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200)

* * *

보름간의 휴가를 즐긴 직원들의 표정에선 한결 여유로움과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 무슨 일이 터지더라도 당장 대응할 수 있다는 듯이.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해 서로 그리웠던지 직원들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화제의 중심은 휴가 기간에 있었던 일뿐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내게 몰려오더니 비슷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 사장님. 위층 사무실은 언제 오픈해요?”

“오늘 보여 주시면 안 돼요? 너무 궁금해요!”

“아직 인테리어 공사 다 안 끝난 거예요? 소장님은 보름이면 끝난다고 했는데.”

원래는 점심 먹고 오후에 오픈할 예정이었으나 많은 직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백철웅과 상의하여 결국 오전 11시.

위층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와! 여기 너무 좋은데? 저 여기서 일할래요!”

“오. 깔끔한데요? 가로수길 카페에 온 거 같아.”

“아래랑 인테리어가 너무 달라서 다른 회사 같아요!”

“응? 그런데 저기 저분은 누구세요?”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한 남자를 향했다.

깨끗하게 다려진 흰색 셔츠 아래로 햇빛을 받은 검정 바지가 반짝였다.

그 앞으로 하늘색 줄무늬 패턴이 들어간 갈색 앞치마에선 왠지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우수에 젖은 듯 웨이브 진 앞머리에 야생마의 꼬리처럼 질끈 매어진 꽁지머리가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렸다.

등 뒤에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마치 성인(聖人)처럼 서 있던 남성이 이쪽을 발견하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었다.

“헬로우! 오프라인 여러분. 신규 사무실 오픈을 축하드립니다. 바리스타 김희철이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우당탕탕.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카페로 향한 이들은 동그랗게 그를 둘러싸고는 주변을 살폈다.

노출 콘크리트로 된 천장과 목재 그리고 낡은 벽돌로 꾸며진 인테리어는 빈티지한 느낌이 가득했다.

인테리어뿐만이 아니었다.

아메리카노가 단돈 1,000원.

게다가 최상급 원두와 기계를 사용한 것은 물론 바리스타인 김희철이 커피를 내리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주기 충분했다.

‘아니 저 형, 저렇게 커피를 내렸나?’

나는 김희철이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절도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커피 장인의 그것과 같았다.

“와! 사무실에 카페라니, 생각도 못 했어! 이런 건 IT 대기업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커피 너무 맛있지 않아? 바리스타 아저씨도 멋지고. 나 완전 여기 팬 될 듯!”

“희철 샘! 저 카페라테 한 잔 더 주세요~”

직원들은 어느새 김희철에게 희철 샘이라고 부르며 친근함을 표했다.

새삼 김희철의 친화력에 감탄한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무실 한쪽에 설치된 카페는 오픈 첫날부터 직원들의 마음을 빼앗기 충분했다.

1시간 내내 직원들에게서 커피를 주문받고 질문 공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김희철의 표정에는 행복감이 가득했다.

‘저렇게 좋을까.’

점심시간이 되고 직원들이 빠져나가자 편의점에서 산 삼각 김밥과 바나나 우유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정신없죠? 직원들이 형이랑 이 카페 공간이 너무 신기했나 봐요.”

“어휴. 오프라인 직원들 열기가 장난 아니네. 이렇게 많은 커피 주문은 난생처음이야.”

“그런데, 형. 언제 수염 깎았어요? 형 트레이드마크잖아요? 복슬복슬.”

“그래도, 오늘 첫인산데, 면도는 하고 와야 할 거 같아서 말이지.”

“뭐야, 수염 깎고 머리 그렇게 묶으니까 완전 원빈이 따로 없는데요?”

“내가 좀 한 인물 하지~”

“그러게요.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잘 부탁드리지. 직원들이 좋아해 줘서 나도 좋네.”

김희철이 웃으며 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받아. 우 사장이 좋아하는 커피.”

“고맙습니다. 적혈마가 아니라 여기서 받으니까 느낌이 새롭네요. 그나저나 여기 이름은 정했어요?”

“응. 너희 회사 이름의 일부야.”

“응? 뭔데요?”

“오프(off)로 하려고.”

“오프? 왜요?”

“퇴근하거나 자리에 없으면 오프라고 그러잖아? 적어도 여기에 오면 오프한 것처럼 마음 편해지라고.”

“하하. 적혈마보다는 훨씬 좋네요.”

그가 건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입안에 넣고 삼켰다.

케냐 AA 원두의 선명하고 쌉쌀한 맛이 혀끝을 감돌며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인테리어는 만족해요?”

“완전. 적혈마가 부끄럽다, 아주.”

“여기 최루리 부장님이라고 있는데, 그분 지인 중에 인테리어 잘하시는 분이 있더라고요. 싼값에 아주 멋지게 되었네요.”

“그러게. 카페뿐 아니라 사무실 전체가 아주 예술 공간인걸?”

“그렇죠? 한남동에는 굿즈 매장도 하나 냈는데, 거기도 그분이 작업해 주셨어요.”

“굿즈 매장? 오프라인은 아주 별걸 다 하는구나.”

김희철이 나를 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며칠은 좀 정신없을 거예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없다가 처음 생기면 호기심 때문에 더 오고.”

“적응해야지 뭐. 아무튼 고맙다. 열심히 할게.”

남은 커피를 들고 집무실로 내려온 나는 다른 언론사에서 낸 저축 은행 기사를 살폈다.

대부분의 기사가 현장의 혼란함을 전하는 데 급급했다.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줄을 선 저축 은행 앞.

한 푼 한 푼 소중히 모은 돈을 행여나 잃을까 봐 근심 가득한 이들의 표정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제일 중요한 건 고객인데. 고객을 얼마나 봉으로 봤으면 저런 모습을 보일까.’

나는 안재영 부장에게 재차 메신저로 저축 은행 관련하여 분석 기사를 잘 부탁한다고 메시지를 넣었다.

<아이 사장님도 좀! 걱정 말고 저만 믿어 보세요. 아주 작정하고 만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대답이 무척 듬직했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한쪽에 속이 꽉 찬 명함집이 보였다.

그 가장 아래에서 한 장의 명함을 꺼낸 나는 명함에 쓰인 이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엔젤 머니 회장 원화성>

* * *

넓디넓은 정원에 잘 손질된 나무와 잔디가 푸르렀다.

잔디 뒤로 이어진 돌다리 아래에는 맑은 물을 따라 황금색 잉어들이 유유히 움직였다.

땡땡땡…… 땡.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에서 은은한 풍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풍경 뒤로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는 사이.

“하하. 거 안 들어오고 뭐 하십니까?”

작지만 단단한 풍채의 주인공이 날카로운 눈매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직접 집으로 불러 주시고, 영광입니다.”

“아뇨. 요즘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분 아니십니까? 저희 집에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IT 거부’ 원화성.

포털인 넥스트를 창업하고 현재는 벤처 캐피털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대한민국 IT 혁명의 대표적인 선구자이자 리더였다.

개량 한복을 입고 있어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이제 겨우 마흔 하나에 불과했다.

“바람이 찹니다. 어여 들어오세요.”

그의 말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정원과는 또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갈한 가구에 고풍스러운 소품들이 집주인의 까다로운 안목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집이 멋집니다.”

“뭘요. 소소합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십니까? 직접 연락을 다 하시고.”

“회장님이 투자해 주신 덕분에 이후 오프라인은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모두 회장님 덕입니다.”

“하하. 제가 뭘 했다고요. 그저 좋은 분들과 좋은 아이템이 있으니 투자했을 뿐.”

“아닙니다. 회장님의 투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키우는 건 어려웠을 겁니다.”

“호오. 제가 투자를 안 했어도 결국 이렇게 키울 순 있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군요.”

“맞습니다. 다만 그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겠죠.”

“하하. 제가 우 사장, 그 배짱에 베팅한 거 아닙니까. 역시 멋진 분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그와 이야기하는 사이.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더니 따뜻한 차를 내왔다.

원화성과 마찬가지로 개량 한복을 입은 여인은 그 자태가 무척이나 고왔다.

“한겨울, 이 정원에서 직접 딴 모과로 만든 찹니다.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나의 물음에 원화성이 여인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제 부인입니다. 이름은 정해지. 이쪽은 요즘 유명한 오프라인의 우세진 사장님. 서로 인사들 하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우세진입니다.”

“정해집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녀가 그릇을 가지고 나가자 원화성이 부드럽게 차를 들이켰다.

“부인분이 무척 미인이십니다.”

“하하. 제 복이죠. 원래 배우를 하던 친군데, 저랑 결혼한 뒤에는 다 접고 집에만 있어요. 항상 미안합니다.”

“배우였다고요? 그랬군요. 어쩐지. 제가 드라마를 잘 안 봐서 미처 몰랐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드세요. 모과차가 아주 맛있습니다.”

정해지가 가져온 모과차가 바닥을 드러낼 무렵.

원화성이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저를 찾아온 이유를 한번 말해 보시죠. 그냥 안부차 오신 건 아닐 테고.”

그의 물음에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답했다.

“최근에 굿즈 사업에 나섰습니다. 한남동에는 매장도 하나 냈고요.”

“굿즈 사업이요?”

“네. 캐릭터를 만들어서 메신저용 이모티콘도 만들었고, 인형도 만들고 컵이나 필기구도 만들어서 팔고 있습니다.”

“그거 의외군요. 굿즈 사업을 하는 언론사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수익 다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사무실도 추가로 한층 더 임대하였고, 최신 설비나 장비들도 들였고요.”

“그만큼 사업이 잘되고 있다는 방증이겠죠. 흐뭇하네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시리즈 B 투자가 가능하겠습니까?”

“시리즈 B 투자 말씀이군요.”

원화성은 마치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왼손에 찬 염주를 돌렸다.

수익이 보장된 제주 리조트 사업에 투자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이곳저곳 들어갈 돈이 많았다.

인력이 크게 늘었고, 임대료,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비용 등 나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수익이 느는 만큼 커진 비용.

“시리즈 B 투자라. 하긴 지금 정도면 할 만한 시기죠.”

“그렇습니다. 이미 수익이 흑자로 전환된 지 오래고, 인지도에서도 국내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인정합니다. 그걸 겨우 1년도 안 돼서 해내다니. 오프라인은 제가 투자한 사업 중에 가장 독보적인 곳입니다. 사업 설명회 갈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죠. 제가 투자한 곳이라고요. 하하.”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래서 얼마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200억? 300억?”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500억 정도면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어렵겠습니까?”

“시리즈 A가 100억이었으니 500억을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네.”

“그래도 그 정도 규모는 제가 단독으로 투자하는 건 좀 부담스럽군요. 다른 투자자들과 연합으로 신디케이트를 형성하는 거면 모를까.”

“저는 가급적이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이들이 느는 것보다는 회장님 단독 투자였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이봐요. 엔젤 머니도 제 개인 조직이 아니에요. 같이 하는 거지.”

“그래도 회장님 입김이 가장 세지 않습니까.”

“500억이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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