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혜의 말에 최루리가 아니라며 앙탈을 부렸다.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주전영과 함께 현장에 나가려는 찰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케이서스였다.
“여보세요?”
“미스터 우. 아까는 갑자기 끊어서 미안해요. 폴에게 연락한다고 그랬어요.”
“폴이요?”
“네. 미스터 우가 내게 소개를 부탁한 폴 프리드먼 교수요. MIT 동창이거든요. 개인적으로 가끔 연락하는 사이예요.”
“와. 정말 다행이군요. 저희는 전화 인터뷰만 진행되어도 영광입니다.”
“전화는 뭘요. 내가 내일 점심 무렵 그쪽으로 폴과 함께 갈게요.”
“내일 폴과 함께요?!”
최루리는 깜짝 놀라 이를 한국어로 통역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밖에 있는 기자들에게 즉시 호텔로 들어오라고 연락한 다음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내일 케이서스가 폴 프리드먼 교수를 데리고 이쪽으로 온답니다. 인터뷰 공간은 여기 호텔 1층 로비가 좋을 것 같은데, 최 본부장님은 장소 섭외 좀 부탁드려요. 사람들이 몰리면 곤란하니 방이 따로 있으면 더 좋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대는 당대 최고의 석학 중의 석학입니다. 저는 경제학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인터뷰어로서 적합하지 않을 것 같네요.”
내 말에 최루리가 홍지혜를 가리키며 웃었다.
“여기요. 우리에게도 경제학 전공한 기자가 있잖아요. 그것도 하버드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가요.”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는 경제학을 전공했었다.
“지혜는 하버드 전체 수석은 물론 경제학과 수석상인 존 윌리엄스 상과 최우수 졸업 논문 상인 토머스 홉스 상을 받았어요. 물론 프리드먼하고 직접 비교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개념이나 용어에서 실수하진 않을 거예요.”
최루리가 홍지혜의 등을 두드리며 마치 자신의 일인 양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인터뷰어는 홍 본부장님이 맡아 주시고, 우리는 다 같이 사전 질문을 뽑아봅시다. 그도 우리와 인터뷰를 한 게 부끄럽지 않도록요.”
진심이었다.
세계 최고의 석학을 상대로 두유 노우 김치와 같은 질문을 던질 생각은 없었기에.
* * *
우리가 머문 호텔은 폴 프리드먼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VIP 접대실을 무료로 내주었다.
덕분에 인터뷰 환경은 무척이나 쾌적했다.
우리는 폴 프리드먼의 허락을 받고 인터뷰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심플한 검정 드레스를 입은 홍지혜는 폴 프리드먼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별말씀을요. 오프라인에 대해서는 제 오랜 절친인 케이서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뉴미디어의 귀감이라고요.”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앞에 계시는 기자님도 하버드대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제가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학 다닐 때 교수님이 쓰신 무역 이론에 대해 얼마나 깊이 탄복하였는걸요.”
“오! 그 낡은 책을 요즘도 읽나 보군요. 하하.”
“낡긴요! 모든 경제학도의 교과서랍니다.”
둘은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가볍게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둘의 표정은 갈수록 진지해졌고,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최근 시위대에게 미국의 공화당과 보수 언론의 반응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심지어 폭도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요.”
“일종의 히스테리입니다.”
히스테리라는 표현에 홍지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히스테리요?”
“네. 월가의 금융 세력은 미국 국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잡한 금융 상품을 만들어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렸죠.”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가로 치르지 않았잖아요?”
“정확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구제되었고, 별다른 조건도 없었어요. 그들은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산층보다 낮은 소득 세율을 내는,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세금 시스템의 혜택을 보고 있죠.”
“앞서 히스테리라는 표현을 하셨는데요. 조금 더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음. 쉽게 이야기해서 미국의 경제 시스템은 망가져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시스템을 가진 미국이요?”
“네. 현재 미국의 경제 시스템은 소수의 부자들이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런 사실을 누군가 지적하자 부자들이 짜증을 부리는 거죠. 그거 왜 이야기하냐고.”
“그렇다면 교수님은 미국의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서는 세율을 조정해야 한다는 말씀이실까요?”
“물론입니다. 수익에 따라 세율을 다시 조정해야 합니다. 또한 잘못된 것이 있다면 면밀히 관찰할 수 있도록 감시 체계를 강화해야 하고요.”
둘의 대화가 너무 빠르고 전문적인 내용이라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루리가 중간중간 통역을 해 줘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뻔했군.’
다행히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모두의 표정에서 대화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곤란함이 엿보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지켜보던 인터뷰는 어느덧 예정 시간이었던 1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3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홍지혜와 폴 프리드먼은 마치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그리고 현재 자본주의 사회와 미국 경제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학문적인 견해를 주고받은 동료 학자와 같이.
이번 월가 점령 시위에 대해 깊이 있는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이것으로 이번 인터뷰에서 여쭤볼 질문은 모두 드렸습니다.”
“오. 이런. 벌써 인터뷰가 끝났나요? 미스 홍이랑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영광입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홍지혜가 웃으며 폴 프리드먼과 악수를 나눴다.
3시간의 인터뷰는 여러 언어로 번역된 자막을 입혀 유튜브에 게재.
세계 각지의 지식인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대다수는 월가와 극우 세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날린 폴 프리드먼에 대한 칭송이었지만.
그를 상대하는 홍지혜에 대한 칭찬과 궁금증 역시 만만치 않았다.
<도대체 저 여자는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폴 프리드먼 못지않아?!>
<진행이 너무 매끄러워서 놀랐어. 유명한 경제학 교수 아닐까?>
<아냐! 그녀는 이전에 오바마를 혼내 준 한국의 미녀 여기자야!>
<이런 젠장. 그녀도 하버드대 경제 학과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군. 이걸 봐.>
* * *
홍지혜의 인터뷰는 미국 지식인 사회 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뉴욕 타임스의 한 기자는 한국의 기자가 미국에 와서 저런 인터뷰를 하는 동안 미국 언론은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지 비판하며 자성을 촉구할 정도였다.
폴 프리드먼과의 성공적인 인터뷰는 다음 단계로 나가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폴 프리드먼은 자신의 동료 교수이자 과거 미국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헨리 서머스 교수를 인터뷰이로 소개해 주었다.
교수뿐 아니었다.
우리는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과 유명 철학자, 유명 스포츠 스타 등을 차례로 인터뷰하면서 이번 사태에 대한 각계각층의 다양한 시각을 더했다.
현장 시위대의 목소리에서 시작한 오프라인의 취재는 미국 최고의 전문가 7명의 릴레이 인터뷰로 마무리되었다.
인터뷰어는 홍지혜 혼자였지만, 사전 질문을 준비하는 것은 특별 취재 팀 모두의 몫이었다.
“휴. 우 사장님. 우리 한국엔 언제 돌아가요?”
“왜요? 힘들어요?”
“당연히 힘들죠. 저 여기 와서 살이 한 3㎏는 빠진 것 같아요.”
최루리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며칠 사이 특별 취재 팀 모두가 눈에 띄게 핼쑥해지고 다크서클도 눈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업계 최고 전문가들을 상대로 빈틈없는 인터뷰를 준비하는 데에 매진한 탓이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행 티켓을 끊을 시기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역으로 미국의 미디어에서 홍지혜와 오프라인을 취재하려고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최루리가 한참 동안 어딘가와 통화를 하더니 수화기를 침대에 던지고는 대자로 뻗어 버렸다.
“이번에는 어디에요?”
“폭스 티브이요. 지혜를 인터뷰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우 사장님이라도 인터뷰하고 싶대요.”
“저를요?”
“네. 이번 취재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히트를 했으니 오프라인에 대한 궁금증도 큰가 봐요.”
“여전히 우리를 얕보고 있군요.”
“네?”
내 말에 모두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최루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아니, 우리가 이번 월가 점령 시위에 대해 취재를 잘해서 그런 거잖아요?”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미디어가 미디어를 취재하는 경우가 많나요?”
최루리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잘 없죠. 경쟁 매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우리를 취재하고 싶어 할까요?”
“자기들의 경쟁 상대가 아니니까?”
“빙고. 그들은 우리를 그저 먼 대한민국의 자그마한 언론사 정도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번 사건은 너희가 나름 대박을 냈지만, 다음에는 다시 그럴 일이 없겠지 하고 깔보는 거죠.”
“그런가요? 영 기분이 좋지 않은데요.”
최루리가 복잡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홍지혜가 지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우 사장님 말씀에 동의해요. 우리가 잘해서 취재를 한다기보다는 그냥 오늘의 포토제닉 같은 가십거리로 보는 거예요.”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연락이 와서 기분이 좋았는데, 우 사장님하고 홍 본부장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기분 나쁘네요.”
주전영이 팔짱을 끼고는 투덜거렸다.
나는 모두에게 잠시 모이라는 제스쳐를 취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이번 미국 출장을 온 것은 월가 점령 시위의 취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미국에서 제대로 한 건 더 해 보면 어떻습니까.”
“제대로 한 건 더요?”
“네. 이번 월가 점령 시위 말고 또 하나 엄청난 뉴스를 터트리는 거죠.”
“그런 게 있어요?”
최루리가 눈이 솔방울처럼 커져서는 되물었다.
“물론이죠. 대신 준비할 게 좀 많습니다. 폴 프리드먼 인터뷰 이상으로요.”
“에에?!”
최루리와 주전영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소리쳤다.
# 3장 영웅을 만나다
카메라 기자 둘, 취재 기자 하나.
이렇게 셋은 월가가 위치한 뉴욕에 남고 나머지 다섯은 캘리포니아주로 떠났다.
최루리, 홍지혜, 주전영, 카메라 기자 한 명, 그리고 나.
우리는 편의상 앞의 셋을 A 팀 그리고 뒤의 다섯을 B 팀이라 불렀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아메리칸 항공에 탑승한 B 팀은 일렬로 주르륵 앉아 앞 좌석에 부착된 LCD 화면을 통해 지도를 살폈다.
“미국이란 나라의 거대한 크기를 새삼 실감하네요.”
“그러게요. 같은 나라인데 비행기 시간만 6시간 반이 걸리다니.”
“직선거리로는 사천 킬로미터가 넘으니까요. 서울이랑 부산을 10번 이상 왔다 갔다 하는 거리네요.”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가는 거죠?”
주전영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주는 미국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었고, 캘리포니아주는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니 끝에서 끝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들 준비는 철저히 했죠?”
“네. 사장님. 그런데 월가 점령 시위를 취재하다가 갑자기 애플을 취재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딱히 별다른 이슈는 없는 것 같던데요.”
최루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말처럼 월가 점령 시위는 점점 확산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었고, 애플과 관련해서는 특별한 이슈가 없는 상황.
“애플 본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주의 실리콘 밸리는 전 세계 기술 혁신의 상징입니다. 이번 기회에 애플을 비롯한 IT 회사들을 취재하고, 실리콘 밸리의 풍경을 눈에 담아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시위가 점점 확산하고 있잖아요? 경찰이 투입되어서 청년 시위대가 체포되는 등 갈등도 커지고 있고요.”
“그런 모습은 남은 A 팀이 잘 취재해 줄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요. 임펙트도 컸고요.”
“하긴, 시위대는 취재할 만큼 했고, 전문가 인터뷰는 더는 하라고 해도 못 하겠어요.”
최루리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은 본 주전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애플은 제게 있어 꿈의 기업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이번에 본사를 방문하게 되다니 정말 설레네요. 오프라인 기자 하기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주 기자도 그래요? 나도 그렇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애플은 내게도 꿈의 기업이었다.
애플이 만든 아이폰은 피쳐폰에서 스마트폰 시대로의 전환을 알린 변화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