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00)

그녀는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내내 정말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다는 둥 흥미진진했다는 둥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

“당연하지! 너희가 왜 SNS에서 언론의 미래를 보고 있는지 좀 알겠더라.”

“SNS에만 미래를 거는 건 아니고, 그중 하나긴 하지.”

그녀와 대화를 하며 근처 식당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앞에서 익숙한 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응? 우 사장님이 여긴 왜?”

바로 홍지혜였다.

신촌 한복판.

두 명의 여성이 나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사장님, 제주도 내려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여긴 왜…….”

“아 그게…….”

내가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주소월이 홍지혜를 바라보며 시니컬하게 질문을 던졌다.

“2주간 휴가라고 하더니. 혹시 세진이 스토커는 아니죠?”

“뭐라고욧?!”

홍지혜가 주소월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아니 그렇잖아요. 휴가 첫날. 넓디넓은 서울 땅에서 저희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찾았을까요.”

“하? 어이가 없네, 진짜. 저 이 동네 살거든요!”

“그래요? 어쩜 그렇게 영화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춰 볼 수 있는지 저는 그게 더 신기하네요.”

홍지혜의 얼굴이 황당을 넘어 분노로 바뀌는 순간.

“그만해. 지혜 씨 집이 신촌이니까 길 가다가 만날 수도 있는 거지. 빨리 사과해라.”

내가 홍지혜 편을 들자 주소월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뭐야, 너까지!”

“잘못은 네가 먼저 했잖아. 스토커라니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주소월은 햄스터처럼 두 볼을 크게 부풀리더니 흥하는 소리와 함께 홍지혜를 지나 앞으로 혼자 걸어 나갔다.

“야! 사과는 하고 가야지!”

그녀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일부러 과장된 걸음걸이를 하며 점점 멀어졌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홍지혜에게 대신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홍 부장님. 저 친구가 원래 저런 아이는 아닌데.”

“아뇨. 사장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홍지혜는 웃는 건지 아니면 화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보이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제주도에 내려간다던 사람이 신촌에 있어서 깜짝 놀랐네요.”

“아 그게. 저번에 국한 일보 1면에 기사 나온 거 있잖아요?”

“추석에 물 폭탄 중계한 거로 1면에 나왔던 거요?”

“맞아요. 그때 감사의 의미로 밥 한 끼 사기로 했거든요.”

“아. 그게 오늘이었군요? 그런데 두 분 원래 아는 사이셨어요?”

“맞아요. 어이쿠, 벌써 시야에서 사라졌네. 홍 부장님 저 먼저 가 볼게요! 휴가 잘 보내세요!”

나는 홍지혜에게 인사를 건네고 주소월이 사라진 곳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뒤에서 홍지혜가 큰 소리로 소리치는 게 들렸다.

“네! 사장님도요! 휴가 잘 보내시고, 한 기자한테도 안부 전해 주세요~”

내가 손을 흔들며 알았다고 뒤를 돌아본 순간.

지나가는 이들이 그녀가 홍지혜라는 걸 알아보고 조금씩 그녀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 * *

“아들, 총 맞은 곳은 좀 괜찮아?”

“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 천지신명님이 도우셨다. 제발 몸조심 좀 하렴. 엄마가 걱정돼서 어디 살겠니!”

“네네. 걱정 마세요.”

“말은 잘한다! 말은!”

“하하. 그나저나 요거 엄청 맛있네요! 무슨 회예요?”

나는 화제를 돌리려고 식탁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횟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니. 실제로 식감이 무척이나 쫄깃하면서도 단단한 것이 무슨 생선인지 궁금했다.

“세진이 니 온다고 내가 특별히 사 왔다 아니가.”

“와. 무슨 생선인데 이렇게 식감이 특이해요? 광어나 우럭하고는 너무 다른데요?”

“글체? 이기 쥐치 아니가.”

“쥐치요? 쥐포 할 때 그 쥐치?”

“맞다. 여서는 객주리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쥐포 만들 때 쓰는 그 쥐치 맞다.”

“이야. 쥐치를 회로도 먹는지는 몰랐네요. 쫄깃쫄깃하고 탄탄한 게 진짜 별미네요.”

“하모! 요즘에는 잘 잡히지도 않아서, 내가 특별히 아는 횟집 사장한테 사정사정 부탁해서 갖고 왔다 아니가.”

한 씨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회 몇 점을 집어 내 앞에 놓인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호탕한 웃음만큼이나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끝나고.

내 방으로 들어온 나는 방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아 깊숙이 몸을 기댔다.

‘너무 먹었나. 배가 터질 것 같네.’

천정을 향해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쉬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주소월이었다.

<제주도는 잘 도착했어?>

<그래. 새벽에 첫 비행기 타고 왔다.>

<그렇군. 덕분에 어제 영화 잘 보고, 점심도 잘 먹었어.>

<그랬다면 다행이고.>

<다음엔 내가 쏠 테니까, 휴가 끝나기 전에 스케줄 빼 놔.>

<미안. 당분간 정신없을 것 같아서. 시간 나면 연락할게.>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꼭 연락 줘.>

스마트폰을 침대에 던지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휴.”

홍지혜에게 사과하라는 내 말에 주소월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사람들 많은 식당에서 언성이 커지길래 설득하는 걸 포기했지만 좀 이상했다.

‘원래 그런 애는 아닌데. 희한하게 홍 부장에게 적대적이네.’

주소월의 제안을 거절한 건 그녀가 홍지혜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남은 휴가 내내 정신없이 일해야 하니까.’

나는 책상 위에 있던 노트북을 열고는 블로그에 있는 내용을 자세히 살폈다.

<콘크리트 배합 비율은 시멘트와 모래, 자갈의 비율은 1:2:4로 하는 것이 가장 품질이 좋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에 사용되는 콘크리트의 강도는 210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들, 아들? 자니? 저녁 먹어!”

나는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몇 번이나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집중해서 블로그에 적힌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 * *

점심을 거하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은 점심보다 더 많은 반찬들로 가득했다.

“엄마, 나 배부르다니깐?”

“엄마가 우리 아들 배불리 먹이겠다는데! 좀 조용히 하고 다 먹어 주면 안 되겠니?”

“에혀. 알겠어요.”

나는 쓴웃음을 하고는 엄마가 차린 음식을 하나씩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좋은 식당을 많이 다녔지만, 여전히 엄마가 해 주는 음식보다 맛있는 요리는 없었다.

특히 엄마가 차린 해장국은.

“진짜, 엄마 해장국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가 않네.”

“그러니까 많이 먹고 가.”

국물은 부드러우면서도 깊었고, 선지는 어찌나 야들야들하고 탱탱한지 고기와는 다른 식감을 자랑했다.

“아참. 아저씨. 건축 허가 신청은 끝났다고 그러셨죠?”

“하모! 니 말대로 근린 생활 시설로 신고했고, 착공 신고 필증도 수령했데이.”

“잘하셨어요. 내일부터 저랑 빡세게 일해야 할 텐데 괜찮으시죠?”

“하하. 아무렴 내가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약하겠나. 나는 세진이 니가 걱정인데?”

“걱정 마세요. 저도 매일 헬스 하면서 몸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 엄마를 위해서 힘 좀 써 보자.”

두 남자의 의기투합에 엄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고, 이 철없는 양반들. 그냥 업체 불러서 하면 될 걸 왜 그리 생고생을 할까.”

“엄마. 제주도는 서울하고 달라서, 자재비도 비싸지만, 텃세도 심해요. 육지 것이라고 공사 도중에 인부가 도망가는 경우도 많고요.”

“맞다. 내 아는 친구도 제주도에 집 짓다가 몇 번 뒤통수 맞고 아주 10년은 더 늙었다 아카나?”

“뭣보다 우리 손으로 직접 식당을 지으면 얼마나 의미 있겠어요. 그렇죠, 아저씨?”

“두말하면 잔소리! 나도 죽기 전에 꼭 한번 직접 집을 지어 보고 싶었는데, 세진이 덕분에 아주 소원 한번 이뤄 보겠네!”

나와 한 씨 아저씨가 강하게 이야기하자 엄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셀프 집짓기.

육지에서 온 사람이 제주에서 집을 짓는 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씨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셀프 집짓기는 인생의 로망 중 하나였다.

‘자연인까지는 어렵겠지만, 내 손으로 직접 지은 집에서 살고 싶은 건 남자라면 꼭 하고 싶은 일이니까.’

그래서일까.

나는 회귀 전 취미 생활로 집 근처 목공 학원에서 목수 일을 배웠었다.

나무를 깎다 보면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지고, 무아지경에 다다른 것처럼 황홀감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거라도 안 배웠으면 회사 생활 못 버티고 도중에 나왔겠지.’

셀프 집짓기는 쉬운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집짓기보다 토지 매입 이후 용도 변경이나 여러 가지 건축 신고가 초보자 입장에서는 더 까다로운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이미 집을 살 때부터 가게를 지을 수 있는 근린 생활 시설이 가능한 곳으로 집을 샀고, 일련의 신고는 아저씨가 모두 끝마친 상태.

게다가 나름 목수 일도 배웠고, 기본적인 집짓기 과정은 머릿속에 훤히 들어 있었다.

‘셀프 집짓기가 한창 유행했기에, 관련 기사를 많이 써 봤지.’

관심 있는 주제의 기사였기에, 단순히 우라까이만 한 게 아니라 직접 손으로 메모를 하면서까지 써냈던 집짓기 기사들.

그래서인지 순서도 잘 기억났다.

* * *

“천천히요, 천천히.”

새벽부터 부리나케 일어나 땅을 다지고 터를 판 우리는 골재를 깐 다음 버림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버림 콘크리트는 말 그대로 메인이 아니라 버릴 용도의 콘크리트라는 뜻이다.

기초 콘크리트를 붓기 전에 그 위에 얇게 바르는 콘크리트로 이물질을 막아 주고 내구성을 향상하기 위해 시공된다.

레미콘에서 나온 콘크리트가 포크레인 삽에 가득 실리더니 이어서 터 파기한 곳에 부어졌다.

버림 콘크리트가 모두 타설되자 곧 비닐을 가져와 그 위에 깔았다.

“세진아, 요건 왜 하는 거고?”

“비닐을 안 깔면 바닥의 골재나 흙이 수분을 흡수해서, 콘크리트가 푸석푸석해지거든요. 그걸 막는 거예요.”

“그나? 참 니는 기자라는 사람이 별걸 다 안다.”

“기사 쓰다가 배웠어요.”

나는 포크레인 기사와 레미콘 기사에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건네고는 아저씨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씨 아저씨가 접힌 허리를 펴며 등을 두드렸다.

“아이고야, 그거 조금 했다고 허리가 다 아프네.”

“거봐요! 내일모레면 육순인데, 무리하지 말라니깐!”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도 역시 믿음직하시던데요? 저 혼자 했으면 절대 못 했을 거예요.”

“그체? 보시오! 세진이도 내가 잘한다 암캅니까.”

“네네. 아주 남정네 둘이 죽이 척척 맞아서 좋겠습니다.”

우리는 웃으며 엄마가 차려 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진아. 앞으로 일정이 어찌 된다코?”

“네. 내일 철근 배근 작업하고, 그 위에 콘크리트 붓고 양생 작업하는 데 삼 일 정도 걸릴 거예요. 그리고 골조 공사에 한 10일 정도 걸릴 텐데, 아마 그 전에 저는 서울 올라가겠죠.”

“그래? 세진이 니 가고 나면 마음 단디 먹어야겠네.”

“하하. 저 가고 나면 서울에서 잘하는 목수 한 분 보내 드릴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라면 우리가 직접 집을 지었다고 하기도 그카지 않나?”

“어차피 지붕이나 내장 공사는 저희 둘이 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전문가가 함께하면 좋죠.”

나는 회귀 전 다녔던 목공 학원의 원장에게 부탁해 집짓기를 도와달라 할 참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는 나를 모를 테지만, 유명한 목수이기 이전에 사람이 너무 좋았기에 잘만 부탁하면 분명 흔쾌히 수락해 줄 터이다.

점심을 먹은 뒤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낮잠에 빠진 아저씨를 뒤로한 채 집 밖에 나와 건설 현장을 바라보았다.

‘이걸 나랑 아저씨랑 둘이서 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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