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미디어에 대한 혜안도 그렇지만 정치나 정책 쪽도 뛰어나시고요. 건물이나 토지 등 부동산 쪽도 정말 해박하십니다. 정말 그 능력의 끝을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그냥 제 소견일 뿐입니다.”
우리는 판교의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 우 사장님도 강남역 말고 판교 쪽에 사옥을 짓는 건 어떠십니까? 건축 비용도 훨씬 저렴할 테고, 우 사장님 말대로 향후 판교에 첨단 기업들이 몰리면 건물은 물론 땅값도 오를 테니까요.”
“그건 어렵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정선호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죠?”
“언론사는 취재하러 다녀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업뿐 아니라 정부 부처를 비롯한 관공서에도 자주 들러야 하죠. 판교에 IT 기업들은 많이 몰리겠지만 다른 기업들은 여전히 서울에 집중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건물이나 땅값만 생각한다면 판교도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취재하기 조금 애매한 거리라서요.”
지하철로는 강남 접근성이 나쁘지 않았지만, 차를 타고 다닌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외부 취재가 많은 언론사 입장에서는 남들보다 현장에 늦게 도착할 우려가 있었다.
한국의 주요 메이저 매체들이 모두 광화문에 몰린 이유도 그런 이유가 컸다.
청와대를 비롯한 유수의 정부 부처가 광화문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그럼 사옥은 같은 곳에 있기 어렵겠네요.”
“네. 그래도 판교랑 강남은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저는 우 사장님과 인근에 있으면 더 자주 만나 뵙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까 싶어 드린 말씀인데, 아쉽네요.”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우 사장님 덕분에 온라인 게임 셧다운제가 부결되지 않았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게임 업계 대표들은 모두 오프라인과 우 사장님에게 큰 빚이 있습니다.”
“제가 뭘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더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게임 업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복장이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아름다운 젊은 여성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대표님. 말씀하신 술과 안주입니다.”
그녀는 고급 양주 1병과 얼음통 그리고 과일 및 고기 안주를 가져와서는 방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 조심스레 놓았다.
“수고했어요. 나가 보시고, 바로 퇴근하세요.”
“네. 대표님.”
비서가 나가자 방 안에는 향긋한 냄새가 진동했다.
“저녁은 나가서 드실 줄 알았더니 아예 이곳에서 술까지 같이 드실 생각이셨군요?”
내가 잘 차려진 주안상을 바라보며 말하자 정선호가 웃었다.
“슈바인 학센이라고 독일식 족발입니다. 위스키랑 궁합이 좋죠.”
자리에 앉자 정선호가 위스키를 따랐다.
타는 듯 강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좋은 술인가 보죠? 훈제 향이 무척 매력적이군요.”
“위스키 좋아하십니까? 냄새만으로도 좋은 술인지 아닌지 아시고요.”
“아닙니다. 대표님이 따라 주시는 술인데 그냥 좋은 술 같아서 한 말입니다.”
“하하. 위스키를 만들려면 맥아가 필요한데, 피트라는 일종의 젖은 석탄을 태워서 건조합니다. 이때 나는 연기가 맥아에 스며들어 그 냄새가 술에 배인 것이죠.”
“그렇군요. 향이 무척 강해서 이색적입니다.”
그와 나는 가볍게 건배를 하고는 첫 잔을 그대로 원샷했다.
첫맛은 짭조름한데 뒷맛이 달달한 게 무척이나 독특했다.
“우 사장님이 신경 써주신 덕분에 셧다운제 사건 이후 게임 산업을 진흥해야겠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좋은 방향입니다.”
“어떤 국회의원분은 저한테 직접 전화를 하셔서 게임 산업 진흥원을 만들자, 게임 산업 진흥법을 만들자 그런 이야기까지 해 주시더군요.”
“게임 산업 진흥원이라. 한국 언론 진흥 재단처럼 게임 산업 진흥에 대한 여러 정책을 연구하고 지원하는 부서가 생긴다면 게임 업계에도 무척 유용할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그동안은 게임은 마약이다, 질병이다, 같은 엉터리 이야기들만 많았는데, 게임 산업에 대한 진흥 기관과 법안이 생긴다면 한국 게임 산업이 해외로 진출할 때에도 큰 힘을 받을 겁니다.”
실제로 게임 산업 진흥원은 지금으로부터 한참 뒤에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게 셧다운제 부결 이후 여론이 바뀌면서 빠르게 도입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게임 산업과 콘텐츠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한민국 최고의 게임 업계 대표이니만큼 그의 콘텐츠에 대한 믿음과 비전은 뛰어났다.
그러다 문득 그가 원화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원화성 회장이 맨 처음 오프라인에 투자하셨죠?”
“맞습니다. 지금은 진양 그룹이 추가 투자를 한 상태고요.”
“네. 기사 봤습니다. 제주도에 관광 단지를 조성하는 것에 딜하셨다고요.”
“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습니다.”
“혹시 저희가 세 번째로 투자할 수 있겠습니까?”
“네? DC 소프트에서요?”
진지한 얼굴을 한 정선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가 보았을 때 오프라인이 하는 건 단순히 미디어 사업이 아닙니다.”
“미디어 사업이 아니라니. 그럼 대표님은 어떻게 보시는데요?”
“저희와 마찬가지로 IT 사업 그리고 플랫폼 사업이겠죠. 심지어 일본의 국민 메신저를 보유하고 계시고, 캐릭터 스토어 사업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네. 단순히 콘텐츠만 제작하는 것은 지양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플랫폼이 되고 싶으니까요.”
“동의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함께하고 싶은 겁니다.”
“사실 지금 당장은 신규 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 뭐라고 답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조금 더 생각해 볼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입니다. 여유 되실 때 편하게 검토해 주세요.”
나는 위스키를 입안에 털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게임 업계와 함께할 수 있는 작업이 뭘까.’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고개를 들어 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투자는 조금 뒤에 생각해 보고 간단한 콜라보는 어떠신가요?”
“콜라보요?”
“네. 저희 쪽에 개발 본부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포털이나 게임 업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일본의 국민 메신저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시기가 좋았습니다. 엄청난 자연재해가 있었고, 일본은 메신저 앱보다는 문자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기도 했고요.”
“그런데 어떤 콜라보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우선은 개발자들끼리의 교류 같은 거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TFT를 만들어서 미디어와 관련되어 양사의 개발자들이 협업할 수 있는 팀을 만드는 거죠.”
“아하!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마침 저희도 앞으로 인공 지능과 같은 기술에 많은 노력을 쏟을 예정이거든요. 그런 기술이 미디어 사업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네. 앞으로는 말씀하신 인공 지능 기술에 기업의 성패가 달릴 겁니다.”
그와의 술자리가 끝나고.
오프라인과 DC 소프트는 MOU를 맺고 인공 지능을 활용한 미디어 TFT를 만든 뒤 개발자 간 교류를 시작하였다.
오프라인 개발자 다섯 명과 DC 소프트 개발자 열 명으로 시작.
오프라인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새로운 시작의 단초였다.
* * *
DC 소프트와 기술 교류 MOU를 맺은 지 얼마 후.
DC 소프트로 파견을 나간 이덕오가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이덕오는 자취생들의 메카인 신림동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집이 신림이니까 DC 소프트 가기엔 더 편하겠네?”
“네. 삼성역에서 내리면 되니까 을지로입구역보다는 훨씬 가까워요.”
“출퇴근 짧아져서 좋겠네.”
“아뇨. 형님 못 보니까 서운하네요.”
“하하. 별게 다 서운하단다.”
순대 타운을 지나자 곧 가파르게 경사진 고바위길과 함께 빽빽하게 밀집된 주택가가 나타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길을 얼마나 올랐을까.
이덕오는 열쇠로 파란색 페인트로 칠해진 철문을 열더니 들어오라 했다.
“헉헉. 여기예요.”
“덕오야.”
“네?”
“너 매일 이렇게 출퇴근하는 거니?”
“네. 왜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살이 안 빠지지?”
“그러게요. 흐흐.”
이덕오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더니 앞장섰다.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그는 결국 옥상까지 나를 이끌었다.
옥상 문을 열자 탁 트인 전망이 우리를 맞았다.
“이야 경치 좋구나.”
“그렇죠? 제 보물입니다.”
“집이 옥탑방인가?”
“네. 월세가 엄청 싸거든요.”
“얼만데?”
“삼천에 30이요.”
“30만 원? 우리 고시원이랑 똑같네?”
“크크. 그러니까 말입니다. 형님. 저랑 같이 살자니까요? 여기 좋잖아요.”
이덕오의 옥탑방은 대략 15평 남짓으로 보였다.
넓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성인 남성 두 명이 함께 살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이덕오는 계속해서 자기랑 같이 살자며 나를 졸랐다.
“형님! 보증금은 따로 안 받을게요. 지금 고시원에 30만 원 내는 거 저랑 반땅하면 15만 원만 내면 되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됐어. 뭘 귀찮게 이사를 해.”
“어휴. 형님 방에 이사할 짐도 없더니만 무슨 이사에요. 그냥 몸만 오면 되겠더만!”
“괜찮아. 난 그냥 고시원이 편해.”
“아니 사장님 맞아요? 이해를 못 하겠네.”
“다 인연이라는 게 있는 거다, 이놈아.”
“거기를 떠나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어요?”
“그러는 넌 도대체 왜 나랑 같이 살자는 거냐?”
“그건…….”
갑자기 이덕오가 정색하며 말했다.
“저는 형님이 좋습니다.”
“뭐…… 뭐?!”
나는 깜짝 놀라서 이덕오를 쳐다보았다.
이덕오의 표정은 진지했다.
“너 서…… 설마?”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게 아니긴 뭐가 아냐! 나 좋아한다며?”
“아니 같은 남자로서 좋아한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그 말이잖아! 얌마 가까이 오지 마!”
나는 이덕오를 경계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덕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그게 아니고요, 형님을 같은 남자로서 존경한다는 의미였어요. 진짜예요!”
“이상하다, 이상해. 너 좀 이상해.”
“진짜 오해입니다! 믿어 주세요!”
이덕오가 울상을 지으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나도 안다.
녀석이 게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하지만 녀석을 조금 더 놀려 주고 싶었다.
“이 녀석! 내가 너희 집에 오면 덮치려고 그런 거지? 응?”
“아이고!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요. 아닙니다요, 네? 진짜 아니에요!”
녀석은 답답한지 자신의 큰 주먹으로 가슴을 몇 번이나 내려쳤다.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나는 짐짓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짜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어?”
“물론이죠! 하느님, 부처님, 알라 님? 아, 아니 알라신, 성모 마리아에 맹세코 정말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