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씨.”
“네?”
“저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푸훗, 뭐예요. 갑자기.”
홍지혜가 환하게 웃으며 나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저는 우리 오프라인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언론사가 되어서, 마틴 루서 킹과 같은 약자를 대변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실어 주고, 그로 인해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고 싶습니다.”
“우 사장님…….”
“그러기 위해서는 지혜 씨 같은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정말 큰 힘이 되지만요.”
홍지혜가 입술을 지긋이 다물며 답했다.
“물론이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최루리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우 사장님! 이거 도대체 언제 쓰신 거예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이거요 이거! 지금 Never랑 넥스트에서 많이 본 기사 1위에 올랐어요, 이 기사가!”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우 사장님이 올린 기사 아니에요?”
미국에 온 이후 노트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궁금증은 기사를 끝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해결됐다.
바이라인에 홍지혜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옆에 있는 홍지혜에게 기사를 들이댔다.
“도대체 언제 올린 거예요?”
“호텔에 도착하고 바로요.”
“올렸으면 올렸다고 이야기 좀 해 주지 그랬어요.”
“말씀드릴 기회를 놓쳤네요. 죄송합니다.”
“이런 건 꼭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잘했죠?”
“하하. 이거 참.”
홍지혜가 나를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안재영을 구한 일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내가 안재영에게 에피네프린 자동 주사기를 놓는 현장 사진을 기사에 첨부해 놓았다.
출처를 보니 같은 비행기를 탄 비즈니스석 탑승자의 트위터였다.
사진 속 모습에서 당시의 긴박함과 현장감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홍지혜가 쓴 뉴스의 댓글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재빠르게 응급조치를 한 나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했다.
<캬아! 3만 피트 상공에서 아나필락시스 반응 환자를 구하다니! 오프라인 사장 대단하네!>
<오프라인 애독자로서 뿌듯하네요. 자랑스럽습니다! 우세진 사장님!>
<환자가 진양 그룹 외아들 아냐? 대박!!! 지금부터 오프라인은 진양 그룹 협찬받겠네 ㅋㅋ>
최루리도 지지 않았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더니 곧바로 해당 기사를 4개 국어로 편집하여 올렸다.
‘미국에서는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에만 집중하려고 했는데, 다들 너무 일을 열심히 해 주네.’
최루리도 홍지혜도 오프라인의 성공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다니, 기분이 뿌듯했다.
* * *
첫날 일정을 마친 우리는 닉과 헤어진 뒤 호텔로 돌아왔다.
모두 장시간 비행과 연이은 관광에 지쳤는지 별다른 약속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샤워를 마치고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애틀랜타에서의 두 번째 날.
오전에는 높이 500m, 둘레만 8㎞가 넘는 세계 최대 단일 화강암 덩어리인 스톤 마운틴을 둘러봤다.
점심을 먹은 이후에는 세계 최대 수족관이라는 조지아 수족관을 돌아보았고, 이후 코카콜라 박물관, 메르세데스 벤츠 스타디움 등을 구경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둘째 날 일정을 마친 우리는 호텔 로비에서 닉과 헤어졌다.
방을 향해 흩어지려는데 최루리가 대뜸 외쳤다.
“어제는 다들 피곤해서 그냥 잤는데, 오늘은 가볍게 한잔 어때요?”
최루리의 제안에 나도 홍지혜도 흔쾌히 수락했다.
미국에서 놀 수 있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내일은 CNN 방문에, 모레는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가 있으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좀 놀아도 괜찮겠지.’
점심을 거하게 먹은 데다가, 닉이 간식으로 이것저것 챙겨 주었기에 배는 고프지 않았다.
우리는 곧바로 호텔 로비에 위치한 바(BAR)로 이동, 각자 원하는 칵테일을 골랐다.
최루리는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홍지혜는 피나콜라다, 나는 잭콕을 주문했다.
“우 사장님, 잭콕 좋아하세요?”
“사실 소주를 더 좋아하지만 여기는 소주를 안 파니까요.”
“하하. 그렇네요. 사실 저희 남편도 잭콕을 좋아하거든요. 역시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공통점이 있단 말이야.”
최루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롱티는 애주가의 술 아닌가요? 일종의 폭탄주잖아요?”
나는 과거 칵테일에 대한 기사를 발행했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와! 우 사장님, 칵테일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맞아요. 롱티는 미국의 금주법 시대에 몰래 마시기 위해 만들어진 레시피라는 게 정설이죠. 걸리더라도 ‘어머! 이건 술이 아니라 그저 저희 동네에서 마시는 홍차거든요!’하며 발뺌하기 좋게요.”
“하하. 아무튼, 다들 고생 많으세요. 내일부터는 CNN을 방문하고, 모레는 콘퍼런스가 있으니까 쉬는 시간은 지금이 마지막이네요. 남은 시간 계속 파이팅해 주세요!”
“물론이죠! 치어 업!”
“치어스!”
우리는 이후 칵테일 몇 잔을 더 시키며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최루리가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홍지혜도 제법 술을 마실 줄 안다는 건 의외였다.
특히 최루리가 엄청 기뻐했다.
“뭐야, 홍 부장 술 좀 하잖아?”
“제가 잘 마시면 안 되나요?”
“그게 아니라 회사 회식은 거의 안 나왔으니까! 나는 술을 못 마셔서 피하는 줄 알았지!”
“마실 땐 마셔요. 불편해서 안 갔을 뿐.”
“그럼 이제 언니랑 둘이서 자주 마시면 되겠는데~”
“회사에서는 그냥 부장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언니는 불편한데.”
“아 진짜~ 안 되겠다. 홍 부장 술 좀 더 마셔! 여기요! 칵테일 한 잔 더요!”
홍지혜도 최루리의 그런 접근이 싫지 않았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덕분에 나도 계속 칵테일을 주문했다.
소주와는 달리 새콤달콤한 맛.
* * *
띠리리리! -띠리리리!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스마트폰의 알람을 껐다.
화면을 보니 오전 6시 정각.
자리에서 일어나니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휴 머리야. 어제 분위기가 좋아서 너무 많이 마셨나.’
닉을 보기로 한 시간은 9시였지만, 미리 준비하기 위해 재빨리 샤워하고 오늘 CNN 본사에서 발표할 내용을 다시 리허설한다.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밖에서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흰색 가운을 벗고 옷을 입은 뒤 문을 열었다.
최루리였다.
“역시 벌써 일어나셨네요?”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머리 아프지 않으세요? 저는 칵테일 먹고 나면 다음 날 숙취가 더 심하더라고요.”
“조금요. 머리가 좀 쑤시네요.”
“헤헤. 제가 그럴 줄 알고 준비했죠!”
그녀는 내게 숙취 해소제를 건넸다.
“아니 이건 어디서 구하셨어요?”
“하하, 한국에서 올 때 미리 준비했죠. 그럼 저는 홍 부장한테도 전하러 갈 테니까 이따 봐요~”
“네. 고맙습니다, 최 부장님.”
나는 최루리에게 건네받은 숙취 해소제를 한 번에 들이켰다.
플라세보 효과인지 확실히 괜찮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발표 준비에 매진하다 로비에 내려간 것은 8시 50분.
닉은 물론 최루리와 홍지혜 모두 짐을 싸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럼 가 볼까요?”
“네!”
호텔에서 CNN 센터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우리는 닉의 요청으로 리무진을 타고 건물 앞에서 내렸다.
화려한 리무진에서 내리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저 동양인들은 대체 누구지?’ 하는 모습이었다.
입구에는 빨간색의 CNN 로고가 거대하게 형상화되어 우리를 반겼다.
‘여기가 CNN의 본사구나.’
말로만 듣던 CNN의 본사를 직접 오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내 입구에서 케이서스가 내려왔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CNN 본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그럼 같이 돌아볼까요? 저를 따라와 주세요.”
그녀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어마어마한 크기의 실내 공간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건물로 둘러싸인 거대한 실내는 뉴스 룸은 물론 푸드 코트와 호텔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공간들로 구성돼 있었다.
“앗! 저 차 우리가 탄 차 아니에요?”
최루리가 1층 한 곳에 전시된 허머 차량을 가리켰다.
한국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케이서스가 이해한 듯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여러분이 탄 차와 같은 브랜드. 하지만 의미는 전혀 달라요. 저 차는 이라크 전쟁 당시 취재용으로 사용했던 차량이에요. 뉴스 편집과 전송이 가능한 각종 디지털 장치가 들어 있는 것은 물론, 방탄 작업이 돼 있어서 우리 리포터와 기술자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작은 뉴스 룸이죠.”
“와! 종군 취재 차량이군요?”
“네. 저희의 자랑스러운 훈장입니다.”
케이서스의 표정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시 차량을 지나자 센터 중앙을 길게 가로지르는 에스컬레이터가 나타났다.
“길이가 엄청나게 기네요?”
“네. 1층에서 8층까지 한 번에 연결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죠.”
“와. 8층까지 한 번에? 엄청나군요.”
“후후. 벌써 놀라시면 곤란한데요. 올라가시죠.”
8층에 도착하자 케이서스는 우리를 데리고 CNN 곳곳을 소개해 줬다.
직원 수만 4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방송국답게 다양한 조직과 인적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1시간 가까운 투어가 끝나자 케이서스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CNN 투어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저희 임원진과 몇몇 시니어 기자들을 대상으로 오프라인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괜찮으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는 가볍게 침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서스는 우리를 한쪽 방으로 이끌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스무 명 남짓 되는 인원이 우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부는 환하게 웃으며 환영해 주었고 일부는 우리를 위아래로 관찰했다.
특히 정중앙에 앉은 중년 대머리 남성의 눈매는 무척이나 날카로워 마치 먹이를 앞둔 육식동물 같았다.
우리는 묵례를 하고는 가운데로 이동했다.
케이서스가 중앙에 있는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제가 특별히 한국에서 모신 귀한 손님들입니다. 소셜 언론 오프라인의 공동 사장, 우세진 씨를 모십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뜨거운 박수 소리와 함께 나는 단상에 섰다.
그리고 내 옆에는 홍지혜가 통역을 위해 함께 올라섰다.
원래는 최루리가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어제 술자리에서 홍지혜의 발음이 더 좋다고 내가 말하자 최루리가 흔쾌히 그녀에게 양보한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본 다음 마이크를 잡았다.
홍지혜도 준비가 되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십니까. CNN 여러분. 저는 SNS를 기반으로 뉴스를 유통하는 소셜 언론, 오프라인의 공동 사장 우세진입니다.”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