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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뜬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밖을 보니 맞은편 건물들 대부분은 불이 꺼진 채, 도로 위에는 몇 대의 차들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1시 40분을 가리켰다.
‘대충 12시간 이상 잤구나.’
날을 샜던 탓인지 확실히 피로가 몰렸었나 보다.
나는 상반신을 일으킨 다음 가볍게 몸을 풀었다.
뚜두둑 소리가 나며 전신이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침대 한구석에 내동댕이쳐 있는 스마트폰을 주운 다음 오프라인 홈페이지를 살폈다.
내가 병원으로 떠난 이후 현장에 남은 박창후와 안재영, 주전영이 열심히 취재했는지 많이 본 기사에는 그들이 쓰고 촬영한 르포 기사가 상당수 걸려있었다.
‘정신없었을 텐데 고생들 많이 했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취재했을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이 컸다.
특히 주전영의 글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기자가 쓴 기사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안재영도 글을 참 잘 쓰는 편인데, 그에 비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데?’
안재영이 긴장 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본 기사는.
바로 병원에서도 수차례 보았던 차량에 갇힌 최루리를 구하는 장면이었다.
홈페이지는 물론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 모든 채널에서 엄청난 조회 수와 함께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우세진 사장은 사실 숨겨진 히어로 아냐? 영화 ‘언브레이커블’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오! 나도 그 생각 했음. 고속도로에서 비행기에서 그리고 이번엔 산사태 현장에서도 사람을 구하고!>
<아무튼 그의 정체가 뭐가 됐든 간에 분명한 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거임. 오프라인이 괜히 폭풍 성장하는 게 아니라니까?>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언브레이커블의 브루스 윌리스라니.
언브레이커블은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로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히어로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긴. 회귀했다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게 또 있을까.’
멍하게 누워 있다가 이번에는 메신저를 살폈다.
오프라인이 내놓은 다톡은 커피톡의 아성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국내 메신저 순위 3위 안에 들며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이모티콘이 무척 귀엽다는 반응을 얻으며 10대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일본에서처럼 국민 메신저의 지위에 오르면 더 좋겠지만 지금은 이걸로 만족해야지.’
아무렴.
이덕오가 아무리 뛰어난 개발자라고 해도 아직 거대 IT 회사의 인프라에 비빌 단계는 아니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못한 탓인지 다톡에는 수많은 읽지 않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직원분은 좀 괜찮으셔? 너는 좀 어때?>
주소월에게 온 메시지였다.
답장하려다가 그냥 화면을 넘겼다.
‘여기로 오겠다고 하면 귀찮아질 테니까.’
다음 메시지는 홍지혜였다.
<우 사장님. 고생 많으세요. 언니 깨어나면 저한테도 꼭 연락해 주세요. 꼭이요!>
미국에 다녀온 뒤로 마치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는 둘이었다.
걱정이 컸을 것이다.
<이미 백 사장님에게 이야기 들으셨겠지만 최 본부장님은 괜찮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어제오늘 폭우 관련 기사 쓴다고 고생 많았습니다. 푹 쉬세요.>
늦은 시간이라 답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홍지혜는 빠르게 답변을 날렸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제가 고생은 뭘요. 우 사장님이 고생 많으셨죠. 호텔에 계신다면서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죠?>
<네. 저 멀쩡합니다. 백 사장님이 호텔에 강제 감금해서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잠만 잤네요.>
<ㅋㅋㅋ 백 사장님 최고네요. 그런데 이제 일어나셨으면 밤에는 어쩌시려고요.>
<그러게요. 그렇다고 또 날을 샐 수는 없고 자려고 노력해 봐야죠.>
<제가 말 상대를 해 드리고 싶은데 오늘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잠이 막 몰려오네요. 꼬르르르.>
<ㅎㅎ 고생 많으셨어요. 푹 쉬시고 내일 봐요.>
<네. 우 사장님도 좋은 밤 보내세요~ 굿나잇!>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보낸 메시지를 살폈다.
다들 최루리와 내가 괜찮은지 묻는 안부 문자였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보낸 메시지의 주인공은.
‘응?’
최루리였다.
그녀는 1시간 전에 이런 메시지를 날렸다.
<우 사장님 자요?>
나는 전기 포트를 통해 물을 끓인 뒤 찻잔에 티백을 넣고는 뜨거운 물을 부었다.
녹차의 향긋한 냄새가 수증기를 타고 올라왔다.
후루룩.
따뜻한 녹차가 빈속에 들어가자 기분이 한결 차분해졌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양손으로 스마트폰을 잡았다.
<조금 전에 일어났습니다. 최 본부장님은 주무시나요?>
곧 숫자 1이 사라지더니 답변이 왔다.
<아뇨. 하루 내내 자서 그런지 잠이 안 오네요. 우 사장님은 많이 주무셨어요?>
<네. 저도 한 반나절은 뻗어 있었던 것 같네요.>
<정말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저 그 영상 몇 번을 다시 봤는지 모르겠어요.>
<차량에서 꺼내는 거요?>
<네. 정말 보고 또 봐도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럽고 고맙고 그러네요. 정말 감사해요.>
<뭘요. 저 말고 박 본부장님이나 안 본부장, 주전영 씨랑 군인분들이 고생했죠.>
<그리고 마지막에 저를 둘러업고 뛰시는 모습 보고 정말 너무 감동이었어요. 지금 또 보면 나 울지도 몰라. 히히.>
<하하. 뭘 그런 거 가지고 울고 그래요. 직원을 구하는 건 당연히 사장된 도리죠.>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평생 충성을 바칠게요.>
<ㅎㅎ 잘 부탁드릴게요.>
<그런데 우 사장님.>
<네.>
<저기, 혹시 저희 집도 보셨어요?>
그녀는 평소 명품 핸드백에 고급 브랜드 옷을 즐겨 입었다.
나 역시 그녀가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에 산다는 것은 약간 의외였다.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집이요? 반지하?>
<이런. 보셨구나.>
<아뇨 보지는 못했어요. 토사가 방 가득 들이닥쳐서요.>
<앗! 진짜요?! 그건 몰랐는데 ㅠㅠ>
<정부에서 보상 이야기가 오가곤 있는데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도 있어요. 오프라인에서도 십시일반 보탤 테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걱정은 뭘요. 어차피 집에 뭐 물건도 별거 없어요. 옷 몇 개랑 가방…… 가방은 좀 슬프네요. ㅠㅠ>
반지하 이야기가 나오자 문득 아주머니가 혼자 사는 여성이라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저기 최 본부장님.>
<네.>
<혹시 혼자 사시는 거예요?>
<네?! 갑자기 그건 왜요???>
<아니 남편분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으셔서요. 토사가 들이닥쳤는데 옷이랑 가방 이야기만 하셔서.>
<아 그게 저…….>
한동안 그녀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는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나 싶어 더 보채지 않고 다톡을 끄려고 했다.
그 순간.
그녀에게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왔다.
<저 사실…….>
초기에 뽑았던 17명 중 유일한 40대.
게다가 결혼 여부에 기혼으로 표시한 이는 최루리 혼자였다.
평소에도 남편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사내에서 잉꼬부부라며 부러움을 받기도 하지 않았던가.
많은 여직원들이 결혼 생활을 한다면 최루리처럼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랬던 그녀인데.
<저 결혼한 적 없어요.>
<네? 결혼한 적이 없다니요?!>
<말 그대로예요. 저 처녀예요.>
<아직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건 다 뭐예요? 남편분을 처음 만나신 게 마다가스카르에 여행 갔을 때라고 그러셨잖아요?>
<다 지어낸 이야기였어요. 죄송해요.>
나는 한동안 답을 하지 못했다.
황당한 수준을 넘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거짓말을 뭐 하러 한단 말인가.
<진짜 죄송해요. 우 사장님께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아니 그런 이야기를 왜 지어내셨어요?>
<마다가스카르에 갔던 건 사실이에요.>
<네?>
<그리고 거기서 누군가를 만났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지금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11년 전에 혼자 마다가스카르로 여행을 떠났어요. 거기서 그를 만났죠. 둘 다 젊었어요. 우리는 한눈에 사랑에 빠졌죠.>
뭔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다톡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래서요?>
<일주일을 같이 지낸 우리는 장래를 약속했어요. 한국에 돌아오면 꼭 결혼하자고요.>
<네.>
<그런데…….>
이후에 나온 이야기는 장르가 바뀌었다.
로맨스에서 호러 영화로.
그날 저녁 잠시 수영을 하고 온다며 방에서 나갔던 남성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뭔 일인가 싶어 수영장에 나갔더니.
그가 수영장 한가운데 둥실둥실 떠 있었다.
<심장 마비였어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는데 아주 가끔 그런 일이 있다며 호텔 관계자가 이야기하더군요.>
<저런. 당황스러우셨겠군요. 아니 슬프고 억울하고 화가 나고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이런 게 하늘이 인간에게 내리는 시련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고생하셨습니다.>
<정신없었죠. 현지 경찰 조사도 받고, 대사관에서도 사람이 나왔고요. 그 남자 가족들한테도 막 항의 전화가 오고.>
그녀가 얼마나 시달렸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결혼 같은 건 생각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 사람을 위한 것도 있고 또 저를 위해서도요.>
<그 남자를 위한 건 의리 같은 건가요?>
<뭐 그런 거죠.>
<그런데 최 본부장님을 위해서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그냥 무서웠어요. 제 곁에 소중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떠나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말도 안 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저와 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일 거예요.>
<아뇨.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말로요.>
<이후 저는 그냥 일생을 즐기자는 마인드로 살았어요. 저축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고, 하루하루를 즐겼죠. 명품 백, 명품 옷, 고급 차. 다 그런 거였어요. 그러다 보니 반지하 방에 살게 된 거지만.>
<네. 그런데 굳이 남편이 있다는 이야기는 왜 하셨어요?>
<귀찮아서요.>
<네?>
<하도 자기랑 결혼하자는 남자들이 많아서 그냥 지어낸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