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200)

뭔가 모를 뿌듯함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말없이 감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고급 세단이 이쪽을 향해 오더니 내 앞에서 정차했다.

끼익.

곧 운전석에서 선글라스를 낀 남성이 후다닥 내리더니 뒷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턱!”

차 안에서는 한눈에 봐도 무척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나오더니 절도있게 옷깃을 여몄다.

그를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혹시 오프라인 우세진 사장님 되십니까?”

나는 바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네. 제가 우세진입니다만?”

그러자 상대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오른손을 건넸다.

“아들이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네?”

“진양 그룹 회장 안태익입니다.”

“네?!”

.

# 5장 조건

안태익 진양 그룹 회장.

진양 그룹은 식품 회사인 진양 제과를 축으로, 영화 및 미디어 사업과 유통 및 건설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대한민국 재계 서열 50위의 대기업 집단이었다.

안재영과 대학 동문이기는 했지만, 그의 아버지인 안태익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반갑습니다. 회장님. 우세진입니다.”

“안 그래도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제주도에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으셨다고요?”

“네. 제주도 부동산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아들 녀석이 어찌나 제주도에 땅을 사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던지. 저도 요즘 제주도에 대해 알아보고 있답니다.”

“그러셨군요. 조만간 제주도 땅값이 폭등할 겁니다. 좋은 선택하신 겁니다. 회장님.”

“하하. 저도 밑에 직원들 시켜서 알아보았더니 실제로 장래가 아주 밝더군요. 수익성도 좋고요. 특히 중국 쪽에서 관심을 많이 보이던데?”

“맞습니다. 그러면 여긴 땅을 보러 오신 겁니까?”

“그런 것도 있습니다만…….”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기도 참 좋군요. 비자림이라.”

“네. 정말 좋은 곳이죠.”

“저는 리조트 사업을 해 볼까 합니다.”

“리조트 사업이요?”

“네. 서귀포에 있는 중문 단지 같은 곳을 새로 개발해 대규모 복합 리조트를 지으면 어떨까 싶군요.”

역시 대기업 총수답다.

스케일이 달랐다.

“그러시군요. 분명 잘되실 겁니다.”

“그래서 그런데. 혹시 잠시 차 한잔 마실 시간 있나요?”

“차요? 네. 가능합니다.”

나는 엄마에게 잠시 외출하고 온다고 말한 뒤 안태익의 차를 타고 인근 카페로 이동했다.

안태익의 수행 비서는 카페 주인에게 우리 둘 말고는 더 손님을 받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품 안에서 카드를 꺼내 긁었다.

‘카페 사장 표정을 보아하니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제시했나 보군.’

곧 주문한 차가 나왔다.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 반면 안태익은 뜨거운 녹차를 주문했다.

“아직 바람이 찬데 시원한 걸 좋아하시나 보군요.”

“네. 그런데 회장님이 주문한 차는 향이 참 좋군요.”

“그렇죠? 여기 제주 녹차로 만든 찹니다. 달콤한 꽃향기가 특징이죠.”

“그런데, 저희 집은 어떻게?”

“아. 실례했습니다. 아들 녀석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비자림 인근에 집이 있다고 그러더군요.”

설마하니 사람을 시켜 미행했나 싶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대기업 총수라고 하면 뭔가 법 위에 있을 것 같은 그런 이미지가 있으니까.’

나의 얼굴을 살핀 안태익이 무안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하하. 오해하셨다면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마침 제주도에 출장 와 있던 차에 우 사장님도 제주라고 들어서, 급한 마음에 연락도 없이 무작정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저도 조금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 텐데, 좀 급작스럽긴 했습니다.”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총에 맞은 거 이야기하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다행이군요. 정말 요즘 오프라인에서 만드는 뉴스는 감명 깊게 보고 있습니다. 기존에 방송사나 신문사들의 판에 박힌 기사와는 비교가 불가하더군요.”

“고맙습니다. 아드님이신 안재영 기자도 무척 열심히 잘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감사할 일이죠.”

“아닙니다. 어찌나 칠칠치 못한지. 아비로서 항상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안태익이 외아들인 안재영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들을 위해 회사 명의로 슈퍼 카를 리스시켜 줄 정도였으니.’

“그런데,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는 건?”

내가 본론을 꺼내자 그의 표정이 돌연 변했다.

친근한 친구 아빠에서 냉철한 비즈니스맨의 모습으로 변했달까.

“아까 제가 리조트 사업을 하고 싶다고 그랬었죠.”

“네.”

“우 사장님은 만약 대규모 리조트를 짓는다면 어디가 좋을 것 같습니까? 제주도에 대해서는 무척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대기업 총수인 그가 한가하게 그런 걸 묻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2019년에 개장한 제주 신화 월드!’

제주 신화 월드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복합 리조트 단지다.

2조가 넘는 중국 자본이 투입되어 개발된 곳으로 여의도 면적의 85%에 달하는 지역에 숙박 시설 및 테마 파크를 비롯하여 스파와 공연장 등 각종 부대 시설로 꾸며진 거대한 리조트.

제주 공항에서 차로 30분가량밖에 걸리지 않는 것은 물론 원시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곶자왈 인근에 위치해 관광지로 인기가 높았다.

나는 안태익의 얼굴을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략 어느 정도 예산을 생각하고 물어보시는 걸까요?”

“하하. 역시 언론사 사장님이라 질문도 직설적이군요.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 대외비이긴 합니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세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대략 3천억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3천억이라.

중국의 부동산 기업에서 투자한 2조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금액이다. 지금 시점에서 제주도 땅값이랑 제주 신화 월드가 개발될 당시의 땅값은 천지 차이일 테니.’

나는 잠시 생각을 하고는 말했다.

“회장님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 주신다면 아주 좋은 곳을 소개시켜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태익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가르쳐 주면 그냥 가르쳐 주는 것이지 조건 같은 걸 달 줄은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

그는 잠시 앞에 놓인 녹차를 후루룩 들이켜고는 창밖을 응시하였다.

3분여 정도의 정적이 흐르고.

그가 다시 내게 물었다.

“좋습니다.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시죠.”

“첫째. 단순 숙박 시설만 짓는 것이라면 안 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른 시설도 필요하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습니다. 숙박 시설뿐 아니라 테마 파크와 워터 파크, 그리고 공연장이나 스파, 백화점 등 다양한 부대시설이 함께 있으면 좋을 것 같군요.”

“흠. 좋습니다. 테마 파크와 워터 파크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저희도 단순히 숙박 시설만 지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요?”

“둘째. 전체 고용 인원의 80% 이상을 제주도민으로 채용하고, 개발 시 지역 건설 업체를 50% 이상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하면 이 사업을 승인받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안태익의 눈썹이 조금 치켜 올려지다가 서서히 내려왔다.

“마지막은?”

“셋째. 저희 오프라인 역시 이번 사업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오프라인이요?”

“네. 제주도 리조트 사업은 엄청난 성장세가 예상되고, 그걸 떠나 제주도에 연수원과 같은 부대시설이 있으면 사내 교육이나 복지 등에 있어서도 이점이 있겠죠.”

안태익은 한참 동안 말없이 고민하는 것 같더니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떴다.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바닥을 드러낼 무렵.

안태익이 자리로 돌아와서는 앉았다.

“좋습니다. 그래서 우 사장님이 추천해 줄 장소는 어디입니까?”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제주 신화 역사 공원입니다.”

“제주 국제 자유 도시 개발 센터가 추진하고 있는 핵심 프로젝트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정확합니다. 곶자왈, 산방산, 녹차 단지 등이 인근에 있고, 이미 제주도에서 개발하기로 마음먹은 곳이라 그 어떤 곳보다도 대규모 리조트를 만들기에는 유리한 지역입니다.”

“그런가요? 저희는 성산 일출봉 근처를 생각했습니다만.”

“그쪽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이미 근처인 섭지코지에 대규모 리조트가 위치해 있죠. 바다와 너무 가까워서 대규모 워터 파크나 테마 파크가 들어서기에는 위치도 그리 좋진 않고요.”

“하하하하.”

갑자기 내 이야기를 듣던 그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카페에는 우리 둘밖에 없어서 그런지 유독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뭐가 그리 우스우시죠?”

“하하. 아닙니다. 재영이 녀석과 동갑이라 그래서 마냥 어린 분으로만 생각했는데, 제가 크게 착각을 하고 있었군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물론 자세한 내용은 저희도 내부적으로 더 자세히 검토를 해 봐야겠습니다만 우 사장님이 주신 안이 저희 내부 TF에서 검토한 안보다 훨씬 좋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차도 다 마셨는데 일어날까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안태익은 기분이 좋은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신혼여행을 이곳 제주도로 왔어요. 당시에는 제주도가 신혼여행지로 인기였죠. 그때 처음 이곳에 와 보고서는 한눈에 반했죠.”

“그런가요? 저는 재벌가는 좀 다를 줄 알았습니다.”

“하하. 저희 아버님이 좀 유별난 구석이 있으셨죠. 재벌가든 뭐든 다른 이들과 너무 다르면 안 된다는.”

“그나저나 제 말만 듣고 투자를 결정하셨다기에는 금액이 적지 않은데요.”

“전부터 제주에 리조트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원체 제주의 아름다운 경관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러다.”

“그러다?”

“재영이 녀석이 집에만 들어오면 제주에 땅을 사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지 뭡니까. 그래서 우 사장님에게 개인적인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안태익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급 세단이 엄마 집에 도착하자 그는 다음에 또 연락하겠다며 명함을 한 장 건넸다.

명함에는 진양 그룹 회장 안태익이라는 글씨가 큼지막이 적혀 있었다.

나는 명함과 그가 탄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번갈아 쳐다보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동안 기초 공사와 골조 공사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엄마가 차려 주는 맛있는 식사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지쳐 나가떨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이고야. 나 죽네, 나 죽어.”

“잠깐 쉬었다 할까요?”

“그래, 그래. 죽겠다카이.”

1층 합판 공사를 시작한 지 이틀째.

설계도에 따라 합판을 설치하는 작업은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내가 진짜마. 다시는 집 짓는 게 소원이었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하하. 저 서울 올라가면 사람 더 붙여 드릴게요. 그래도 아저씨 때문에 이렇게 집도 짓고 하네요.”

“그런데 우진이 니는 언제 목수 일을 배웠노? 보통 솜씨가 아니던데?”

“그냥 취미 생활로 배워 봤어요.”

“와. 언론사도 키우고 목공도 배우고, 니 진짜 보통이 아니데이.”

“그나저나 아저씨.”

“응?”

“저희 엄마랑 결혼하시는 거 어떠세요?”

“뭐…… 뭐라꼬?”

“결혼하시라고요.”

한 씨 아저씨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중얼거렸다.

“내가 마 나이가 몇인데 이 나이에 결혼을 하겠노. 남사스러운 이야기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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