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200)

안재영의 목소리가 멀어지듯 옅어지더니 이내 주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사장님. 주전영입니다!

“네. 주 기자. 기사 잘 보고 있어요. 포토샵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

-대학에서 배워서…….

“그런데 주 기자 생각은 어때요?”

-네? 어떤?

“이번 사고 원인이요. 국방부랑 해병대에서는 아직 원인 조사 중이라고만 답하고 있잖아요.”

-음 제 생각에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무언가 가혹 행위라거나 기수 열외와 같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기수 열외? 그게 뭐죠?”

-아. 기수 열외라는 건 기수에서 제외한다는 뜻입니다. 선임 취급 또는 후임 취급을 안 해 준다는 뜻이죠.

“그 말은 내가 상병인데, 이병이나 일병보다 아래가 될 수 있다?”

-맞습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만 해도 무척 흔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기수 열외 피해자였거든요.

“그래요?”

-네. 행동이 느리다고…….

“이상한 문화가 다 있네요. 아무튼 주 기자가 현장에서 한번 잘 파헤쳐 봐요.”

-네! 사장님.

“그럼 안 본부장 좀 다시 바꿔 주세요.”

안재영이 다시 전화를 받았다.

-네. 사장님 전화 바꿨습니다.

“지금 당장 주변 주민들 인터뷰 좀 따 봐요.”

-인터뷰요?

“어차피 해병대에서 오늘 당장 초소 열어 줄 것도 아니고, 해병대원들 인터뷰시켜 줄 것도 아니잖아요. 주변 주민들한테라도 물어봐야죠.”

-아! 그 생각을 미처 못했네요. 당장 진행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턱을 짚고는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지. 지울 수 없는 해병대의 흑역사.’

심각한 사건인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일명 빤스 런.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팬티 바람으로 다급히 도망쳤다는 뜻의 이 말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신조어였다.

‘이번 총기 사건 당시 일부 해병대원들이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속옷 차림으로 부대 밖으로 도망 나갔다는 사실이 들켜 전 국민의 비웃음을 사게 되지.’

심지어 이 단어는 갈수록 인기를 얻어 해병대를 조롱할 때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깜짝 놀라 무책임하게 도망갈 때는 흔히 쓰이는 표현이 되었다.

‘기사 제목에도 흔히 쓰일 만큼 굴욕적인 모습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해병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사건이자 명백한 군무 이탈 행위.

그러나 해병대는 이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안재영의 주도 아래 초소 주변 주민들의 인터뷰는 그날 오후 내내 진행되었다.

그리고.

박창후가 찍어 편집한 영상은 그날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찍었다.

화면에는 안재영이 마이크를 들고 사고 부대 주변 주민을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왔다.

“사고 당시 해병대원들을 보셨다고요?”

“네. 병사들이 막 도망을 다니더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니 부대원들이 빤스만 입고 부대 밖으로 막 도망을 나오더라니깐.”

“옷도 못 입은 채로요?”

“네. 빤스만 입고. 그래서 어디 가느냐고 물어봤더니 다들 겁에 잔뜩 질려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막 도망을 다녀요.”

“어디로요?”

“몇 명은 저리로 뛰고 몇 명은 반대로 뛰고 막 뛰어다녔어요.”

“혹시 그들이 총에 맞았나요?”

“아뇨. 피를 흘리거나 그러진 않던데…….”

“그럼 군무 이탈 아닌가요?”

“어. 그거까진 잘…….”

원래 사고 부대 주변 주민들을 취재했던 방송사의 취지는 이만큼이나 사고 당시 현장이 급박하고 위험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장면이었다.

그게 나중에 조사 결과 부대 밖으로 도망간 부대원들은 실제로 총격을 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문제가 되었던 것.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행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소개하며 방송 직후 곧바로 실시간 검색어까지 올랐다.

해당 보도가 나가고 오래지 않아.

해병대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진행하던 정훈 공보실장이었다.

-아직 정확한 사고 경위가 나오기도 전인데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해병대에서는 저희가 취재한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보았을 때는 명백한 군무 이탈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아직 조사 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봐요. 정훈 공보실장님! 저희가 언론사 중에서 군사 보안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한 곳인지는 잘 아시죠?”

-그. 그건…….

“이거 제대로 조사 안 하고 숨기려 그랬다가 군의 명예가. 아니 해병대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어요! 아시겠어요?”

-…….

“나중에 총소리 한 방에 대응은커녕 부대원들이 팬티만 입고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남한을 어떻게 지키냐는 말이 나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시려고 그래요.”

-흠.

“귀신 잡는 해병대잖아요. 잘 좀 조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뒤로 갈수록 목소리를 낮추더니 전화를 끊었다.

사건은 처음에는 총기를 난사한 병사가 구타와 왕따, 그리고 기수 열외는 없어져야 한다고 진술하면서 일말의 동정 여론이 일었다.

특히 피해자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여론이 일면서 유가족들의 속을 시꺼멓게 태웠다.

그러나 가해자가 이틀 만에 자신은 기수 열외를 당하지 않았다고 진술하면서 그런 여론은 쏙 들어갔다.

반면 이번 조사를 통해서 군 내 가혹 행위와 음주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면서 군에 대한 불신은 커졌다.

뒤틀린 병영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며 대통령까지 나서 강조했다.

그리고 빤스 런 사건에 대해서는 오프라인의 단독 보도가 있었던 만큼 제대로 된 조사가 진행되어 부대에서 도망간 병사들은 모두 군법에 따라 엄격하게 처벌을 받았다.

* * *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이 국민들의 뇌리에서 조금씩 잊힐 무렵.

한낮의 태양, 볕이 따가운 7월.

오프라인은 3일간의 전사 워크숍을 제주도에서 진행하였다.

<대한민국 최고 언론사, 오프라인 임직원분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호텔 로비에 커다랗게 걸린 현수막을 뒤로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등 원색의 티셔츠를 입은 이들이 즐거운 듯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티셔츠의 왼쪽 상단에는 오프라인의 로고가 찍혀 있었고 뒤쪽에는 각기 다른 글씨가 쓰여 있었다.

<유튜브는 우리가 지배한다, 최강 영상 본부!>

<트래픽 따윈 됐으니 진실만 파헤치겠습니다. 전설 취재 본부>

각 본부마다 본부를 설명하는 간단한 설명글과 함께 다른 색상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이거 도대체 누구 아이디어예요?”

최루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티셔츠 뒤에 적힌 문구를 보고 웃었다.

“전 아닙니다. 절대요.”

박창후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홍지혜가 웃으며 답했다.

“백 사장님 아이디어라던데요. 맞죠? 우 사장님.”

나는 썩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철웅이 이것만큼은 무조건 자기 뜻대로 해야 한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이다.

중문 관광 단지.

제주도 서귀포시에 위치한 이곳은 독특한 자연경관이 돋보이는 곳으로 숙박을 비롯한 관광, 레저 등 다양한 시설을 보유한 종합 관광 휴양지였다.

“작년 여름엔 민박집 두 개를 빌려 숙박했는데 이제는 중문 단지의 고급 호텔을 통째로 빌려서 워크숍이라니. 내년엔 뭐가 될지 상상도 못 하겠네요.”

최루리의 말에 박창후가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년엔 관광 단지를 통째로 빌려서 노는 거 아닐까요? 하하하.”

3박 4일 일정으로 내려온 워크숍의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일정은 휴식이었다.

직원들은 자유롭게 주변의 관광지를 누비며 여유를 만끽했다.

누군가는 인근의 테디베어 뮤지엄을 방문했고 또 어떤 이들은 여미지 식물원을 방문하였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해변을 따라 잘 정돈된 올레길을 따로 걸으며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하지만 대다수는 호텔 바로 앞에 위치한 중문 색달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다만 한 사람.

주전영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해변에 혼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옆에 있는 홍지혜에게 주전영을 가리키며 물었다.

“홍 본부장님.”

“네.”

“저기 주전영 씨 어째 익숙한 모습 아닌가요?”

“응? 왜요?”

“아니 작년에 누군가가 혼자 민박집 계단에 앉아 있던 게 떠올라서요.”

내 말에 홍지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이참, 뭐예요! 그게 언제 적 이야기라고요.”

“언제 적은 언제 적이에요. 고작 1년 전인데.”

“흥!”

홍지혜는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고는 팔짱을 끼었다.

나는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농담이에요. 아무튼 주전영 씨는 홍 본부장님이 잘 케어해 주세요. 괜찮은 친구예요.”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나는 홍지혜에게 인사를 건넨 뒤 주전영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멀찌감치에서 혼자서 동료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주전영은 내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모래사장에서 부리나케 일어났다.

“앗! 사장님.”

“아니 내가 뭐라고 일어나고 그래요. 그냥 앉아 있어요.”

나는 그의 옆으로 가 함께 해변에 주저앉았다.

“안 더워요? 파라솔도 없이.”

“아. 괜찮습니다. 평소 비타민D가 부족해서 광합성도 해야 하고요.”

“하하. 그래도 살 탑니다. 광합성도 지나치면 피부암 걸리는 거 알죠?”

나는 그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파라솔 그늘로 이동했다.

“저기 홍지혜 본부장 보이죠?”

“아 네. 잘 보입니다.”

홍지혜는 최루리 그리고 배지민과 함께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미녀 삼총사가 따로 없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홍 부장님 역시 저렇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전영 씨처럼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네? 그럴 리가요!”

주전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와 홍지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농담 아니에요. 정 안 믿기면 직접 물어봐도 좋아요.”

“아, 아뇨. 굳이 그렇게까진.”

“처음이라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이곳이 편한 집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네요.”

“편합니다. 정말 좋아요.”

주전영이 수줍은 듯 속삭였다.

“이렇게 쉬는 것도 내일까지예요. 아시죠? 모레부터는 본부마다 치열하게 발표해야 한다는 거?”

“아 네. 전달받았습니다. 1등 한 본부에게는 포상 휴가에 인센티브가 있지만.”

“꼴등 한 본부는 마지막 날 중문 단지 쓰레기 줍기 봉사 활동이죠.”

“덥겠네요.”

“그렇죠. 여름이니까요.”

주전영이 말없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즐겁게 쉬어요. 안 그럼 이도 저도 아닌 워크숍이 될 테니.”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저녁.

조금씩 날이 어두워지는 것과 동시에 호텔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