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200)

“어떻습니까?”

“좋군요. 여러 가지 향들이 조화롭네요. 목젖을 넘어가는 느낌도 부드럽고요.”

“그렇죠? 진정 하모니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술이죠. 게다가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비싼가 보죠?”

“비싼 것도 비싸지만…….”

위스키 잔을 닦고 있던 술집 주인이 백철웅의 말을 자르며 답했다.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일본산 위스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위스키 원액이 부족해졌죠.”

“원액이요?”

“네. 위스키를 만들려면 위스키 원액이 필요한데 수요가 폭발하면서 감당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요거 일본에서도 쉽게 못 구합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지금 제가 마시는 이 술이 무척 귀한 술이라는 의미로군요.”

내 말에 백철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 사장이니까 드리는 거예요.”

* * *

술집 주인은 끊임없이 안주를 내왔다.

처음에는 절인 올리브가 나오더니 이어서 볶은 소시지, 그리고 그걸 먹었더니 감바스 알 아히요가 쉴 틈도 없이 나왔다.

따로 주문한 기억이 없는데 안주 그릇이 빌 때마다 안주가 나오는 게 이상해 물었다.

“이거 서비스인가요?”

“아뇨. 백 사장님이 시킨 음식들입니다.”

“네? 저랑 백 사장님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는데요?”

그 말에 앞에 있던 백철웅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타파스라고 스페인 남부 지방의 술안주랄까요? 원래 술을 한 잔 시킬 때마다 안주 하나씩을 공짜로 주는 건데, 여기는 안줏값 3만 원에 안주가 다 떨어질 때마다 주인장이 하나씩 주는 시스템입니다.”

“네? 그럼 3만 원에 무한이라는 겁니까?”

술집 주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뭐 시스템상으로는 그런데, 아직 그런 분들은 없었습니다. 많이 드신 분이 한 10접시?”

“가성비가 참 좋네요.”

“홍보 좀 많이 해 주세요. 백 사장님은 저희 가게 단골이시면서도 기사 하나 안 내주시더라니까요.”

술집 주인이 백철웅을 향해 툴툴거렸다.

나는 올리브 오일이 듬뿍 묻은 새우를 입안에 넣고는 말했다.

“아마도 이런 곳이 기사에라도 나왔다가는 망할지도 몰라서 그러신 거겠죠.”

“네? 홍보했는데 가게가 왜 망한단 말입니까?!”

“TV에 나왔다가 손님이 너무 많이 몰려서 망한 가게도 꽤 많습니다. 가게 공간은 정해져 있는데, 손님은 몰리지, 컴플레인은 늘어나지. 게다가 매출이 늘어난 만큼 세금도 훌쩍 높아지면서 부담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에이. 그래도 손님이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게 좋죠. 잘 좀 부탁드립니다, 우 사장님. 오늘 20접시고 30접시고 계속 드릴 테니!”

투명한 술병 안쪽에서 찰랑거리는 금빛 테두리가 바닥에 제법 가까워졌을 무렵.

“갑자기 단둘이 술을 마시자고 그러시고.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술기운을 빌려 오는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

백철웅이 말없이 술을 마시더니 치즈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그는 술병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우 사장. 혹시 정치에 관심이 있나요?”

“정치요?”

“네. 이번에 셧다운제 폐기되는 과정을 보니 우 사장도 정치하면 참 잘하겠다 싶어서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진실로 단 한 번도 정치에 대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할 의지도, 꿈도, 역량도 없다.’

나는 스트레이트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넘기고는 그의 잔과 내 잔에 번갈아 술을 따랐다.

“전혀 관심 없습니다. 과거에도, 현재도, 앞으로도요.”

백철웅은 살짝 의외라는 표정으로 내가 준 술을 들이켰다.

“그런가요? 의외군요. 한국에서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이들이 향하는 마지막 종착지가 바로 정치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나요?”

“권력?”

“비슷한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르죠. 남들이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달라지니까요.”

“표정이 달라진다라. 백 사장님은 지금 오프라인 사장으로서는 만족하지 못하시는 건가요?”

나의 말에 백철웅은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 오프라인에서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지만. 부족하더군요.”

“도대체 뭘 하고 싶으시기에…….”

그는 자기 잔에 술을 따르더니 먼 곳을 응시하였다.

“저는 지방에 이름 없는 언론사에서 20년 넘게 무명 기자로 일했습니다. 우 사장은 모르겠지만 지방지 기자의 월급은 말도 못 하게 짭니다.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힘들 정도죠.”

“그렇군요.”

‘지방지 기자나 오프라인을 제외한 소셜 언론 기자들 월급은 둘 다 비슷하겠지.’

나는 회귀 전 오프라인의 월급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유독 지방지 기자 중에는 사이비 기자가 많습니다. 기자가 광고 영업도 함께하다 보니 비리가 일어날 소지가 다분한 구조죠.”

“하지만 백 사장님은 정론 직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하하. 우 사장이 저를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적어도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힘든 지방지 기자를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저만의 자랑이기도 했고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한국 언론의 장래가 밝아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회사를 나와 소셜 언론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우 사장과 같은 인재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죠.”

“저야말로 백 사장님을 만난 건 천운이라 생각합니다.”

백철웅은 텅 빈 술병을 흔들며 같은 술 한 병을 더 주문했다.

“비싸다면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뭘요. 우 사장하고 마시는 술인데요.”

술집 주인이 새 병을 가져오자 백철웅은 냉큼 뚜껑을 열더니 이번에는 온더록스로 술잔을 따랐다.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는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닦았다.

“정점에 오르고 싶었습니다.”

“정점이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오르고 싶습니다.”

백철웅은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명 기자 시절 얼마나 힘겨웠을지 안타까움이 몰려오는 한편, 정치인이 된다고 그가 과연 만족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내가 아무런 말 없이 술을 마시자 그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런데, 우 사장을 보니까 제가 헛된 꿈을 꾸었나 싶네요.”

“네? 그게 무슨?”

“만약 정치인이 된다면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우 사장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는 걸 이번 과정에서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아닙니다. 전혀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요. 그런 분이 이렇게 정치에는 전혀 욕심이 없으니 저 자신이 참 한심하고 부끄럽군요.”

“각자의 길이 있는 거니까요.”

백철웅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메모지를 가져오더니 뭔가를 적었다.

그리고 적은 메모지를 술집 주인에게 건넸다.

술집 주인이 한쪽 벽면 가득 꽂혀 있는 LP 판 중 한 장을 꺼내더니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윽고 레코드판이 돌면서 바늘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가 작은 바 안을 가득 채웠다.

* * *

그날 이후 백철웅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전에는 회사 일을 나에게 맡기고 자신은 외부로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어째선지 회의 자리에 함께하는 경우가 잦았다.

칼럼 기사도 일주일에 한두 번이 아닌 하루에 한 번으로 글 쓰는 횟수가 늘었다.

부장급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로 돌아가는데 끝까지 남은 안재영이 나를 보더니 슬쩍 물었다.

“우 사장님. 최근에 백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왜요?”

“아니 요즘은 거의 모든 회의에 다 참석하시잖아요? 그것도 의욕 만땅으로.”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고 싶으신가 보죠.”

“아이고야. 우 사장님도 부담 백배인데 백 사장님까지 저러면 아주 부담 천 배, 만 배입니다.”

“더 열심히 해야죠. 그건 됐고. 환자들 인터뷰는 해 봤어요?”

내가 환자라는 말을 꺼내자 깐죽거리던 안재영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 그거요? 물론이죠. 이거 아주 심각하던데요?”

“그렇죠? 한번 잘 파헤쳐 봐요. 환자들뿐 아니라 의사들도 찾아가 보시고요.”

“네. 이번에 제가 마음 단단히 먹고 제대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라니!”

# 2장 가습기 살균제 사건

서울 태산 병원은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병원 여기저기에 주저앉은 이들이 곡소리를 내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으허헝!”

커다란 덩치의 남성은 늙은 의사의 어깨를 붙잡고는 엉엉 소리 내 울었다.

남자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 관계자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눈물을 삼키며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나와 안재영은 그들을 향해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박창후를 비롯한 영상부원들만이 부지런히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 우리는 노의사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밖에서 오랫동안 고생하셨습니다. 하필 인터뷰 잡은 날에 이런 일이 벌어져서.”

노의사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교수님.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프라인 사장 우세진입니다.”

“네. 서울 태산 병원 소아 청소년과 박경구 교수요.”

“이쪽은 이번에 연락드렸던 안재영 기자, 그리고 저쪽은 박창후 기자와 영상부원들입니다.”

어느새 카메라 장비로 가득 찬 박경구 교수의 진료실은 장비가 내뿜는 열기로 금세 뜨거워졌다.

“오늘 또 같은 증세로 사망자가 발생한 건가요?”

안재영이 무거운 얼굴로 박경구를 향해 물었다.

“네. 며칠 전 원인 미상의 폐렴으로 입원한 10명 중 벌써 3번째 사망자입니다.”

“이유가 뭔가요?”

“모릅니다. 다만 입원한 환자 모두 폐가 딱딱하게 굳고 손상되는 섬유화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바이러스에 의한 폐렴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안재영의 말에 박경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현재 질병 관리 본부에 역학 조사를 요청한 상태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바이러스나 세균성 감염은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가 있으신가요?”

“여러 항생제와 항바이러스제를 투약했지만,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부검에서도 별다른 건 발견되지 않았고요.”

“그런.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한 미지의 바이러스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죠. 하지만 사실 이게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처음이 아니라고요?”

박경구는 서랍 속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더니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서류에는 2006년이라는 숫자가 명확히 보였다.

“2006년에 쓴 논문입니다. 당시에도 지금과 비슷한 증상으로 많은 소아과 환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들이 어떤 증상을 보였고, 어떤 공통점 등이 있는지 조사하여 논문을 낸 적이 있죠.”

“원인은 찾지 못하였나요?”

“네. 원인까지는 찾지 못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소아과에 한정된 질환으로만 생각했고요. 그런데…….”

“성인도 걸릴 수 있다?”

“그렇습니다.”

방 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원인 불명의 폐렴에 의해 2006년에도 많은 아이가 죽었고, 현재는 벌써 3번째 성인 여성의 사망이 발생하였다.

입원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촬영부원 중 누군가가 손을 들더니 질문을 던졌다.

“혹시 조금 전에 교수님 가운을 잡고 울던 덩치 큰 남성분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영상 편집하려면 상황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박경구의 얼굴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그게 참. 이번에 죽은 여성분의 남편입니다.”

“저런.”

“담당의로서 착잡한 심경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마음이 많이 불편하시겠습니다.”

“네. 심지어 그는 중국에서 오늘 막 도착했습니다.”

“중국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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