 먹었습니다. 점심 드셨나요?”

“네. 저희는 그린 하우스에서 햄버거 먹었어요.”

“오! 맛을 아시는 분들이군요. 그 집 버거가 이 동네에서는 최고죠.”

“저희 사장님도 2개나 드셨답니다.”

“와우! 2개나? 버거를 진정 좋아하시는 분이군요. 저도 2개는 쉽지 않은데.”

닉이 나를 보며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런데 우리 오후 일정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근처에 마틴 루서 킹 기념관이 있습니다.”

“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맞아요. 정확합니다.”

나는 아까 홍지혜한테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조심스럽게 최루리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그런데 닉은 백인인데, 마틴 루서 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는 평생을 흑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에 힘썼잖아요?”

나의 말에 닉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는 미국의 영웅입니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하죠.”

닉을 바라보는 홍지혜의 표정에서 한결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기념관은 호텔에서 차로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기념관은 마틴 루서 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과 생가 그리고 그의 묘소로 이뤄져 있었다.

생가에는 그가 1964년에 수상한 노벨상 메달이 전시되어 있었고, 야외의 풀 한가운데 화강암으로 된 관 안에는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다.

홍지혜는 쓸쓸한 표정으로 마틴 루서 킹의 관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를 존경하나요?”

“그럼요. 평생을 인권 운동가로, 흑인 해방 운동가로 사시다 겨우 39세에 암살되신 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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