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영은 나의 의도를 파악한 듯 빠르게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가능하면 저기 중앙에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라고 쓰인 문구가 함께 들어가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서시고, 두 분 다 서로 더 가까이 붙어 주세요.”
“하하, 이거 민망하구먼!”
이광우는 말은 그렇게 하고는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자신의 한쪽 손을 올렸다.
그의 표정에선 ‘오늘 행사의 주인공을 독차지한 사람이 바로 나다!’라는 우월감이 가득했다.
“네 좋습니다! 그럼 찍을게요. 웃으시고, 하나, 둘, 셋, 찰칵!”
‘어차피 이광우의 목적은 나랑 사진 한 장 찍는 게 전부였을 테니까.’
이광우는 만족스러운 듯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고맙소. 우 사장! 그럼 한국 가서 봅시다!”
이광우 의원은 일행을 데리고 빠르게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가면서 덩치 큰 외국인들이 그 자리로 다시 몰려들었다.
안재영의 키가 작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카메라에 가방에 잔뜩 짐을 가지고 있던 그는 중심에서 빠르게 밀려 나갔다.
그는 까치발을 하며 힘겹게 고개를 들고는 내게 외쳤다.
“세진아! 오늘 정말 멋졌다! 사진 찍게 해 줘서 고마워!”
“응! 고맙다. 연락할게!”
사람들에게 떠밀려 점점 멀어져 가는 안재영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이 들었지만, 그것보다는 내 옆에서 정신없이 대답하는 직원들을 챙기는 게 먼저였다.
“두 분 다 이제 그만하시고, 위로 올라가 볼까요?”
“아휴! 그 말만 기다렸습니다. 우 사장님.”
“네네.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죠. 이러다 죽겠습니다.”
둘이 우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어서 나가자고 재촉했다.
우리는 행사장을 나와 커터가 알려 준 곳으로 향했다.
스페셜 스위트 룸으로 올라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터가 알려 준 장소에 도착하자 검은 양복을 입은 거구의 사내 둘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는 접근이 제한된 곳입니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대꾸하는 그들에게 이름과 소속을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고는 곧 공손하게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주었다.
“타시죠.”
엘리베이터를 타니 최상층(Top floor)이라고 적힌 버튼 하나가 전부였다.
버튼을 누르니 엄청난 속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이거 속도 너무 빠른데요.”
“놀이기구 타는 기분이에요.”
“난 좀 무서울 정도야. 어휴….”
어느새 친해진 최루리와 홍지혜가 엘리베이터의 빠른 속도에 놀라며 말을 주고받았다.
짧은 시간에 수백 명의 사람들을 대응하면서 전우애 같은 거라도 생긴 걸까.
“땡!”
최상층에 도착하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이내 호화찬란한 스페셜 스위트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문틀부터 소파, 커튼, 조명 등 황금빛으로 가득한 방.
또한 기대에 가득 차 우리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선뜻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이제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우리를 이 자리에 초대한 CNN 보도국장 데이비드 커터였다.
그는 어서 들어오라며 우리를 안내했다.
스페셜 스위트룸의 분위기는 아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적은 만큼 더 뜨거운 구애가 이어졌다.
방에 있던 모든 이들이 우리 주변에 둥글게 몰려들며 질문 공세를 펼쳤다.
“여기 오면 좀 쉴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아, 정신없네요, 없어. 아 네네, 저는 오프라인의…….”
최루리와 홍지혜는 또다시 정신없이 자신을 소개하며 오프라인을 알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지고 온 명함집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대신 전 세계 유명 미디어의 고위급 인사들의 명함으로 가득 찼다.
* * *
이번 애틀랜타행은 그야말로 엄청난 성과였다.
전 세계 주요 매체들이 모두 내가 발표한 내용을 한 꼭지 이상씩 기사로 다뤘고, CNN은 ‘소셜 언론의 탄생’이라는 특집 프로그램까지 마련해 주었다.
영국의 유력지인 가디언에서는 ‘오프라인이, 언론의 지형을 바꿀까?’라는 제목으로 오프라인에 대한 상세한 소개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국내에서는 고려 일보가 단독으로 기사를 쓰면서 해당 내용을 신문 3면에 배치했다.
1면만큼은 아니지만 3면 역시 주요 기사만 배치한다는 점에서 고려 일보가 이번 사안을 얼마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해당 지면의 하단에는 이광우 의원과 찍은 사진도 조그맣게 들어가 있었다.
“이건 뭐, 기대 이상 정도가 아니라 상상 초월이군요!”
백철웅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덕오를 비롯해 모두의 표정에서 나에 대한 존경심과 오프라인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가득 느껴졌다.
“이번에 동행하신 최루리 부장님과 홍지혜 부장님 덕이 큽니다. 두 분께도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의 말에 모두가 최루리와 홍지혜를 바라보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아뇨, 저희는 단순히 통역했을 뿐이고, 이 모든 것은 우세진 사장님의 공입니다.”
“맞아요. 연습한 것에서 더 나아가 상황에 따라 번뜩이는 재치와 농담을 하시는데, 통역하는 중간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어요.”
“그치그치? 진짜 애드립 제왕이셨어!”
“맞아요, 언니. 내가 지금 맞게 통역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대본에 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니까요.”
“호호호, 맞아, 맞아.”
둘이 즐겁게 웃자 모두가 얼빠진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언니?”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특히 박창후는 도저히 실감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최 부장님! 지금 홍 부장과 호형호제 아니 호자호매하는 겁니까? 이 무슨 천지개벽할 일이…….”
“흥! 무슨 말씀을요~ 저희가 얼마나 친한데요.”
“맞아요. 박 부장님은 말씀을 좀 가려서 하셨으면 좋겠네요.”
박창후는 둘의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뒤로 주춤했다.
“하하하, 이거 이번 여행에 제가 안 간 게 큰 호재였나 보군요. 성과도 성과고, 두 부장님도 친해지시고.”
“아닙니다. 백 사장님. 이번에 함께 가지 못해 너무 아쉬움이 큽니다. 다음에는 꼭 같이 가시죠.”
“하하. 농담입니다. 우 사장님. 아무튼 세 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좀 쉬었다 오면 좋으련만 한국도 그동안 아주 바빴습니다. 이덕오 이사도 크게 한 건 했고요.”
“이 이사가요? 어떤?”
“하하. 그건 직접 들으시죠.”
백철웅의 지적에 이덕오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을 타면서 앞으로 나왔다.
“그게…… 형님 아니 사장님 안 계실 동안 CMS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와! 그거 벌써 끝났어요? 겨울은 되어야 완성된다더니?”
“세 분이 미국에서 고생하시는데 저 혼자 놀 순 없어서. 분발했죠.”
“이야, 역시 이 이사님이셔!”
최루리가 이덕오의 넓은 등짝에 경쾌하게 스매시를 날렸다.
분명 아파 보이는데 이덕오도 기분이 좋은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래서, 성과는 좀 있고?”
“아 네. 트래픽이 이전에 비해 2.5배 정도 늘었고요. 또 기사 작성 시간은 25% 줄었습니다. 내부 만족도도 무척 높고요.”
“엄청난데? 고생했어요, 이 이사.”
“별말씀을요. 저야 뭐 이런 거밖에 도와드릴 수가 없으니.”
“도움은 무슨. 각자 자기가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한 거지. 그나저나 여러분께 드리려고 가져온 선물도 안 풀고 박수만 받았네요. 여기 선물 가져가세요!”
나는 직원들에게 미국에서 산 단체 선물을 뿌렸다.
최루리와 홍지혜가 합세하였고 모두가 신이 나서 흥겨워 보였다.
한참 선물에 관해 설명을 하는데, 백철웅이 자기 방에서 잠깐 보자며 따로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백 사장님.”
“방금 언론 진흥 재단에서 전화가 왔어요.”
“언론 진흥 재단이요? 무슨 일로요? 지원이라도 해 준다든가요?”
“아니요. 우릴 좀 보고 싶답니다.”
“네?”
“이번에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에 다녀온 일로 재단에서도 뭔가 뜨끔했나 봅니다. 오프라인이 전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니까 자신들이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느껴졌나 봐요.”
“안 한 건 맞죠. 연락 한번 한 적 없었으니.”
“그래서, 이참에 자기들도 미디어 콘퍼런스를 준비하고 있는데, 거기서 우리가 발표를 해 줬으면 한다더군요.”
“네? 또요?”
“그것도 다른 매체랑 함께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오프라인 단독 발표!”
“그건 나쁘지 않네요.”
“그럼 콜 하는 걸로?”
“그러시죠. 우리를 알릴 수 있는 자리에는 많이 참석하는 게 유리하니까요.”
한국 언론 진흥 재단은 신문과 인터넷 신문의 건전한 발전과 읽기 문화 확산 및 신문 산업의 진흥을 위하여 설립된 단체로 문화 체육 관광부 산하의 준정부 기관이다.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만큼의 영향은 없겠지만, 그래도 국내 미디어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을 거야. 잘 준비해서 국내에서의 기반을 탄탄히 하는 데 써야겠다.’
“언론 진흥 재단의 전화와는 별개로 우 사장에게 또 할 말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백 사장님.”
“이제 곧 서울에서 G20 정상 회의가 열립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서도 큰 성과를 올렸듯이 이제 국내외 미디어들도 우리 오프라인을 가볍게 보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뭔가 좋은 아이디어 없겠소?”
“G20이라.”
관련 기사를 적었던 기억은 나지만 딱히 별다른 이슈 없이 지나갔던 행사였다.
그나마 논란이 된 건이 있었다면 서울 G20 정상 회의의 기대 효과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보고서로 인해 정부에 비판적인 매체들의 집중포화를 받았다는 정도.
G20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아! 그 사건도 있었지. 생각만 해도 내가 다 창피하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참 고민하다 퍼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백 사장님. 혹시 언론 진흥 재단에서는 누구에게 전화가 왔습니까?”
“소속 연구원이라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재단 이사장과는 아는 사이십니까?”
“아뇨. 아쉽게도 인연이 없는 분입니다만.”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광우 의원을 통한다면 접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광우 의원이라. 재단 이사장은 여당 쪽 사람이라 야당과 그리 친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이광우 의원이라면 어찌 연락할 순 있겠죠.”
“그렇겠죠? 이광우 의원하고 곧 보기로 하였는데 백 사장님도 편한 날짜 알려 주시면 일정 조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그러시죠. 이광우 의원은 저도 겨우 졸라야 볼 수 있는 사람인데, 어찌 금방 약속을 잡으셨군요.”
“애틀랜타에서 제가 좀 챙겨 드렸거든요. 오히려 꼭 좀 보자고 당부하더군요.”
“좋습니다. 나야 아무 때나 좋으니 이 의원과 약속 잡히면 알려 주시죠.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 좀 해 주면 안 됩니까?”
“궁금하시겠지만, 자세한 건 언론 진흥 재단 이사장을 만나고 나서 확답을 받으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사람 참.”
이 건만 제대로 성사된다면 더 이상 국내에서 우리를 무시할 수 있는 언론사는 없으리라.
무엇보다 이번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두면 또다시 그 촌극이 재현될 터이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한국 언론의, 그리고 한국 기자의 명예를 걸고 막아야만 했다.
to be continued
# 1장 G20 정상 회의
여의도의 조그마한 순댓국집.
전체 테이블은 고작 일곱 개에 불과했다.
“이런 데서 괜찮겠습니까?”
“하하 걱정 마시오, 우 사장. 내가 다 알아보고 준비했으니까.”
“바쁘실 텐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원님.”
“아닙니다! 요즘은 우 사장이 더 바쁜 거 아닙니까? 여기저기서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온다면서요? 백 사장 통해서 다 들었습니다.”
나는 백철웅을 슬쩍 바라보았다.
백철웅이 모르는 척 술을 들이켰다.
“그래도 이 의원님 만나는 것보다 중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 와서 처음 연락드린 분이 바로 이 의원님입니다.”
“하하하하. 이 친구 정말 마음에 들어! 안 그러오, 백 사장? 젊은 친구가 아주 듣기 좋은 말을 참 잘해!”
“그러게요. 제가 오히려 옆에서 많이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한잔하시죠.”
“오. 그래요 그래. 언제 잔이 비었는지도 모르게 마셨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