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습니다. 바로 지사로 이동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두 분 사장님들도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백철웅과도 제법 나이 차이가 났지만, 아들뻘인 나에게도 저렇게 정중한 태도라니.
“보통 분은 아닌가 봅니다.”
백철웅도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음 날 오전.
약속 시각을 10여 분 앞두고 로비에 내려가니 고희열이 파란색 비단옷을 입고는 대기하고 있었다.
“그건 베트남 전통 복장인가요?”
“아. 이 옷 말입니까? 맞습니다. 아오자이라고 베트남의 전통 복장입니다.”
“아오자이라고 하면 보통 여자들이 입는 옷으로 생각했는데 남성용도 있나 보군요.”
“그렇죠. 베트남 현지에서도 남성들은 잘 안 입습니다. 여성들은 많이 입지만요.”
그와 아오자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백철웅이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백 사장님. 선글라스가 멋지십니다.”
“하하. 고 지사장님 베트남 전통 복이 더 멋스럽네요. 저도 이거 한 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제가 잘 아는 옷집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고희열의 안내에 따라 차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는 생각보다 발전된 모습이 아니었다.
“의외네요. 여기는 베트남의 수도인데 서울과는 너무 느낌이 다릅니다.”
내가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말하자 고희열이 웃으며 답했다.
“베트남 최대 도시는 수도인 하노이가 아니라 남부의 호찌민입니다. 예부터 해외 문물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으로 번잡하고 화려한 이미지를 상상하신다면 호찌민이 더 어울리죠.”
“그런데 하노이는 왜 이렇게 시골 같은 느낌인가요? 베트남의 수도인데 말이죠?”
“그동안 외국인 투자는 주로 베트남 남부 지방 위주로 이뤄졌습니다. 호찌민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고요. 상대적으로 하노이를 비롯한 북부 지방은 개발이 더디죠.”
“신기하네요. 한국으로 따지면 서울보다 부산이 더 발전한 꼴인데.”
“두 곳의 문화도 많이 다릅니다. 실제로 중국에 가까운 하노이는 대륙 기질이 더 강하고 바다에 가까운 호찌민은 해양 문화가 더 강합니다.”
베트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우리를 태운 밴은 어느덧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내리시죠. 다 왔습니다.”
나와 백철웅은 고희열의 뒤를 따라 건물에 들어섰다.
통유리로 된 현대식의 10층짜리 건물은 주변의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이게 원화성 회장님의 건물인가 보죠?”
“맞습니다. 지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이질적인 면은 있습니다만 덕분에 주변에서는 나름 랜드마크 건물이기도 합니다. 하하.”
“양옆의 건물들을 보면 희한하게 폭은 좁고 길이는 긴데 이유가 있습니까?”
“오. 역시 언론사 사장님이라 관찰력이 남다르시군요. 저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두 가지 설이요?”
“네. 하나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의 건축 양식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였군요.”
“네. 아시아에서는 네팔과 베트남, 라오스 등이 프랑스의 식민지였죠.”
“그럼 또 하나는요?”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 아니겠습니까? 국가에서 영토를 소유하고 관할하다가 이후 개방 정책에 따라 인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게 세금을 덜 내기 위해 그리고 큰 도로와 집을 연결시키기 위해 이렇게 지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군요.”
“네. 하지만 이 건물은 보시다시피 일반적인 건물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원화성 회장이 신경을 많이 썼죠.”
그는 자랑스럽다는 듯 이야기를 하더니 엘리베이터의 10층 버튼을 눌렀다.
“오프라인 베트남은 꼭대기 층이자 로열층인 10층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풍경이 좋겠군요.”
“근처에 여기보다 높은 건물이 그리 많지 않아서 멀리까지 다 보입니다. 도착했네요. 내리시죠.”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오프라인 베트남이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띄었다.
고희열이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문자를 보냈다.
그는 잠시 대기하더니 답문을 받고는 말했다.
“이제 들어가시죠.”
문을 열자 남자 다섯, 여자 다섯.
총 열 명의 베트남 젊은이들이 파란색과 하얀색의 아오자이를 입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백철웅 사장님, 우세진 사장님.”
한국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한국어.
나와 백철웅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답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고희열은 직원들 한 명 한 명을 우리에게 인사시키며 소개했다.
우리 역시 한 사람 한 사람과 정답게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이어 갔다.
패기가 넘치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엿보였다.
특히 여자 직원들은 내 손을 잡고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의 마치 연예인을 직접 눈앞에서 본 듯한 표정을 짓고는 기뻐했다.
그중에 한 여직원이 내 손을 꽉 잡고는 말했다.
“꺄아! 이제는 뽀! 뽀로 뽀지로 뽀에버! 우 싸장님 너무 멋지쎄요!”
* * *
인사를 마치고 간단히 사무실을 둘러본 우리는 인근의 쌀국숫집으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전 직원이 다 같이 이동하자 식당 1층이 꽉 찼다.
“여기가 하노이에서 유명한 로컬 맛집입니다. 분명 두 분 사장님들도 만족하실 겁니다.”
고희열은 자신 있다는 말투도 말했다.
“가게 이름이 포호아로군요. 포가 베트남어로 쌀국수죠?”
“맞습니다. 우 사장님은 이전에 베트남에 오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아시는 게 많으시네요. 쌀국수는 좋아하십니까?”
“네. 즐겨 먹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래도 한국에 있는 쌀국수 체인점 대부분은 남부식이라 맛이 다를 겁니다.”
“남부와 북부 쌀국수 맛이 다른가 보죠?”
“네. 남부는 건면을 주로 쓰고 북부는 생면을 주로 씁니다. 숙주도 남부에서 많이 쓰죠. 북부에서는 파를 더 많이 넣고요.”
“정말 같은 나라지만 차이가 크군요. 38,000동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얼마입니까?”
“대략 2천 원 정도입니다.”
“이야. 정말 싸네요. 한국에서는 베트남 쌀국수가 6, 7천 원 정도 합니다.”
“하하. 한국하고 직접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죠. 임대료도 다르고 인건비도 다르고요.”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쌀국수와 함께 스프링롤을 시켰다.
“이 집 쌀국수도 맛있지만 짜조라고 불리는 이 스프링롤도 정말 맛있습니다.”
“짜조요?”
“네. 다진 돼지고기에 새우와 각종 채소를 섞은 뒤 라이스페이퍼에 잘 말아서 튀긴 요리죠.”
그의 말대로 짜조의 맛은 가히 놀라웠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육즙이 가득 들어 촉촉함이 터지는 맛. 나와 백철웅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뿐인가.
짜지 않으면서도 깊은 국물 맛에 향긋한 파 향.
그리고 부드러운 면과 엄청난 양의 고기.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 따로 없었다.
나와 백철웅 모두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정신없이 쌀국수를 먹자 고희열이 웃으며 말했다.
“맛있으시죠?”
“정말이요. 끝내줍니다.”
“하하. 이 집 소개해 드린 분들 중에 만족하지 않으신 분이 단 한 분도 안 계셨습니다. 원화성 회장도 마찬가지고요.”
“정말 정말 맛있네요. 한국에 가져가 체인점을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오!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하지만 그리 추천드리진 않습니다.”
“네? 이유가 뭐죠?”
국물을 음미하던 내가 쌀국수 그릇을 내려놓고 묻자 고희열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제 사업 신조는 한 우물만 파자입니다. 본업과 너무 벗어나면 주의를 집중하기가 쉽지 않죠. 오프라인은 식료나 유통 쪽은 전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백철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지사장님. 저희는 언론사죠. IT 쪽으로 확장을 하고는 있지만 음식물이나 유통 쪽은 전문이 아닙니다.”
“네, 백 사장님. 그렇다면 우선 본업인 언론에서 최고를 찍어야죠. 한국에서 최고를 찍었기 때문에 베트남에도 진출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해외에서도 최고를 찍어 봐야죠.”
고희열의 표정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에서 진지함과 굳건한 의지 그리고 열정이 느껴졌다.
‘62살이라는 나이는 아무 의미도 없구나. 우리 회사에 저 정도의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가 또 있던가.’
식사를 마친 뒤로는 고희열이 소개하는 하노이 투어가 이어졌다.
그날 저녁.
저녁 식사를 끝낸 우리는 내 방에 모여 2차를 시작하였다.
고희열은 하노이의 술이라며 하노이 보드카와 하노이 맥주를 잔뜩 사 왔다.
“하노이 보드카? 보드카는 러시아 술 아닙니까?”
백철웅의 물음에 고희열이 웃으며 답했다.
“하노이 보드카는 식민지 시절 프랑스의 유명 주류 회사에서 만들었습니다. 전통적인 방식과 현대화된 공법을 접목해 만든 거죠.”
“도수가 39.5도나 되네요. 보드카라 할 만합니다.”
백철웅이 하노이 보드카를 높게 들고는 혀를 내둘렀다.
“실제 맛은 한국 소주랑 비슷한 편입니다. 현지인들은 도수가 높고 숙취가 심하다고 잘 안 사 먹습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죠.”
소주라는 말에 백철웅이 군침을 흘렸다.
“좋네요. 맥주랑 섞으면 소폭 같은 맛이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역시 백 사장님! 잘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잘 마십니다. 맛도 소폭이랑 비슷하고요.”
세 남자와 함께한 하노이의 밤.
나와 백철웅 그리고 고희열이 얼마나 오랫동안 술을 마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셋 모두 내 방에서 잠이 든 채 시계만이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중천에 떠서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분은 무척 좋았다.
대단히 즐겁고, 유쾌한.
정말 오랜만에 즐겁게 마신 술자리였다.
‘한 분은 아빠뻘. 한 분은 삼촌뻘 되는 분들인데도 소통에 어려움이 전혀 없구나. 그들이 젊은 걸까 내가 늙은 걸까.’
미묘한 감정이 된 나는 아직도 코를 골며 누워 있는 두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엄마! 저 아저씨 뭐야?”
“쉿! 조용히 하렴!”
다섯 살쯤으로 보이는 꼬마가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가 황급히 아이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며 조용히 하라고 시켰다.
아이뿐만 아니었다.
공항의 많은 이들이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수많은 이들이 오가는 인천 공항 입국장.
그 수많은 인파 중에서도 유독 한 명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파란색 비단옷에 화려한 은색 자수가 새겨진 베트남 전통 의상.
거기에 삼각형 밀짚모자인 ‘논라’를 쓴 중년 남성에게 말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주변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입국장을 가로질러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섰다.
“하하. 이번 베트남 출장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고 지부장님도 그렇고, 쌀국수도 무척 마음에 들고요.”
백철웅은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평소보다 두세 톤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2박 3일의 짧은 출장이었는데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럼요! 마음 같아서는 며칠 더 있다 오고 싶었지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요.”
“더 있다 오시지 그러셨어요? 고 지부장님과 장단이 잘 맞으시던데요.”
백철웅과 고희열은 어찌나 서로 죽이 잘 맞던지 베트남을 떠날 때는 회사의 직함도 던져 버리고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럼 우 사장에게 미안해서 말입니다. 아무튼 정말 좋은 분을 만났어요. 나름 사회생활을 오래 했지만 그런 분은 저도 처음이었다니까요. 하하.”
“두 분이 그리 사이가 좋으니, 옆에서 지켜보는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음에 또 시간 내서 방문하시죠.”
“네. 베트남 지부가 단순히 한국의 보도 자료를 쓰고 팩트 체크만 다루는 곳이 아닌 베트남 현지 및 동남아 전체의 뉴스 거점지로 성장하려면, 규모도 더 커져야 할 테죠. 앞으로 왕래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고희열은 앞으로 베트남 지부가 더 커져야 한다면서 나와 백철웅을 설득했다.
백철웅은 거기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