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00)

“아네요. 이미 엄마한테도 몇 번 말씀드렸어요. 두 분 이미 함께 사시고 계시잖아요? 아저씨가 엄마 옆에 있어 주면 아들인 저는 더 안심하고 엄마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아저씨의 두 볼이 새색시처럼 발그레한 것이 그가 진심으로 엄마를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이죠. 어서 하세요. 진짜로요.”

엄마와 아저씨의 결혼식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내가 농담으로 이번 휴가 기간 안에 결혼식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내자 엄마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세진이 니가 언제 올라간다 그랬지?”

“이번 주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에 올라갈라구요.”

“그래? 그럼 결혼식을 토요일로 잡아야겠구나.”

“네?! 토요일이면 삼일 뒨데요?”

“그래. 삼 일이면 충분하지. 안 그래요?”

엄마가 한 씨 아저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 씨 아저씨는 엄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아하하. 그런가?”

“나야 재혼이니까 친척들 또 부를 필요는 없고. 세진이 너는 부를 사람들 있니?”

“지금 다들 휴가 기간이라 부르기도 좀 그렇네요.”

“그렇지? 잘됐다. 그냥 여기 동네 분들 몇 명 초대하면 되겠네.”

“그런데 한 씨 아저씨는요? 삼 일 뒤에 친척들 부르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요.”

내 말에 엄마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뭔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 한 씨 아저씨를 쳐다보자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내가 고아원 출신이라 부를 사람도 많이 없데이.”

“아.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미안한 표정으로 급히 고개를 숙이자 그는 괜찮다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투박하고 거친 손.

그게 또 괜히 더 미안하고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제주의 밤하늘이 깊어 갔다.

“고맙습니다. 백 사장님. 이렇게 제주도까지 다 와 주시고요.”

“별말씀을. 우 사장님 어머님 결혼식인데 당연히 와 봐야죠.”

나는 백철웅의 두 손을 꼬옥 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보름간의 휴가 중 마지막 주말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불구하고 서울집에서 쉬고 있던 백철웅은 어머니 결혼식이 있다는 나의 문자에 한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그뿐이랴.

다른 직원들에게는 따로 알리지 않았는데, 그는 부장급 이상 인사들에게는 전화를 걸어 참석이 가능한 인원들을 데려왔다.

“휴간데 미안합니다. 박 부장님.”

“그런 소리 마세요. 우 사장님. 마침 지인이랑 제주도 부모님 집에 와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어머니 결혼 축하드립니다.”

박창후와 김지인이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의 옆에 선 이덕오가 수줍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오, 형님.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전에 공항에서 두 분에게 부모님이라고 그랬네요. 이제 진짜 부모님 되시는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요, 헤헤.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덕오야. 쉬는데 미안하네.”

“미안은 뭘요. 안 그래도 휴가가 너무 길어서 매일 게임만 하다가 심심하던 차에, 덕분에 제주도도 놀러 오고 좋네요.”

엄마와 한 씨 아저씨는 정말로 사흘 만에 결혼식을 강행했다.

장소는 집 근처 비자림.

친하게 지내는 동네 주민 몇 분과 지인 몇 분만 초대하여 야외에서 진행한 스몰 웨딩이었다.

겨울의 끝자락.

공기는 다소 차가웠지만 울창한 비자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은 포근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엄마가 붉은색 정장을 입은 젊은 여성의 손을 꼭 잡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붉은 정장의 주인공은 홍지혜였다.

“어쩜 이렇게 예쁜지. 빨간색이 참 잘 어울려요.”

“아니에요, 어머니. 한복 입은 모습이 정말 고우세요. 진심으로 결혼 축하드립니다.”

“휴가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 먼 곳까지 와 줘서 너무 고마워요. 우리 세진이 잘 좀 도와주세요.”

“아뇨. 제가 사장님께 늘 많이 배우고 있죠.”

두 여자는 한참 동안 수다를 떨며 주변을 화사하게 물들였다.

엄마와 한 씨 아저씨의 결혼식은 주례 없이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하객들 앞에서 직접 작성한 성혼 선언문을 읽으며 백년해로를 굳게 맹세하였다.

피로연은 인근의 한 식당에서 진행되었다.

동네 주민의 친척이 운영한다는 식당은 꿩으로 만든 만두를 넣은 만둣국이 별미인 곳이었다.

“꿩고기는 평생 처음 먹어 보네요. 요게 저희 국어 시간에 배운 장끼와 까투리 할 때 그거 맞죠?”

꿩 만두국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본 이덕오가 만두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맞아. 제주는 예부터 꿩이 많이 잡혔다고 하더군. 그래서 꿩을 이용한 메밀국수나 만두 등이 발달했고.”

메밀로 빚은 만두피의 고소함과 꿩고기의 감칠맛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최 부장과 이 부장은 휴가 중이라 이번에 못 와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네. 전화 받았습니다. 최 부장님은 동남아에 계시다고요?”

“맞습니다. 남편이랑 태국에 여행 갔다더군요. 이수빈 부장은 부모님 모시고 강원도 갔고요.”

“안재영 부장은 전화를 안 받아서 문자만 남겨 뒀습니다.”

“하하. 안 그래도 아까 식 중에 이런 영상 편지를 받았습니다.”

“영상 편지요?”

백철웅을 비롯하여 직원들이 영상 편지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안재영이 보낸 영상을 보여 주었다.

영상에는 검게 탄 안재영이 노을 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헤이 브로! 갑자기 어머니 결혼식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 보다시피 내가 지금 하와이거든. 그래서 안타깝지만, 제주도엔 갈 수가 없네. 미안하고, 어머니 결혼식 진심으로 축하한다! 한국 가서 보자. 건강하고!”

영상을 본 박창후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안 부장은 전에 오프라인 오기 직전에도 하와이에 다녀왔다더니. 서핑을 정말 좋아하나 보네요.”

“서핑이라니, 정말 멋지네요! 오빠는 제주도 태생인데 이런 거 할 줄 몰라요?”

“응? 내…… 내가 서핑은 모르지만, 그래! 수영은 잘하지!”

“맞아. 작년에 제주도 왔을 때 박 부장님 개헤엄 잘하시던데요?”

“아놔. 이 이사님. 말이 좀 심하시네요. 개헤엄이 뭡니까? 평영입니다, 평영!”

식사를 마치고 차를 대접하러 하객들을 집으로 모셨다.

한데.

‘저것들은 대체 뭐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축하 화환들이 집 앞에 가득 놓여 있었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진양 그룹 회장 안태익?!”

내가 화환에 적힌 글귀를 보며 놀래는 사이 옆에서 검정 양복을 입은 남성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우세진 사장님.”

“엇? 당신은 저번에 안태익 회장님 옆에 있던 수행 비서?”

“맞습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회장님 지시로 화환을 보내 드립니다. 원래는 결혼식장에 보내려 했습니다만, 이미 결혼식이 끝났다고 그래서 집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정말 송구합니다.”

“그나저나 도대체 화환이 몇 개예요?”

“총 8개입니다. 회장님도 직접 오고 싶어 하셨지만,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면 부담 느끼실까 봐 화환만 보내셨습니다.”

이미 화환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이었다.

한 곳에서만 8개의 화환을 보내는 경우는 뭐란 말인가.

‘안재영이 어지간히 아빠를 닦달했나 보군.’

정작 당사자인 엄마와 한 씨 아저씨, 아니 아버지는 내일까지 서귀포의 한 호텔에서 투숙할 예정이라 꽃들이 가장 화사한 이 순간의 화환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 * *

결혼식 다음 날.

박창후와 김지인 커플 그리고 홍지혜는 일이 있다고 전날 먼저 떠났고, 백철웅과 이덕오는 엄마 집에서 나와 함께 잠을 잤다.

우리는 오전 표를 구해 함께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제 늦게까지 마셔서 걱정했는데, 이상하게 제주도에서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숙취가 없네.’

제주도의 공기가 맑기 때문일까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옆에 앉은 백철웅이 말을 걸었다.

“어머니 집 옆에 공터를 보니 공사 중이던데, 새로 증축하는 겁니까?”

“아. 그거요? 어머니가 해장국을 잘하시거든요. 자그마한 해장국 가게를 해 드릴까 싶어서 아버지와 둘이 만들었습니다.”

“네? 둘이 만들었다고요?”

앞 좌석에 붙어 있는 모니터의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던 이덕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응. 나머지 공사는 전문가를 찾아서 할 테지만, 이전까지는 나랑 아버지랑 둘이서 만들었어.”

“진짜요? 장난 아니네. 형님 우리 나중에 새로 건물 올리면 형님이 직접 만드시는 건 아니죠?”

“하하. 그건 불가능하지. 작은 식당도 아니고.”

한동안 둘에게 셀프 집짓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스튜어디스가 제주 감귤로 만든 주스를 건넸다.

시원하게 한 입 털어 넣으니 입안에서 상큼함이 느껴진다.

“공사한다고 바빴으면 뉴스는 못 봤겠네요?”

감귤 주스를 마시고 컵을 아래로 내려놓으며 백철웅이 물었다.

“자세히는 못 봤지만 그래도 9시 뉴스는 챙겨 봤습니다.”

“그래요? 그럼 현재 일련의 저축 은행 사태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다.

모를 수가 있나.

2011년 2월.

한국 자본 시장을 뿌리부터 뒤흔든 저축 은행 사태가 터졌다.

부산 저축 은행에서 시작한 대량 인출 사태(뱅크 런)가 연이어 다른 저축 은행에 확산되면서 자본 시장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민들이 애써 모은 소중한 예금을 부실 대출에 쓰거나 대주주 비자금 조성에 쓰는 등 허술한 곳간 관리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금융 비리 사건으로 기억되지.’

단지 기사에 나오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회귀 전 나 역시 인천에 위치한 모 저축 은행에 돈을 맡기고 있었는데 사건이 터지면서 반차를 내고는 부리나케 돈을 찾은 기억이 생생했다.

‘내가 저축한 금액은 원금이 보장되는 5,000만 원 이하 소액이었지만, 예금자들에게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내 돈 못 받을까 봐 당장 눈이 뒤집히는데.’

예전 생각에 한동안 답이 없자 백철웅이 옆에서 채근했다.

“이건 뭐 좋은 아이디어는 없습니까? 취재부도 생겼으니 뭔가 다른 모습을 보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이미 일어난 사태라서 현장 취재해 봐야 다른 곳이랑 크게 다를 건 없을 겁니다. 저희는 이번에도 한 발짝 떨어져서 깊이 있는 보도와 원인 분석,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 등에 대해 자세한 기사를 쓰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럴까요? 하긴 디테일한 내용은 예금 보험 공사와 금융 감독원 등의 정밀 감사 뒤에나 나오겠군요.”

백철웅과 저축 은행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덕오가 화장실에 간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주변을 살피고는 백철웅에게 조용히 말했다.

“백 사장님. 혹시 진양 그룹 아십니까?”

“진양 그룹이요? 알다마다요. 유명한 식품 대기업이고, 안 부장의 집안이지 않습니까? 그건 왜요?”

“네. 진양 그룹에서 이번에 제주도에 리조트 사업을 크게 하려고 한답니다.”

“그래요?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요.”

“괜찮다면 저희도 그 사업에 조금 투자를 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투자요?”

“네. 제가 살펴봤더니 수익성도 괜찮을 것 같고, 나중에 직원들 복지나 연수 기관 등으로 사용해도 좋을 것 같고요.”

“흠. 리조트 사업은 생각도 못 해 본 일이네요.”

“백 사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뉴스만으로는 수익을 올리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확장하면 리스크 대응에 보다 수월할 겁니다.”

“그럼 투자 금액은 얼마 정도를 생각하십니까?”

“100억 정도면 적정할 것 같습니다.”

“네? 100억이요?!”

백철웅이 머리가 아픈 듯, 한 손을 올리더니 자신의 이마를 주물렀다.

‘지금 우리 수익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금액처럼 느껴지겠지.’

100억이면 원화성이 오프라인 설립 초기에 투자한 금액과 같았다.

백철웅이 살며시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대출을 받겠다는 말입니까?”

“이참에 원화성으로부터 추가 투자를 받으면 좋겠죠.”

“시리즈 B 투자요?”

“네. 인원도 많이 늘었고, 신규 사무실과 장비 등 비용 나갈 곳도 늘었습니다. 더 받아야죠.”

“원화성이 또 해 줄까요?”

“만나서 설득해야죠. 아마 해 줄 겁니다.”

한참 신규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화장실에 다녀온 이덕오가 실없이 웃고는 배를 슬슬 문지르며 말했다.

“어휴. 어제 우 사장님 집에서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어찌나 나오던지 비행기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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