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사이.
오프라인의 일본판 메신저 ‘잇쇼니’는 이제 일본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독보적인 존재가 돼 있었다.
일본인들은 명함이나 이메일 대신 잇쇼니 ID를 교환하며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드라마나 영화, 만화 등에서도 잇쇼니를 사용하는 모습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또한 잇쇼니에 있는 캐릭터 스티커는 그야말로 출시 때마다 불티나게 팔리며, 캐릭터 제휴 사업을 하자는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국제부가 업무에 부하가 걸려 불만을 토로할 지경이었다.
“운이 좋았죠. 다 우 사장님 덕분이에요.”
“제가 뭘요. 이 부장님 캐릭터가 좋으니까 그렇죠.”
말하는 사이 직원이 이쪽으로 차를 가져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었다.
“여기 올 때마다 깨닫는 거지만 사람들이 우리 캐릭터를 보고 무척 행복해하는 게 느껴져요. 오프라인이라는 무형의 브랜드가 형태가 있는 캐릭터를 통해 실제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움을 준달까요?”
“맞아요! 사실 온라인만으로는 우리의 매력을 전하기에 한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오프라인 매장이 있으니 잠재 고객들이 직접 이곳을 찾아 캐릭터를 둘러보고 오프라인에 대한 호감을 더 높이는 모양새예요.”
“네. 오늘 둘러보니까 내년부터는 시범 사업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진행할 사업으로 정하고, 직원들도 모두 정직원으로 바꿔서 채용해야겠어요. 매장 수도 늘리고요.”
이수빈과 스토어 사업과 캐릭터 사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 들러 오프라인의 캐릭터를 구경하고, 굿즈를 사고, 캐릭터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휴식하며 마치 이 공간을 테마 파크처럼 즐기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 위치한 <오프라인은 즐거움이다>라는 네온사인 문구가 지금 분위기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 * *
나는 백철웅의 사무실에서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이수빈과의 일화를 밝혔다.
“그래요? 이수빈 부장이 정말 열정이 넘치네요.”
“처음에는 그저 그림만 잘 그리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캐릭터 사업이나 스토어 사업에 대한 이해도 높고, 뭣보다 아이디어가 너무 좋아요.”
“하하. 난 사실 이수빈 씨를 부장시키자고 백 사장이 그럴 때 속으로는 반신반의했어요.”
“확신이 없으셨군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분명 당시 그녀가 디자인한 메신저 캐릭터 디자인은 획기적이었지만 그것만 가지고 부장이라는 자리를 잘 수행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믿음이 부족했죠. 다른 경력도 없고, 우리 회사에는 신입으로 지원했다죠?”
“맞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웹툰 작가 지망생이었다고 하더군요.”
“웹툰도 한번 그려 보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처럼 바쁘면 언감생심이네요.”
“웹툰이라.”
백철웅의 말에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대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웹툰과 웹소설은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향후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는 분야였다.
하나의 아이템으로 여러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원 소스 멀티 유스의 원천 소스.
‘나중에는 사람들이 몰려 레드오션화되지만, 지금은 블루오션 중의 블루오션이 아닌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결심을 굳혔다.
“올해는 벌인 사업이 너무 많아서 어렵겠지만, 내년에는 시범 사업으로 해서 한번 해 볼까요?”
“응? 시범 사업으로요?”
백철웅이 궁금하다는 듯 내 쪽으로 몸을 당기며 물었다.
“네. 웹툰이나 웹소설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향후에 드라마나 영화, 게임 등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 IP 확보 차원에서도 좋은 사업일 것 같습니다.”
“흠. 그러면 작가들을 우리가 직접 고용하자는 겁니까?”
“아뇨. 저희는 작품을 보여 주는 플랫폼을 만들거나 아니면 국내가 아닌 해외에 작품을 유통하고 그걸 토대로 다른 사업으로 확장하는 그런 역할을 하면 어떨까 싶네요.”
“이야! 그런 건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정말 좋은 아이디어군요!”
“네 당장은 대형 포털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조금씩 이쪽 노하우도 익히고 좋은 작가들도 알아 두고 하면 분명 오래지 않아 좋은 결과를 낼 겁니다.”
“정말 우 사장은 언론뿐 아니라 미디어 콘텐츠에서는 가히 미다스의 손입니다.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하하.”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그렇죠, 뭘.’
나는 대답 대신 테이블에 놓인 차를 마셨다.
레몬차가 무척 상큼했다.
레몬차의 향과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백철웅이 난데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광고 건은 언제 찍을 겁니까?”
푸흡.
나는 입에서 레몬차를 뿌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하. 그렇게 노려보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봐요 우 사장. 상대도 체면이 있잖아요. 삼고초려도 아니고 팔고초려 정도 했으면 적당히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것도 군자의 도리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티슈로 입 주변을 닦았다.
* * *
보름 전.
가습기 살균제 제조 업체 사장이 발을 헛디뎌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정신이 없던 가운데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는지 끈질기게 전화를 거는 이가 있었다.
바로 국내 3대 통신사 중 하나인 TP 텔레콤의 홍보 임원이었다.
처음에는 바쁘다고 연락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문자를 남기는 것은 물론 직접 회사까지 찾아온 그를 내쫓는 게 어려워 방으로 불러들였던 게 화근이었다.
“감사합니다, 우 사장님. 지금 바쁘신 건 잘 아는데, 저도 사정이 너무 급박해서 말입니다.”
“네. 그럼 용건만 간단히 빠르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우 사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곧 4세대 통신인 LTE가 상용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네. 해당 건은 저희 안재영 부장이 이미 여러 차례 기사화를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바로 그 건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통신사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안건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동안 부족한지 모르고 사용했던 통신망이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기기의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트래픽이 폭증하면서 느린 속도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4세대 이동 통신이었다.
“기사에 대한 취재나 소스 제공이라면 저 말고 안재영 부장에게 전화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오늘 제가 보자고 했던 것은 그게 아니라 광고 때문입니다.”
“광고요?”
“네. 말씀드렸다시피 4G는 현재 대한민국 통신사의 사활이 걸려 있는 사업입니다. 당연히 각 통신사마다 최고의 배우를 섭외하여 광고를 제작 중에 있죠.”
“그렇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저희는 이번에 우세진 사장님을 저희 TP 텔레콤의 광고 모델로 제안드리는 바입니다.”
“네? 저를요?!”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전혀 장난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이 초면인 데다가 상대는 거대 통신사의 홍보 임원이었다.
처음 보는 이에게 장난을 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올 정도로 한가한 인물이 아니었다.
“저희가 원하는 정직하고, 빠르고, 신뢰감이 있고, 기술적인. 그 모든 이미지에 우 사장님께서 완벽하게 부합하십니다!”
그가 흥분한 듯 목소리 톤을 높였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언론사 사장이지 광고 모델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는 더 적합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나는 비서를 불러 그를 정중히 모시라고 말한 뒤 그 일을 해프닝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수시로 문자며, 전화며, 메일을 보냈고 회사에도 두 번이나 더 쳐들어왔다.
그 덕분에 백철웅 역시 그의 존재와 그가 건넨 제안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 *
백철웅은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운 듯 인상을 쓰고 있는 나를 향해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우 사장이 이번에 TP 텔레콤 광고를 찍으면 우리 회사 인지도도 더 높아질 것이고, 우 사장 개인 인지도도 더 높아지고, 광고료도 받고 일석삼조 아닙니까.”
“거듭 이야기하지만 진짜 아닙니다. 저 바쁘다고요.”
“바빠도 광고를 찍을 시간 정도는 있잖아요? 아니 우리 오프라인과 우 사장이 잘나가고, 믿음직스럽고, 새로운 기술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광고 모델로 선정했다는 데 도대체 뭐가 문제예요? 나 같으면 좋다고 냉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죠.”
“계속 그렇게 혼자 고집부리면 나도 당장 오늘부터 칼럼 주제를 전부 정치로 바꿔서 현 정부 욕하고, 정당 비판하는 글들만 쓸 겁니다.”
백철웅이 눈에 잔뜩 힘을 주고는 경고했다.
설마하니 그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계속 모른 척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레몬차를 끝까지 들이켠 뒤 컵을 테이블에 놓으며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것쯤 하죠, 뭐. 죽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당시의 나는 몰랐다.
광고 촬영이 얼마나 힘겨울지.
또 어떤 후폭풍을 불러일으킬지.
# 3장 광고
“컷!”
카메라를 향해 이글거리던 눈빛을 쏘던 나는 슬레이트 소리를 듣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광고라는 걸 만만히 본 결과였다.
왜 흔히들 배우가 작품 대신 광고만 찍는다고 비아냥거리지 않나.
그 말만 믿고 광고 촬영은 별로 힘들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벌써 8시간이 넘게 이어진 촬영은 심신을 녹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힘들죠? 이거 드세요.”
검은색 뿔테 안경에 깔끔하게 정돈된 수염.
누가 봐도 ‘나 예술 하는 사람이요’라는 이미지를 온몸에서 풍기는 남자가 내게 캔커피를 건넸다.
요즘 광고계에서는 뜨고 있는 샛별, 김한곤 감독이었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요.”
“하하. 아닙니다. 우 사장님이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 거예요.”
“뭘요. 저야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농담은 적당히 하세요. 아예 콘티를 새로 짜고 있으면서요! 내로라하는 배우들도 그렇게는 안 찍어요.”
내가 말없이 씨익 웃어 보이자 그가 혀를 찼다.
“아니 콘티는 콘티고. 왜 우리가 괜찮다는데 또 찍자는 말을 해요? 화면 좋은데.”
“아쉬워서요. 이건 한 번 찍고 나면 또 못 찍는 거잖아요. 찍을 때 잘해야죠.”
“허. 광고주가 어렵사리 모셨다고 그래서 여간 찍기 까탈스럽지 않나 걱정했는데, 다른 의미로 까탈스럽네요.”
“어떻게요?”
“찍기 싫어할까 봐 걱정했는데 너무 열심이라서요.”
“돈 받고 하는 거잖아요. 최선을 다해야죠.”
“아무튼 여간내기가 아니십니다. 제가 감독 생활을 그리 오래 한 건 아니지만 우 사장님 같은 사람은 또 처음 봐요.”
그와의 잡담이 끝나고.
나는 조금 전에 찍었던 영상을 모니터링하면서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 그리고 어떻게 찍으면 더 좋을지 감독과 의견을 나눴다.
촬영장 곳곳에서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진 강행군은 결국 다음 날 새벽 3시간 되어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얼굴에 피곤함이 잔뜩 묻은 김한곤이 또다시 캔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내일 촬영은 오전 일찍이에요. 주무실 시간도 별로 없으실 테지만 이거 받고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별말씀을요. 저보다는 감독님이나 다른 스태프분들이 고생 많으시죠. 아무튼 이 커피는 나중에 먹겠습니다.”
정리되는 촬영장을 뒤로한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별들이 쏟아질 듯 가득했다.
* * *
삼 일간의 촬영을 마무리한 나는 이틀의 휴가를 내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광고 촬영으로 피곤한 탓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식당이 드디어 개업하였기 때문이다.
<세진 해장국>
커다란 간판 아래에는 여기저기에서 받은 축하 화환이 가게를 넘어 주차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어떻게 알고 화환을 보냈는지, 대다수는 기업 홍보 팀에서 보낸 것들이었다.
<오프라인 우세진 사장님의 부모님 가게 오픈을 축하드립니다! ○○ 그룹 홍보 이사 ○○○>
내가 팔짱을 낀 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화환들을 둘러보는 사이 가게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세지니 왔나! 이야 니 진짜 대단하데이. 이 꽃들 좀 봐라. 다 니보고 보낸 거 아이가.”
한 씨 아저씨.
아니 아버지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내비쳤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넘치는 건 화환뿐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오후였으나 가게에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카운터에서 나를 발견한 엄마가 나를 꼬옥 안아 주었다.
“아이고 내 새끼! 고맙다, 고마워!”
“뭘요. 장사는 잘돼요?”
“응. 제주도 사람들은 선지해장국 안 좋아하면 어떨까 걱정했었는데, 지금은 오후 네 시면 준비한 물량이 다 떨어질 정도야.”
“네? 네 시면 동이 난다고요?”
내 질문을 아버지가 이어받았다.
“하모! 손님 많은 날에는 세시에도 동난다카이. 아주 쌔가 빠져 뿔겠다.”
부모님과 대화하는 짧은 사이에도 계산하려는 손님들로 계산대의 줄이 길어지는 탓에 나는 곧바로 서빙에 나섰다.
얼마나 지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