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베트남 지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이 컨베이어 벨트 저쪽에서 우리 캐리어가 다가왔다.
백철웅은 자신의 캐리어를 휙 낚아채더니 인사를 건네며 일어섰다.
“그럼 내일 봅시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연신 콧노래를 부르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이채로웠다.
* * *
우리가 베트남에 가 있는 며칠 사이.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 가장 큰 뉴스거리는 바로 미국의 디폴트와 관련된 소식이었다.
미국 정부가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다름 아닌 세계 최강국 미국이 말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채무 불이행으로 보시면 됩니다.”
“채무 불이행이요?”
스튜디오에는 젊은 남성 한 명과 홍지혜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 우리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면 언제까지 갚기로 하고 돈을 빌리지 않습니까?”
“네. 기간을 정하고 빌리죠.”
“그런데 그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할 경우를 채무 불이행이라고 합니다.”
“개인이 아닌 회사로 보면 부도 아닌가요?”
“맞습니다. 민법상 채무 불이행이고, 정부의 부도에 대한 영어식 표현으로는 디폴트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자 세계 1위의 경제 대국 아닌가요? 왜 돈이 없는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데요.”
“오랫동안 세수보다 지출이 더 많았거든요. 이러한 만성적인 적자 재정이 이어지자 미국 정부에서 정한 법정 부채 한도에 도달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있나요?”
“방법은 새로 국채를 찍어서, 그러니까 빚을 져서 빚을 갚아야 하는데, 그 문제로 지금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 힘겨루기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세금을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 아니면 정부 지출을 어디서 줄여야 할 것인지 말이죠.”
“여당인 민주당에서는 국방비를 삭감하자고 하고, 야당인 공화당에서는 복지 예산을 깎자고 한다면서요?”
“네. 내년에 새로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여야가 치열하게…….”
오프라인에 도입한 전문 기자 제도는 사내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직원 중 누군가는 일본의 서브컬처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지금 홍지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취재부의 박도현처럼 경제에 대해서 박학다식한 이도 있었다.
“이야, 박 기자, 평소에는 숙맥이더니 경제에 대해서 저렇게 많이 아는 사람인지 몰랐네, 몰랐어. 경제학 박산가? 사람이 완전 달라 보이는데? 홍 본부장도 여간내기가 아니고.”
2층으로 커피 배달을 온 김희철이 스튜디오를 바라보며 감탄을 날렸다.
그는 양손 가득 무려 16잔의 음료가 든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그나저나 형님은 배달까지 하시는 거예요? 무겁지 않으세요?”
“아냐. 무겁긴 뭘. 나는 여전히 오프가 오프라인의 사내 카페라고 생각해. 배달쯤이야.”
“그냥 우리 직원들이 내려가면 되지, 뭘 배달을 와요. 오더라도 형님 말고 알바 쓰세요, 알바. 많이도 고용하셨더만!”
카페 ‘오프’는 넘쳐나는 손님들로 알바생을 열 명이나 고용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유명 가수가 인생 커피라며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탓이 컸다.
“큰일 날 소리! 알바님들에게 어찌 이런 일을 시킬까. 할 일이 많은 분들이야.”
“그러니까 형님도 그냥 배달하지 마시고 밑에 계세요. 제가 직원들한테도 잘 이야기할게요. 커피는 앞으로 직접 1층 가서 시키라고.”
“하하. 밑에 오면 오래 기다리니까 내가 미안해서 그렇지. 내가 좋아서 오는 건데 뭘. 직원들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하고.”
“휴. 그러다 병 나도 전 모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김희철은 일부러 오프라인 직원들을 위해 2층으로 직접 배달을 왔다.
겨우 1층 차이라지만 여러 잔의 커피를 배달하는 건 중노동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카페가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여기 주문을 확인하고, 직접 배달까지 진행하려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닐 터이다.
나중에 커피를 주문한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직원들 역시 미안하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걸 그가 괜찮다며 배달을 왔다고 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미안하단 말이지.’
나는 부장급 회의 때 이 안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1층 오프에서 김희철 사장님이 직접 2층까지 배달오시더군요.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남들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지 말라고 해도 본인이 온다고 하니 고민스럽네요.”
내 말에 박창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뵐 때마다 제발 배달 오지 말라고 말씀드리는데, 본인이 기어코 2층까지 직접 오십니다. 오프는 여전히 오프라인의 사내 카페라면서요.”
회의실의 모두가 좋은 방안은 없는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사이.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홍지혜가 번쩍 손을 들었다.
“혹시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요즘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해서 회사마다 CSR 활동을 강조하잖아요?”
“그렇죠?”
사회가 발달하면서 기업도 단순한 이익 추구만이 아닌 환경과 사회, 윤리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도록 CSR이 날로 강조되는 추세였다.
“사회 공헌 활동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동료들을 위한 봉사의 개념으로 자발적으로 나서서 커피 배달을 하는 이들을 만든다면요?”
“응? 자발적으로 나서서 커피 배달을요? 어떻게요?”
안재영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홍지혜가 힘을 주어 말했다.
“일하다 보면 졸리거나 머리가 아파서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맞아요. 특히 점심 먹고 난 오후에요.”
“네. 그럴 때는 기분 전환 겸 커피 심부름을 다녀오겠다고 외치는 거예요. 실제 외쳐도 좋고 메신저에 공유해도 좋고요.”
“그래서요?”
홍지혜의 제안에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거기에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 그러니까 시스템적으로 게임 요소를 도입해서 자주 커피 배달을 한 직원에게는 회사 차원에서 보상을 주는 거예요. 봉사왕이라거나 동료애 상 같은 타이틀을 붙여서요. 연말에 따로 보너스나 인센티브를 줘도 좋을 테고요.”
“아하! 배달한 횟수를 집계한 다음 메신저의 개인 프로필에 배지나 특수한 이모티콘을 제공한다면 좋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요.”
이수빈이 A4 용지에 뚝딱 무언가를 그리더니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A4 용지에는 동그란 배지에 커피 그림이 그려져 있고 <배달왕>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오! 좋은데요? 기분 전환도 하고 봉사도 하고 타이틀도 받고요! 거기에 보너스도 준다? 일석사조네요!”
회의에 모인 모두가 재미있을 것 같다며 각자의 의견을 더했다.
모든 게 즉흥적으로 이뤄졌지만, 실행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그 자리에 있던 이덕오는 노트북을 열더니 금세 메신저에 새로운 기능을 집어넣고는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사내 메신저 하단의 채팅창 옆에 커피 모양의 버튼이 생긴 것이다.
“이걸 누르면 어떻게 되는 거죠?”
“한번 클릭해 보세요.”
그의 말에 버튼을 클릭하자 8개의 커피 모양이 떴다.
“그럼 다른 이들에게도 커피 팝업이 뜨고, 해당 팝업을 클릭하면 최대 8잔까지 커피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8잔이요?”
“네. 한 손에 4잔씩, 양손으로 하면 8잔. 그 이상은 무겁기도 하고 쏟을 위험도 있으니까요.”
일리가 있었다.
일반적인 커피 캐리어 박스도 4잔이 한계 아니던가.
“그런데 최대 주문은 8잔이라면 최소 주문은요? 1잔을 주문하거나 심지어 아무도 주문을 하지 않을 수도 있나요?”
이수빈의 물음에 모두가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는 듯 얼음이 되었다.
정적을 깬 건 이덕오였다.
“그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요?”
“너무 오랫동안 주문을 받을 수도 없으니 주문을 받는 시간은 최대 3분으로 하고요.”
“네.”
“3분 안에 아무도 신청하지 않으면 부장급 이상에서 랜덤으로 2잔을 배정하는 거예요. 버튼을 누른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요.”
“괜찮은데요? 그런데 랜덤으로 주문을 받게 된 부장분은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이미 커피를 마셨을 수도 있고, 외부 출장이나 미팅 중일 수도 있잖아요?”
“이런. 그럴 수도 있겠네요.”
좋은 의견을 냈다는 생각에 자신감에 차 있던 이덕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 백철웅이 입을 열었다.
“그 건은 저랑 우 사장이 처리하겠습니다.”
“두 사장님이요?”
“네. 아무도 주문을 하지 않을 경우 저랑 우 사장이 주문한 거로 하고 그건 저희가 어떻게든 처리하겠습니다.”
“와! 백 사장님 최고!”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백철웅을 칭찬했다.
이덕오도 한시름 덜었다는 듯 웃으며 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감사합니다, 백 사장님. 그리고 사내 시스템이랑 연동해야 해서 조금 더 개발이 필요하겠지만, 커피를 신청하면 신청한 사람의 월급에서 자동으로 차감될 수 있도록 만들면 어떨까요.”
“좋네요. 배달만 하는 거지, 이 버튼을 누른 사람이 커피값을 내는 건 아니니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최루리도 손을 들고는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주문한 사람 위치도 표시되면 좋을 것 같아요. 자리가 넓으니까 부서명이랑 이름만으로는 찾기 어렵잖아요? 서로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오! 그렇겠네요. 2층 지도를 넣어서 주문한 사람의 위치를 표시하게 하면 찾기 수월하겠네요!”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빠르게 도입된 사내 커피 주문 시스템은 사내에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
사내 커피 주문 시스템의 원래 취지는 바쁜 김희철의 일손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스템은 원래의 취지를 벗어나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바로 사랑방 역할이었다.
커피 주문을 통해 자연스레 통성명을 나누고, 상대의 자리를 알고, 상대가 하는 일에 대해 알게 되면서 직원 간 소통이나 교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오프라인은 미혼의 젊은 남녀가 많은 조직이었다.
평소 관심이 있던 이가 커피 신청 버튼을 누르면 누군가가 반응하면서 데이팅 앱과 같은 효과가 일어났다.
실제로 사내 커피 주문 시스템 도입 이후 오프라인에서는 사내 커플이 부쩍 늘었다.
퇴근 무렵 종로 센터에서 손을 잡고 청계천으로 나가는 커플의 대다수는 오프라인의 직원들이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개발자인 이덕오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왜? 직원들 반응도 좋고 회사에서도 좋은 제도 같은데.”
“아뇨, 형님! 제가 커피 주문을 눌러도 여직원들이 반응이 없다니까요! 우 사장님이나 백 사장님만 신청하시잖아요! 아니다. 두 분이 신청한 게 아니라 아무도 주문을 안 하니까 그렇게 된 거잖아요!”
이덕오의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씩씩거렸다.
“그건 네가 이사니까 그렇지. 평직원들이 부담스럽게 감히 임원한테 커피 심부름을 시키겠어?”
“그런데, 형님이 누르면 다들 신청하고 싶어서 난리잖아요!”
“뭐 난 사장이니까.”
“아니 임원한테는 부담스러워서 못 시킨다면서 그게 또 무슨 소리예요! 아오!”
“그러니까 너도 자기 관리 좀 해.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그 뱃살은 도대체 뭐냐.”
나의 지적에 이덕오가 낙담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장실을 나가자 이번에는 홍지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이사님, 표정이 어두우신데 무슨 일 있나요?”
“아뇨. 살 좀 빼랬더니 시무룩하네요.”
“조금 더 돌려 이야기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러게요. 제가 경솔했네요.”
“아니에요. 우 사장님이 이 이사님을 걱정하시니까 그러셨겠죠.”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혹시 오늘 저녁 선약 있으신가요?”
“저녁이요? 아뇨 별일 없습니다만?”
“잘됐다! 그럼 저 저녁 사 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내게 먼저 밥 사 달라는 말은 좀처럼 하지 않던 홍지혜였다.
게다가 환하게 웃으며 밥을 사 달라니.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해서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중식 어때요? 여기 지하에 유명한 중식당이 있거든요.”
* * *
종로 센터 지하 1층.
1층 로비에서 이어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면 넓은 채광의 1층과는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우면서도 은은한 조명.
곳곳에 배치된 대나무와 식물들이 마치 잘 가꿔진 비밀의 정원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정원을 지나면 이내 고급 식당가가 펼쳐졌다.
나는 홍지혜를 이끌고 간판에 ‘紅’이라고 쓰인 중식당에 들어섰다.
“이름이 홍인가요?”
“네. 붉을 홍. 홍 본부장님은 넓을 홍(洪) 자 쓰시죠?”
“맞아요. 한국에서 홍씨 성은 모두 넓을 홍 자를 쓰거든요. 설마 성이 같다고 여기 오신 건 아니죠?”
“하하. 설마요. 맛있는 곳이라 소개해 드리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식당 내부도 무척 고급스럽네요.”
그녀의 말대로 식당은 온통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꾸며져 있어 중국 황실에 온 듯 화려하고도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와. 중국 청나라 황궁에 온 것 같아요.”
홍지혜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말에 점원이 빙그레 웃으며 자리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