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200)

“고맙습니다. 오늘 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또 뵐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앨런은 정말로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배웅하려고 따라나서는데 멀리서 홍지혜와 몇몇 직원들이 카메라 장비를 든 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붉은색 드레스.

두 눈을 감은 한 여성이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는 테이블에 차분히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짜장면 한 그릇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짜장면은 쳐다보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었다.

“스탠바이~ 큐!”

큐 사인과 함께 여성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짜장면을 앞에 두고 혼자 있었던 여성의 정체는 바로 홍지혜.

“서민들의 대표적인 먹거리, 짜장면. 하지만 지금까지는 ‘자’장면이 표준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짜장면 역시 표준어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말과 함께 홍지혜는 짜장면을 맛깔스럽게 흡입했다.

츄르릅.

그녀가 어찌나 맛있게 짜장면을 먹던지 주변 촬영 스태프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입가에 묻은 짜장 소스를 휴지로 가볍게 닦은 홍지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방송인 정도만 ‘자장면’이라는 발음을 사용할 정도로 일상의 언어와는 큰 괴리가 있었는데요. 국립 국어원에서 실생활에 많이 사용하지만, 그동안 표준어 대접을 받지 못한 ‘짜장면’과 ‘맨날’, ‘간지럽히다’와 같은 단어들을 새로 표준 국어 대사전에 등재하였습니다.”

표준 국어 대사전.

국립 국어원에서 표준어 규정과 한글 맞춤법 등의 규범을 준수하여 발행하는 한국어 사전이다.

국가에서 편찬하기에 수정이나 새로운 말의 등재는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쓰이는 말과 표준어가 다른 경우가 많았고,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번 표준 국어 대사전 등재는 이를 개선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이번에 표준어로 새로 인정된 단어들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여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표준어로 인정된 것과는 다른 표기로 쓰이던 표기를 모두 표준어로 인정한 예입니다. 바로 자장면과 태껸, 품세 같은 말들에 비견되는 짜장면과 택견, 품새가 그것입니다.”

홍지혜는 그 외 새로 인정받은 표준어 40개를 차례대로 소개했다.

그녀가 언급한 단어 중 유독 눈에 띄는 말이 있었다.

“국립 국어원은 이번에 특별히 기존의 표준어에는 없던 한 단어를 표준 국어 대사전에 등재하였습니다. 바로 ‘소셜 언론’이 그 주인공입니다.”

홍지혜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국립 국어원이 왜 소셜 언론이라는 단어를 새로 표준어로 인정했는지 소개했다.

“소셜 언론은 일상에서 무척 자주 쓰이는 단어이고 언론의 새로운 지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새로 생겨난 말이라 그동안 표준어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그 의미가 큰 만큼 특별히 표준어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화면 말미에는 국립 국어원 연구원의 인터뷰가 추가될 것이다.

“표준어를 새로 인정하는 일은 신중히 처리해야 하기에 오랜 시간을 두고 철저하게 조사를 하였습니다. 현실을 반영하여 표준어를 확대했으니 그동안의 불편이 상당히 해소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뉴스 완성본을 상상하는 사이.

촬영을 끝낸 홍지혜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휴. 짜장면 표준어 인정! 제가 다 속이 시원하네요. 그동안 도대체 자장면이 뭐야 싶었는데요.”

“고생 많았습니다. 그런데 홍 본부장님 배고팠어요? 연출이라고 하기에는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드셨네요?”

“이 집 짜장면이 너무 맛있어서요. 탄탄면 말고 짜장면도 끝내 주세요.”

홍지혜가 엄지를 치켜세우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

바로 얼마 전 홍지혜와 함께 식사했던 종로 센터 지하 1층의 고급 중식당 ‘홍’이었다.

“설마하니 여기서 촬영하자는 생각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짜장면이 표준어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여기가 떠올랐거든요. 분위기도 뭔가 아늑하고 좋잖아요.”

“하하.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점심은 단체로 여기서 먹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응? 그건 왜요?”

나는 홍지혜에게 주변 스태프의 얼굴을 보라고 넌지시 알려 주었다.

홍지혜의 박진감 넘치는 연출 때문인지 모든 이들의 표정에서 깊은 허기가 느껴졌다.

“앗! 오늘 점심은 제가 쏘겠습니다! 여기 오자고 한 사람은 저니까요. 모두 주문하세요!”

홍지혜의 외침에 촬영에 따라나선 인원 모두가 환호했다.

* * *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

산을 넘지 못한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찬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대구와 아프리카를 합성해 대프리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이런 대구에서 늦여름인 8월 27일부터 9월 4일까지 제13회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오프라인 역시 10여 명의 특별 취재 팀을 꾸려 대구에 내려왔다.

취재 이틀째.

특별 취재 팀은 대구의 살인적인 더위에 혀를 내둘렀다.

“덥네요, 더워, 진짜 더워요.”

“아까 온도계를 봤더니 34.8도던데요.”

“더운 건 둘째 치고 습도가 너무 높아요. 밖에 나가면 숨도 못 쉬겠어요.”

“야 그래도 우리는 경기 끝나면 에어컨 빵빵한 그늘에 들어가 기사 쓰면 되잖아. 밖에 있는 선수들이 걱정이다. 이렇게 더워서 신기록은커녕 좋은 성적이나 나올지.”

박창후의 말처럼 날씨가 너무 후텁지근하다 보니 기대했던 세계 신기록이 좀처럼 나오지 않고 있었다.

“기록 제조기라 불리는 몬도 트랙을 도입했는데도 신기록은 구경도 못 하겠군. 이게 다 대구가 너무 더워서 그래. 트랙이 녹는 거 아냐?”

“몬도 트랙이 뭔데요?”

주전영의 물음에 박창후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야! 너 제대로 공부 안 해서 올래? 안 본부장! 밑에 애들, 이따위로 가르칠 거야?”

“아니, 박 본부장님은 왜 가만히 있는 우리 취재 본부 에이스를 건드리고 그래요.”

“에이스는 무슨. 육상 대회를 취재하러 왔다는 기자가 육상에 기초 중의 기초인 몬도 트랙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박창후가 유독 거드름을 피우며 주전영을 나무랐다.

그러자 안재영이 주전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탈리아 몬도사에서 만든 마법의 트랙 있잖아. 아스팔트 위에 천연 탄성 고무를 이중으로 얹어 반발력이 좋은.”

“아! 기존 우레탄 트랙보다 훨씬 좋은 거 말이죠? 지면 밟을 때 가해지는 압력이 마치 용수철처럼 되돌아와서 선수들 기록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주전영이 알고 있었는데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박창후가 멋쩍은 듯 입을 쩝쩝거렸다.

“뭐,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네.”

“그것도 그렇지만 실격 기준이 너무 엄격해진 것도 한몫하는 것 같아요. 부정 출발을 한 번만 해도 실격 처리되니까요.”

주전영의 말처럼 이번 대구 대회에서는 유독 규정이 엄격한 면이 있었다.

경기 일정이 엉망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송사의 압력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아무튼 진짜 덥다. 나 제주도 출신인데도 여긴 왜 이렇게 덥냐.”

에어컨이 켜진 메인 프레스 센터 안에 들어왔으면서도 박창후는 여전히 더운 듯 옷깃을 팔랑거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영상 본부의 막내가 생각나는 게 있다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남자 20㎞ 경보할 때 옆에 영국 방송사 카메라맨도 덥다고 투덜거리던데요. 지금까지 자기가 가 본 도시 중에 대구가 가장 덥다면서요.”

“쳇. 대구가 덥긴 하지만 그래도 그 친구는 어디 여행 많이 안 가 본 거 아냐? 라스베이거스나 아프리카는 장난 아니겠지.”

박창후의 말에 안재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 대구가 아프리카의 적도 지방보다 더 더워요.”

“응?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야. 대구가 어떻게 아프리카보다 더 더워?!”

“인도양과 접한 동아프리카 쪽은 사실 사시사철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해요. 서아프리카나 중부 지방은 열대우림 기후지만요.”

“뭐? 가을 날씨라고?”

“네. 게다가 대구는 습도마저 높잖아요. 평균 70%인데 그늘에 들어가도 시원하지 않을 정도니. 아프리카는 안 그래요.”

“안 본부장 아프리카 가 봤어?”

“네. 대학생 때 세계 여행 다니며 가 봤죠.”

“세계 여행? 와 진짜 돈 많은 도련님은 별걸 다 하는구나. 나는 술집, 당구장, 술집, 당구장의 연속이었는데.”

“아무튼 아프리카에서도 사하라 사막이나 칼라하리 사막은 정말 미칠 듯이 덥지만 대부분 지역은 고층 빌딩도 없고 자동차나 아스팔트의 열기도 없으니까요. 여기 대구처럼 막 쪄 죽겠다는 느낌은 아닙니다.”

안재영과 박창후가 대구와 아프리카의 날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은 나는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방금 그거 기사로 내도 좋지 않을까요?”

“네? 대구랑 아프리카 날씨 비교하는 거요?”

“네.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이라서 이번 대구 대회랑 별개로 콘텐츠화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군요. 이왕이면 단순 텍스트보다는 카드 뉴스나 인터랙티브한 뉴스로.”

“으흠. 그러네요. 충분히 클릭을 부르는 아이템 같습니다. 오늘 취재 끝나면 추가로 작성할게요.”

유난히도 덥고 습한 대구의 날씨 때문이었을까.

내신은 물론 외신 기자들 모두 예민해진 상태였다.

특히 조직 위원회의 미숙한 운영으로 기자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그 정점은 대회 넷째 날인 30일 오후.

기자들이 기사를 쓰는 메인 프레스 센터(MPC)에서 벌어졌다.

취재 시간에 쫓겨 몇몇 내신 기자들이 정신없이 입구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데.

조직위원회의 미디어 지원국장인 조호원이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이런 이야기를 던졌던 것이다.

“저기 기자님들. 이곳 메인 프레스 센터에서는 외국 기자들도 많고 하니 컵라면을 먹으시면 안 됩니다.”

“컥컥. 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컵라면을 먹던 기자들 몇이 사레에 걸린 듯 콜록거렸고 몇은 기분이 상한 듯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조호원 국장은 이미 결심을 굳히고 온 듯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국 기자들만 컵라면을 먹는 모습이 외국 기자들이 보기에는 영 안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더구나 외국 기자들은 김치 냄새에 학을 떼는데 좀 적당히 해 주세요.”

“하? 국장님. 지금 다들 취재 시간에 쫓겨서 정신없이 컵라면 먹는 거 안 보이세요? 여기서 먹지 말라면 도대체 어디서 먹으라는 소리입니까!”

“한국 기자들뿐 아니라 외신 기자들도 컵라면 많이 먹고 있어요!”

“아무튼 저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앞으로는 컵라면을 여기서 먹지 말아 주세요. 김치도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유히 몸을 돌려 메인 프레스 센터를 빠져나갔다.

메인 프레스 센터에 남은 기자들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컵라면을 먹던 기자들뿐 아니라 곳곳에서 불만 섞인 투정이 흘러나왔다.

“아니 대회 개막 전날부터 사전 예고도 없이 메인 프레스 센터를 비워 달라고 하질 않나, 출입문을 잠가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하지 않나, 이거 완전 막장 운영 아냐?”

“컵라면은요? 조직위에서 제공하는 식당이 형편없으니 내신 기자는 물론 외신 기자들도 죄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지 않습니까? 김치에 학을 떼? 김치 먹는 외신 기자들도 많습니다. 제가 다 봤어요!”

“이거 참는 데도 한계가 있지 도저히 안 되겠네요. 기사로 조져 버려야겠어!!”

내신 기자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분노의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키보드를 부술 듯 강하게 타자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인 프레스 센터의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날 듯 험악해졌다.

안재영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내게 물었다.

“우 사장님. 저희는 어쩔까요? 사실 여기 기자 식당이 형편없는 건 사실이잖아요?”

안재영의 말처럼 조직위에서 준비한 기자 식당의 퀄리티는 비참할 정도였다.

메뉴는 매일 똑같은데 비용은 한 끼에 무려 만삼천 원에 달했다.

“서울에서 먹어도 오, 육천 원이면 해결하는데, 솔직히 만삼천 원은 좀 심해요. 맛도 없고.”

가격이 비싸고 맛이 없다 보니 내신 기자들은 기자 식당을 외면했다.

외신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짜고 매운 것은 물론 한국식 식단 위주라 외신 기자들은 첫날을 빼고는 이곳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오프라인 역시 기자 식당보다는 메인 프레스 센터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준비가 부족한 것은 맞지만 내신 기자들의 불만은 좀 지나쳐. 약간 권위주의적인 면도 보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의 외신 기자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 * *

컵라면 사건 이후 대회에 대한 내신 기자들의 비난은 날로 더해졌다.

그동안의 설움이 폭발했던 걸까.

어설픈 운영에 대한 지적부터 부족한 인프라와 수준 낮은 기자 식당에 관한 이야기까지.

심지어 대구 시민들의 미숙한 시민 의식을 지적하는 기사까지 나왔다.

<이게 어떻게 세계 대회란 말인가……. 대구 육상 대회의 현실>

<컵라면 먹으면 부끄럽다? 우리는 조직위가 더 부끄럽다>

<학생 동원하지만 썰렁한 경기장……. 대구 육상은 낙제점>

<부끄러운 시민 의식……. 100미터 트랙 위에 올라온 세발자전거>

여기에 몇몇 외신 기자들이 이번 대회의 아쉬움에 대해 자사의 홈페이지에 게재하자 부정적인 여론이 득세했다.

<같은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쪽팔린다, 쪽팔려.>

<그러니까 왜 하필 그 더운 대구에서 육상 대회를 열고 난리야.>

<여러분 대구는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아프리카의 한 도시예요.>

조직 위원회에서는 부랴부랴 메인 프레스 센터에 맥주로 가득 찬 냉장고를 설치하고, 식당의 메뉴를 업그레이드하는 등 기자들을 달래려 나섰지만 성난 내신 기자들은 여론을 등에 업고 더 강하게 나왔다.

<형편없는 대구 육상 대회……. 국제 이미지 떨어질까 우려>

<운영과 인프라, 성적 모두 아마추어 수준>

<제대로 안 된 손님맞이 준비에 관중들 외면까지>

수긍할 만한 지적들도 있었지만, 도가 넘는 기사가 하나둘 늘어났다.

게다가 일부 기자는 조직 위원회를 상대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이! 조 국장! 여기 컵라면이랑 캔맥주 좀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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