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뜨거움도 잊고 엄마표 커피를 츄르릅 들이켰다.
이내 안재영의 눈이 커다랗게 커졌다.
“이야! 이 커피 진짜 엄청 맛있는데요?”
“정말? 호호 고마워요.”
“아부가 아니라 정말로요. 원두 뭐 쓰시는 거예요?”
“어머! 커피 좋아해요? 이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북부의 아체 지역에서 나는 가요 커피라고 하는데…….”
엄마는 안재영을 데리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원두 자랑을 하실 모양이다.
“어머니는 제주도 마음에 드세요?”
홍지혜가 부엌 쪽을 바라보며 물끄러미 물었다.
“네. 공기도 좋고 풍경도 좋다며 만족하시네요.”
“이 집. 그때 저랑 부동산 와서 봤던 그 집 맞죠? 낯이 익네요.”
“맞아요. 어머니 몸이 편찮으셔서 봐 뒀는데 그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미안해요.”
“뭘요. 제주도에 집이라니. 부럽네요.”
“홍 부장님도 기회 되면 제주도에 땅이나 집 사 둬요. 이제 곧 엄청 오를 거예요.”
“제주도가요?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외딴섬인데 오를까요?”
“저만 믿어요. 말도 안 되게 폭등할 겁니다. 중국인들에게 제주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세요?”
“앗! 형님 저 그거 알아요. 진시황이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초를 찾기 위해 전국 각지에 부하들을 보냈는데, 그중에 서복이라는 부하가 제주도로 왔다는 이야기!”
“맞아. 잘 아네.”
“제가 제주도에 좀 관심이 많잖아요. 헤헤.”
“그런데 중국은 왜요?”
“이제 곧 중국이 엄청나게 성장하면서 돈 있는 자들이 제주도에 땅을 사려고 혈안이 될 겁니다. 한국인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오르기 전에 빨리 사 둬요.”
“가끔 우 사장님은 미래에서 오신 것 같아요.”
“앗! 맞아요. 홍 부장님. 저도 가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니까요! 형님이 말하면 딱 그렇게 되더라니깐요.”
“미래는 무슨…….”
나는 모르는 척 냉큼 커피를 마셨다.
저런 게 여자의 예리함일까.
* * *
대망의 2011년 1월 1일.
새벽 일찍 일어난 우리는 집 근처 다랑쉬오름에 올라 새해의 일출을 맞았다.
주변의 어두움이 차츰 걷히더니 성산 일출봉을 지나 동쪽 바다가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와! 새해예요! 어쩜…….”
홍지혜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르는 새해의 첫 태양을 보며 탄성을 자아냈다.
“장관이네요, 정말.”
“멋있다…….”
모두 말없이 일출을 구경하며 감상에 젖었다.
“올 한 해도 잘들 부탁합니다.”
내가 나지막이 말하자 모두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다랑쉬오름을 내려온 우리는 집에 돌아와 쉬다가 아침을 먹었다.
엄마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내왔다.
“우와! 어머니 어제저녁도 장난 아니었는데, 아침부터 배가 터져 버리겠네요!”
“호호. 많이 드세요.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어머니 음식 잘하는 거야 다 알죠! 그런데 저건 뭔가요?”
이덕오가 식탁 가운데에 놓인 카스텔라를 가리키더니 물었다.
“아…….”
엄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대답하기 곤란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저건, 제주도 전통식이야.”
“뭐? 카스텔라가 제주도 전통이라고?”
“제주는 벼농사가 어려워서 설 제사 음식으로 쌀떡이 아닌 보리떡을 올렸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죠?”
홍지혜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보리떡이 빵과 식감이 비슷하잖아요? 그게 제빵 기술이 발달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카스텔라로 대체되었다는 설이 있어요.”
“아!”
모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텔라 하나로 더욱 활기찬 새해 아침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나저나 다들 언제 올라가나요?”
나는 엄마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사장님은 언제 가시는데요?”
“저는 일요일 오후 비행기로 올라갑니다.”
“그럼 저희도 그때 가면 되겠네요.”
“응?”
“편도만 구하고 내려왔거든요.”
이덕오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표 알아보세요. 일출 보려고 제주에 많이 내려왔을 터라 비행기 구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안재영과 이덕오가 비행기 표를 구하러 컴퓨터가 있는 안방에 들어간 사이.
엄마가 갑자기 홍지혜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홍 기자는 남자 친구 있어요? 어쩜 손이 이리 고울까?”
홍지혜는 당황하였지만 차마 손을 뿌리치지는 못하고 우물쭈물 답했다.
“아…… 저, 저는 없어요. 어머니.”
“아이고! 이런. 이렇게 예쁜데 왜 남자 친구가 없을까? 우리 세진이는 어때요?”
“네?!”
“엄마!”
나와 홍지혜가 동시에 소리쳤다.
“아니, 둘 다 총각 처녀잖아? 회사도 같고. 전혀 마음 없어?”
“엄마, 실례야 실례. 제발 자중해 주세요.”
“어머! 그런가? 미안해요, 홍 기자. 내가 홍 기자가 너무 예쁘니까 그만 오버를 했네.”
“아니에요. 어머니.”
“아이참 내 정신 좀 봐! 나는 이만 비자림에 산책 다녀올 테니까. 재밌게들 놀고 있어요. 세진아. 엄마 나갈 테니까, 너희도 나가려거든 엄마한테 문자 하고.”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밖에 추워요.”
엄마는 그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흔히 입는 컬러풀한 등산복을 입고는 후다닥 집을 나섰다.
엄마가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홍지혜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홍 부장님. 저희 어머니가 실수하셨네요.”
“아뇨. 실수는 뭘요. 그런데 사장님은 왜 여친…….”
그때였다.
홍지혜가 말을 하려던 도중에 이덕오와 안재영이 방에서 나오며 크게 소리쳤다.
“행님! 표 구했습니다!! 진짜로 표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 겨우 구했습니다!”
“거봐. 구하기 쉽지 않다니까. 다행히 표가 3개 다 있었어?”
“네. 2개는 같은 비행긴데, 1개는 1시간 더 늦네요.”
“구했으면 됐지. 그나저나 여러분 혹시 괜찮으면 조직 개편 관련해서 같이 이야기 좀 나눠 볼래요?”
“조직 개편?”
안재영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와 나와 홍지혜 사이에 털썩 앉았다.
“응. 새해가 되었으니까 새로 사람도 뽑고 부서도 개편하려고. 그동안 여러분들 수고가 너무 많았고.”
“크으……. 형님. 진짜 저 혼자서 개발한다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그래. 다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사람 좀 많이 뽑을 거야.”
“얼마나 더 뽑으실 거예요?”
“한 서른 명 정도?”
“헉! 서른 명이면 지금 있는 인원보다 더 많은데요?”
“응. 그 정도는 뽑아야 올 한 해도 가열 차게 달리지.”
“가…… 가열 차게는 안 하면 안 될까?”
안재영이 울상을 지으며 웃었다.
“그래? 나 이번에 새로 부서 신설해서 너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그럼 넌 그대로 소셜부에 있든가.”
“앗. 그것참 고민스러운 제안이로군. 홍 부장님도 좋지만, 신설 부서의 부장이라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푸훗. 재영 씨 장난치지 마요. 당연히 부장하셔야죠.”
“아닙니다. 홍 부장님. 저는 계속 홍 부장님 밑에서 부장님을 모시며 일하고 싶은데…….”
“알았다. 그럼 재영이는 계속 소셜부에 있고.”
“하지만 생각해 보니 역시 다른 부서의 부장으로서 홍 부장님을 돕는 게 더 의미가 있다 싶다, 세진아.”
재영은 내 손을 잡더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오랜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이 부서를 개편했다.
“우선 기존 부서에 각각 세 명씩 신규 인원을 배치할 겁니다.”
“오. 그럼 소셜부 7명, 국제부 6명, 영상부 9명, IP 개발부에 5명, 개발부에 4명인가요?”
“응. 그리고 재영을 부장으로 해서 새로 취재부를 추가해서 5명 정원으로 둘 거야.”
“이야, 재영 형님 순식간에 막내에서 밑에 4명이나 새로 생기네요.”
“후후후. 다 이 몸의 능력 때문 아니겠나.”
이덕오와 안재영이 장난을 치며 웃었다.
“그런데 취재부를 따로 두는 거면 기존에 소셜부나 다른 부서에서 맡은 취재 역할은 이제 취재부에서만 하는 건가요?”
홍지혜가 살짝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아뇨. 다만 취재부는 취재를 전문으로 할 거고, 소셜부는 본연의 역할인 SNS 유통에 집중할 겁니다. 하지만 취재해야 할 내용이 많거나 할 때는 언제든지 기존처럼 부서 상관없이 취재에 나설 거고요.”
“이해했습니다. 각자의 전문성을 살리자는 말씀이시죠?”
“맞아요.”
“그런데 형님, 그래도 11명이 남는데, 이들은 어디 부서예요?”
“이수빈 부장이 IP 개발부랑 디자인 역할을 함께 하는 게 버거울 것 같아서 새로 디자인부를 만들 생각이야. 5명 정원으로.”
“아……. 맞아, 이 부장이 일이 많아 보였어요.”
“그리고 백 사장님이랑 나랑 각각 비서 한 명씩 붙이려고.”
“비서요?”
홍지혜의 눈망울이 부엉이처럼 커졌다.
“네. 일해 보니까 저희한테 직접 걸려 오는 전화도 너무 많고, 스케줄 조정도 어려워서 백 사장님과 여러 번 상의한 결과예요. 왜요?”
“아, 아니에요. 비서라니 오프라인도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싶어서요.”
“하하. 그렇죠. 3명이서 시작한 회사가 반년 만에 비서를 뽑을 정도로 컸으니까요.”
“그럼 나머지 4명은 뭐예요?”
“김지인 씨 밑에 경리 하나 더 두고, 변호사 1명, 회계사 1명, 노무사 1명 이렇게 채용하려고.”
“네? 변호사랑 회계사, 노무사를요?”
“응. 이제 회사도 제법 규모가 커질 테니까, 법적인 문제나 회계 문제가 제법 까다로워질 수도 있어. 직원들도 많아진 만큼 노무사도 필요할 테고.”
“이야……. 이제 스타트업 느낌이 아닌데요. 사(士) 자 들어가는 분들이 합류하게 되다니.”
“그만큼 다들 열심히 해 줘야지.”
“눼이눼이,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장님~”
이덕오는 나를 놀리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었다.
“녀석, 장난치기는. 그리고 채용 공지문 말인데, 뭐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 작년에 내가 썼던 것처럼 뭔가 획기적이면서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거라면 나한테 맡겨 줘!”
안재영이 자신 있다는 듯 손을 번쩍 올렸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어?”
“있지. 우선 제목부터 쌈빡해!”
“뭔데?”
“제목은…….”
<세계 최고 언론사(feat. 예정) 오프라인에서 지상 최강 영장류를 구함.>
안재영은 내가 작년에 냈던 채용 공고문에서 한발 더 나아간 저세상 채용 공고를 냈다.
심지어 제출 서류 중 자기소개 항목은 잘 보지 않으니 대충 쓰라며 7줄 이상 쓰면 탈락이라는 문구까지 포함시켰다.
“그래도 자소서 7줄 탈락은 심한데요?”
이덕오가 공고문을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