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님이 미인이시네요. 나이가 젊어 보이는데 몇 살인가요?”
농장 주인 대신 민정희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올해 스물일곱이에요.”
“어머나. 우리 세진이랑 동갑이네. 반가워요. 여보~ 물 다 끓었어요?”
“하모. 여기 갑니데이.”
아빠가 뜨거운 김을 펄펄 뿜는 전기 포트를 가져오더니 찻잔에 끓는 물을 부었다.
그러고는 가루 녹차를 티스푼으로 넣었다.
향긋한 냄새와 함께 찻잔 속에서는 금세 초록의 생기가 피어났다.
“드세요. 제주도 녹차예요.”
엄마가 농장 주인과 민정희에게 녹차를 권했다.
농장 주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민정희는 넙죽 찻잔을 들어 녹차를 맛봤다.
“와! 진짜 맛있어요. 아방! 똣똣혼 게 먹기 좋수다. 혼저 왕 먹읍서. 놈덜 우습니다.”
민정희의 보챔에 농장 주인도 못 이긴 척 녹차를 마셨다.
엄마는 상대의 녹차가 바닥날 때마다 다시 뜨거운 물에 가루 녹차를 풀어내어 주었다.
‘녹차의 테아닌 성분에 진정 효과가 있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네.’
뻘겋게 달아오른 농장 주인의 얼굴은 어느덧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농장 주인이 진정된 것을 확인한 엄마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조금 마음이 가라앉으셨다면 이제 이야기를 해 보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농장 주인은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대신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민정희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가 우세진 사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요.”
“저한테요?”
“네. 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듣는 척도 안 하셨는데, 우 사장님이 대한민국 최고 언론사 사장님이라고 말씀드리니까 그제야 제 말을 들으시더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녀는 잠시 자신의 아버지의 얼굴을 살피더니 조금 슬픈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저희 아버지, 아니 저희 집안이 4.3 사건의 피해자인데요.”
“어머나, 저런.”
4.3 사건의 피해자라는 말이 나오자 엄마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요즘 정부가 4.3 사건에 대해 대단히 미온적이거든요. 그게 불만이신가 봐요.”
“어떤 면이 말이죠?”
“이전 정부는 대통령이 직접 사과도 하고,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위령제에서 추도사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정부는 사과는커녕 진상 규명조차 별 관심이 없거든요.”
“안타깝군요.”
“네. 그래서 아버지가 대한민국 최고 언론사 사장이면 여론도 바꾸고 정부에도 압력을 가할 수 있지 않냐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죄송해요.”
민정희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처럼 4.3 사건은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된 사건이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1만 4천여 명이 넘었고, 추정 사망자는 8만여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지만 단순히 악이 선을 해한 사건이 아니다. 그 이면은 무척이나 복잡해.’
소련이 붕괴한 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이념이란 이름은 여전히 무겁고 어려운 문제였다.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논쟁에 휘말릴 위험이 컸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이덕오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부터 4.3 사건, 4.3 사건 하는데 그게 도대체 뭔데요?”
그의 물음에 민정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참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남북한 이념 갈등으로 일어난 일이거든요.”
“괜찮아요. 저 사건을 단순히 좌우로 나눠서 보는 그런 바보 아닙니다. 이야기해 주세요.”
민정희는 4.3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었잖아요.”
“네.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제주도는 일제 강점기부터 엄청난 수탈을 당한 지역이었어요. 지리적으로도 일본과 가장 가깝잖아요?”
“그렇죠.”
“거기에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제주도에 대규모의 군인들을 보내 이곳을 지키려 했어요. 당시 제주 사람들은 일본의 전쟁 준비에 무차별 동원되었고, 희생되었죠.
“못된 놈들이네요.”
“해방 이후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어요. 제주도는 엄청난 흉년과 높은 실업률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거든요.”
“힘들었겠네요.”
“그렇죠. 그런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커졌고, 우리도 둘 중 한 나라를 선택해야 했어요.”
“네. 북한은 소련을, 남한은 미국을 택했잖아요.”
“택했다기보다는 당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겠지만……. 아무튼 한국 정부와 미군정의 묵인하에 공산당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7년 넘게 학살당하거나 희생당했어요. 끔찍한 일이죠.”
“시대의 비극이군요.”
“네. 아무튼 제주 사람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어요.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잡아다 잔인하게 죽였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그 누구도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민정희는 살짝 숨을 고르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려워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념의 문제는 굉장히 크고 복잡하잖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중요한 건?”
“죄 없는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잔인하게 학살당했다는 거예요. 저희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친척들이 그 예이고요.”
“할머니라면 아저씨의 어머니 말인가요?”
내 말에 그동안 가만히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농장 주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아버지는 4.3 사건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 꼬맹이였어요. 당시 할머니는 갑자기 들이닥친 서북 청년단을 피해 한라산으로 도망치셨대요.”
“그리고 어떻게 되셨는데요?”
“그게……. 아무도 모르세요.”
“네?”
“할머니를 비롯해서 함께 산으로 올라간 분들은 연락이 끊긴 채 모두 돌아오지 못하셨으니까요.”
“저런.”
“아버지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셨죠.”
“어떻게요?”
이덕오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민정희의 표정은 슬픔으로 가득 차올랐다.
“아버지는 서북 청년단에게 잡혀서 그놈들의 노예로 부려졌대요. 땅을 기라고 하면 기고, 죽는 시늉을 하라면 죽는 척을 해서요.”
“쳐 죽일 놈들이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놈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거든요. 갓난쟁이들도 마구 죽이는 깡패 집단이었으니까요.”
무거운 공기가 집 안을 가득 눌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농장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데요?”
내 물음에 농장 주인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 엑함 좀 풀어 주서.”
“억울함 말씀이시죠?”
“그렇수다. 그리고.”
“그리고?”
그는 내게 놀라운 제안을 하나 했다.
* * *
추석이 지나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본부장급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연휴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했던 모두의 표정이 돌연 무거워졌다.
제일 처음 입을 연 건 백철웅이었다.
“그래서 우 사장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이념의 문제로 보고 있어요. 공산주의자들이 제주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라고요.”
“네. 백 사장님.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회의를 열어 여러분의 의견을 구하는 거고요.”
“정의감은 좋지만, 까닥 잘못하다가는 오프라인은 좌파 매체라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습니다. 우 사장도 잘 알지 않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어떤 특정 이념의 대변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국민 절반이 등을 돌리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좌냐 우냐 하고요.”
사실이다.
중도는 영향력이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이 선택되어 소비되었다.
그때였다.
제주도 출신인 박창후가 손을 들었다.
“잘 아시다시피 저는 제주도 출신입니다. 그리고 4.3 사건에 대해서는 여기 있는 어떤 분도 저보다 더 자세히 알지는 못할 겁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HBS에 있을 때도 4.3 사건에 대해 자세히 다뤄 보고 싶었지만, 위에서 막았어요. 괜히 이념 문제를 건드려서 논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냐고요.”
“이해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기사보다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보면 어떨까요?”
“다큐멘터리 영화요?”
“네. 기사로 내보내면 아무리 우리가 자세히 조사하고, 객관적으로 기사를 쓴다고 하더라도 색안경을 쓰고 보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저거 좌빨 매체 아니야? 하고요.”
“그런데요?”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게 말 그대로 사실을 기록하려고 만든 논픽션 작품이니까요.”
“그렇지만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게 바로 진실성 아닌가요? 제작자가 자신이 보여 주고 싶은 정보만 보여 주고 그에 반대되는 정보는 뺄 수 있으니까요.”
홍지혜가 손을 들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이념과는 상관없이, 진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야겠죠.”
“그런 게 가능할까요? 그렇다고 이도 저도 아닌 기계적 중립을 지켜 만든다면 더 큰 논란이 될 수 있을 텐데요.”
홍지혜의 반문에 박창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이래 봬도 제가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2편이나 초청받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하하.”
그의 말대로 그가 찍은 아데만 여명 작전과 일본 대지진 관련 도쿄 현장 다큐멘터리는 이례적으로 2편 모두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상태였다.
백철웅이 두 손을 천천히 깍지끼더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는 영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무조건 잘해야 하는 일이죠.”
박창후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답했다.
# 2장 다큐멘터리 영화
카페 오프.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김희철이 이쪽으로 트레이를 들고 왔다.
“여기, 커피 왔습니다.”
“진동벨 울리면 제가 가지러 갈 텐데 굳이 오고 그러세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뭘. 아무튼 맛있게 드셔.”
김희철이 싱긋 웃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이 어색한 웃음을 띠고는 앉아 있었다.
“오프라인 영상 본부장 박창후입니다.”
“민정희라고 합니다.”
둘은 어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박창후가 나를 힐끔 보고는 물었다.
“그래서 이번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 작가로서 참여하고 싶으시다고요?”
“아 네.”
박창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이전에 만든 작품은 본인이 감독 겸 작가 역할을 함께 수행했었다.
“우 사장님이 추천해 주셔서 오늘 이렇게 만나 뵙는 거지만, 이전에 다큐멘터리를 만든 경험이 있습니까?”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본 경험은 없지만, 드라마는 많이 만들어 봤어요.”
“드라마요?”
“네. 혹시 탁구왕 윤제빵 아세요?”
“탁구왕 윤제빵이요? 당연히 알죠. 작년에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아니에요? 맞다! 시청률도 50%를 넘었고요!”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시청률 50%를 넘는 작품이 종종 나왔다.
그러나 2010년 <탁구왕 윤제빵>을 기점으로 시청률 50%의 장벽을 넘는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유튜브와 종편 그리고 모바일 등 새로운 플랫폼이 계속 나왔으니까.’
그랬다.
전 국민이 다 함께 TV 앞에 모여 같은 드라마를 보는 상황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다들 각자의 방에서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보고 싶은 작품을 보았으니까.
“그럼 탁구왕 윤제빵 작가님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