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200)

그의 얼굴에는 이번 창단 승인에 대한 기대감과 기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소년 야구 만화를 보며 꿈을 키웠습니다. 비록 야구 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제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야구에 대한 꿈이 가득합니다.”

실제로 그는 열혈 야구팬으로서 자주 경기장을 방문하여 경기를 관전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저는 한 사람의 야구팬으로서 야구 자체가 목적인 야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야구에 미쳐 있는 구단, 야구를 통해 사회적 약자에게 희망을 주고,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며,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런 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컨벤션 센터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단순히 수익과 홍보 효과만 보고 창단에 나선 것이 아닌, 구단주의 야구에 대한 진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모 스포츠 기자가 한참 온라인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제9단의 상징물로 일부 단체가 ‘아귀’의 경상도 사투리인 ‘아구’를 제안하였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 재미있는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아구는 창원에서 잡히는 고기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확정된 것은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리 선호하는 이름은 아닙니다.”

그밖에 여러 질문이 오갔으나 정선호 대표는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손에 힘을 주어 강하게 이야기하며 야구와 야구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였다.

오랜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고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상으로 이번 제9 구단 창단 승인 기자 회견을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기자분들은 저희가 마련한 인근 식당에서 식사하고 가시면 되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저나 여기 홍보 팀원들에게 문의해 주십시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수선한 가운데.

“약속은 확실히 잡았죠?”

“물론이죠. 그쪽에서도 깜짝 놀라며 좋아하던데요?”

“다른 기자들이 알게 되면 논란이 될 수도 있으니 안 부장이랑 이 기자는 여기서 다른 분들하고 함께 식사하고 저만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미 그렇게 전달해 두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빠져나와 차를 몰고 창원시 외곽에 위치한 한 오리고깃집을 방문하였다.

문을 열고 주변을 살피니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일행 있심까?”

“네. 아직 도착하지 않으신 것 같군요.”

“예약은예?”

“그게, DC 소프트…….”

DC 소프트라는 말을 꺼내자 식당 주인이 깜짝 놀라며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안내했다.

“어이쿠야. 말을 하지 그랬심까. 이쪽으로 오이소.”

그녀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서자 이미 주문이 끝났는지 오리고기와 쌈 등의 요리가 테이블 가득 세팅되어 있었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주차장 쪽으로 검은색 밴이 한 대 들어왔다.

차에서 내리는 아담한 인물.

조금 전까지 기자 회견장에 있었던 DC 소프트 정선호 대표였다.

옷매무새를 다듬는 사이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기자들에게 잠시 인사를 하고 온다고 조금 늦었습니다. 정선호입니다.”

“아닙니다. 대표님. 갑작스레 부탁을 드렸는데 이리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프라인 우세진입니다.”

“오리고기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창원 시내에서 식당을 잡으려니 괜히 주변 눈치가 보여서요.”

“정말 좋아합니다. 앉으실까요?”

“감사합니다. 혹시 술은?”

“무척 좋아합니다만 오늘은 제가 차를 몰고 가야 해서 조금 어렵겠네요.”

“그러시군요. 조만간 서울에서 또 약속을 잡으시죠.”

그와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

주인아주머니가 들어와 오리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정 대표님, 실물로 보니 진짜 귀여우시네요.”

“하하.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이따 나가실 때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되겠심까?”

“물론이죠. 그리고 여기 앞에 계신 분 사인도 받으면 좋으실 텐데.”

“네? 이분은 또 누구심까?”

“오프라인 사장님이십니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내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이분이 그 오프라인 사장님이라꼬예? 온라인 언론사 사장?”

“네. 최근에 동일본 대지진 취재도 다녀오셨죠.”

“봤심다. 와. 이런 대단한 분들이 우리 식당을 다 찾아와 주시고예. 올해 대박이 날려나 보네예.”

그녀는 손수 싼 거대한 쌈을 우리 둘의 입안에 한입 가득 넣어 주고 나서야 성이 찼는지 방을 나갔다.

“주인아주머니가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요.”

“오프라인 사장님이 왔다는데 기분이 안 좋으면 이상한 거죠.”

“그럴 리가요. DC 소프트에 비하면 저희 업체는 중소기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데요.”

“하하. 농담하지 마세요. 조만간 강남역에 고층 빌딩을 올린다는 이야기도 이미 들었습니다.”

“극비 사항인데 벌써 정보를 들으셨군요.”

“식겠습니다. 어서 드세요.”

부드럽고 쫄깃한 오리고기의 식감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나는 오리고기를 입안으로 삼키고는 정선호에게 말을 걸었다.

“정 대표님의 야구 사랑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기자 회견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정말 야구 선수가 꿈이었거든요. 잘해 보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저는 야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게임이라면 DC 소프트의 카오스 오브 헬을 열심히 플레이했던 유저 중 하나입니다.”

“그래요? 영광이네요. 레벨이 몇이신데요?”

“지금은 접은 지 오래됐습니다.”

“괜찮습니다. 말해 보세요.”

“당시 52 정도까지 키웠습니다.”

순간 정선호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52이요? 죽음의 기사로 변신할 수 있는?”

“맞아요. 딱 거기까지 키우고 접었죠.”

“하하. 요즘은 안 하시나요?”

“대학 초년에 열심히 했죠. 요즘은 할 시간이 없어서.”

“그렇죠. 정신없이 바쁘실 것 같습니다.”

“대표님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오늘 저를 보자고 하신 건 저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컵에 든 물을 입으로 흘려 넣은 그가 천천히 물었다.

나도 물을 한 잔 마시고는 느긋이 대답했다.

“온라인 게임 셧다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온라인 게임 셧다운제는 청소년들이 게임에 과몰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새벽 시간대에는 게임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갑자기 화제를 바꾼 탓일까.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으실까요?”

조금 전까지 친근했던 그의 말투에서 약간의 경계가 느껴졌다.

‘당연하겠지. 나는 언론사 사장이고 상대는 게임사 대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테니까.’

나는 입안으로 쌈을 넣고는 웃으며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한때는 열혈 게임 유저였습니다. 좀 과한 법안인 것 같아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그러시군요. 이해하시겠지만 말씀드리기 좀 조심스러운 입장입니다.”

“이해합니다.”

“그래도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말씀드린다면 저 역시 그 법안은 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유저가 청소년인지 아닌지 가입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물론 정해진 시간에는 이들을 구분하여 차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게 생각만큼 그리 간단한 게 아닙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인증 시스템 구축만으로 개발 비용이 배는 든다고 하더군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한을 가하면 저희 같은 대형 게임사는 괜찮지만, 소규모 게임사나 신규 게임사에는 엄청난 부담이 될 겁니다. 산업 전체적으로 크게 마이너스죠.”

“게임 중독이 우려된다거나 뇌를 짐승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에는 답한 가치를 못 느끼겠더군요.”

“동감합니다. 게임을 해서 폭력적으로 변한다거나 짐승이 된다면 저는 벌써 늑대인간으로 변했겠죠.”

“하하. 그렇담 저는 언데드의 왕이 되어 있겠죠.”

“혹시 셧다운제에 변화를 주길 원하신다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정선호가 궁금하다는 듯 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희는 언론사입니다. 여론을 조성하고 여론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법안을 만든 상대는 국회의원이지 않습니까.”

“국회 쪽에도 아는 의원분들이 몇 분 계시고요.”

“흐음.”

“잘 아시겠지만, 본회의 통과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와의 식사 자리가 끝나고.

정선호가 자신의 밴에 타기 전에 명함을 한 장 건네며 말했다.

“조만간 서울에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땐 술도 같이하시죠.”

* * *

다톡.

오프라인이 한국에서 론칭한 메신저의 이름이었다.

일본판과 같은 ‘함께’라는 이름도 최종결승까지 올랐으나 결국은 국내 유저들에게 익숙하고 함께라는 의미가 녹아든 ‘다톡’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니까 다는 all이라는 의미고, 톡은 talk의 톡이라는 거죠?”

“맞아요. 다에 함께라는 의미가 있으니까 일본판과 완전히 다른 이름도 아니고요.”

“시장 반응은 어떤가요?”

“일본에서 대히트를 친 한국의 모바일 메신저가 한국에도 드디어 론칭했다는 기사 덕분에 빠르게 다운로드 수가 늘고 있습니다.”

“당장 커피톡의 아성을 뛰어넘기는 어렵겠지만, 해 봐야죠.”

구성원 모두 다톡의 성공적인 론칭에 힘을 쏟아 주었다.

특히 이수빈은 한국판에만 있는 스페셜 캐릭터 스티커를 공짜로 풀어 유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일본 쪽에서는 벌써 수익이 꽤 나온다면서요?”

내가 캐릭터 스티커 판매 수익에 대해 이수빈에게 묻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장님. 사장님이 지시한 가족들의 따뜻함이나 그리움과 같은 감정을 캐릭터를 통해 표현했더니 반응이 좋았습니다.”

“네. 한국판도, 일본판도 많이 신경 써 주세요. 오프라인 매장도 함께요.”

그때였다.

백철웅이 갑작스럽게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우 사장! 우 사장! 이거 왜 말 안 해 줬어요?!”

“무슨 일이십니까 백 사장님?”

“아니, 여야 국회의원 10명하고 같이 저녁을 한다고 말입니다. 내일 저녁이라면서요?”

종로 인사동의 한 식당.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야 찾을 수 있는 외곽진 곳이었지만 맛을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한정식집 중 하나였다.

아담한 중정을 가운데에 두고 고풍스러운 기와가 고풍스러움을 더하는 가운데, 굳게 닫혀 있는 문 사이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지로 된 벽지와 낡디 낡은 노란색 장판이 깔린 방 안.

많은 이들이 따닥따닥 붙어 앉아 있어 이미 수용 인원을 넘긴 방 안이었지만 분위기만큼은 훈훈하기 짝이 없었다.

“바쁘신 와중에 다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이광우 의원님이 어찌나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던지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 최고 언론사라고 하면 누가 고려 일보나 HBS를 뽑겠습니까? 다들 오프라인을 뽑지요.”

길쭉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광우를 축으로 한 좌측에는 야당에서도 잘나가는 의원들이 한 줄로 앉아 있었다.

반면 맞은편에는.

“일본 최고의 신문인 요미우리 신문 편집 국장이 오프라인에 대한 칼럼을 썼더군요. 상대가 IT 기업인지 언론사인지 모르겠다면서요. 정말 멋지십니다!”

“저도 오프라인 페이스북 구독자입니다. 가끔 댓글도 남기고 있죠. 하하.”

“요즘 VIP께서는 신문 구독 대신 오프라인 홈페이지를 즐겨 찾기 하고 보신다고 하더군요.”

현 여당인 국일당의 원내 대표를 포함한 소속 의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좌측에 야당 5명.

그리고 우측에는 여당 5명.

이 사이로 테이블의 상단에는 호스트인 나와 백철웅이 나란히 앉아 자리를 주도했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인사도 드리는 겸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부디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의원들에게 음식을 권하자 이광우 의원이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하하하. 여긴 미식가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식당 아니요. 겸손은 됐고, 자! 제 술잔에 술이 떨어졌으니 술 좀 채워 주세요!”

나는 이광우에게 술을 따라 주고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 여야 국회의원 중 실세 중의 실세라는 자들이 이 낡고 좁은 방 안에 가득 앉아 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 추가로 두 분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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