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후와 김지인.
홍지혜와 민정희.
그리고 이덕오와 나까지.
성인 6명이 앉으니 거실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영화는 좀 어때요? 진전이 있어요?”
내가 민정희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코를 훔치며 답했다.
“아직 일주일 남았지만, 후원 사이트 모금액이 벌써 10억 원을 돌파했어요. 예산은 충분하다 못해 넘쳐요.”
“다행이군요.”
미국에 다녀온다고 깜빡하고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돈이 모일지는 몰랐다.
“잡스 기사가 컸죠. 그거 보러 왔다가 배너 클릭해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박창후가 한입에 술을 삼키더니 기분 좋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그의 잔에 술을 따르자 그가 기분 좋게 술을 받고는 민정희를 가리켰다.
“우 사장님. 사장님이 데리고 온 민 작가 있잖아요.”
“네.”
“민 작가가 왜 드라마 작가 그만뒀는지 아세요?”
“네?”
“아이참! 박 감독님.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민정희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말렸지만, 박창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왜? 우 사장님도 들으면 깜짝 놀랄걸요!”
“우 사장님 때문에요.”
“네? 저요?”
내가 나를 가리키며 묻자 박창후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민정희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제가 언제 우 사장님 때문에 그만뒀다고 그랬어요!!”
“분명 그랬잖아? 탁구왕 김제빵 집필 끝내고 번아웃이 왔다고.”
“번아웃?”
나의 물음에 민정희가 땅이 꺼져라 깊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휴. 박 감독님 다음에 두고 봐요.”
그녀는 회상하듯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탁구왕 김제빵에 제 모든 것을 쏟아부었거든요.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지만, 자료 조사하고 글 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렇게 제 전부를 부었는데 작품이 끝나자 멍하더라고요.”
“만사가 다 귀찮은?”
이덕오의 말에 민정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조금 달라요. 뭔가 다 부질없이 느껴지고, 더 이상 글도 안 써지고 그랬어요. 내가 뭐 하려고 이렇게 죽자 살자 사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이해합니다. 저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네? 우 사장님이요?!”
모두가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나는 덤덤히 술을 마시며 말했다.
“왜요? 저는 번아웃 증후군 같은 건 안 겪을 것처럼 보이나요?”
“물론이죠. 우 사장님은 늘 입버릇처럼 말하잖아요. 최선을 다하자, 열심히 하자, 그래서 회사를 키우자고요. 그래서 번아웃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저도 가끔씩 현타가 올 때가 있어요.”
그 말에 이덕오가 배를 잡고 웃었다.
“와. 대박. 생각도 못 했어요. 맨날 근엄한 표정으로 열심히 하자고 하시는 분도 가끔 현타가 온다니.”
“그러게요. 요즘에는 언제 오셨는데요?”
박창후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회귀하고 나서는 없고, 회귀하기 전에는 자주 왔지.’
내가 말없이 안주를 주워 먹자 박창후가 내 잔을 살피더니 술을 채워 주며 말했다.
“아무튼 진짜 놀랍네요. 우 사장님도 저희랑 같은 인간이었군요.”
“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붉은 피가 흐르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웃으며 건배를 했다.
이덕오는 입가에 묻은 술을 한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런데 민 작가님.”
“네.”
“아까 우리 형님, 아니 우 사장님 때문에 드라마 작가 그만뒀다고 하지 않았어요? 번아웃이랑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이덕오의 말에 민정희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박창후가 놀리듯 말했다.
“내가 이야기할까요, 아님 민 작가가 이야기할래요?”
그때였다.
갑자기 김지인이 박창후의 볼살을 죽 잡아 늘리며 그를 나무랐다.
“오빠! 민 작가님 좀 그만 놀려요! 사람이 정말 못됐어!”
김지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 깜짝 놀랐다.
가장 놀란 건 박창후였다.
“지, 지인아, 아니 여, 여보. 나 아파. 이제 그만…….”
박창후의 눈에는 얼마나 아팠던지 눈물이 핑 돌아 있었다.
하지만 김지인은 박창후의 볼을 놓지 않고 말했다.
“그만한다고 약속하는 거죠?”
“아, 알았어, 약속할 테니까 제발.”
그만한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김지인은 박창후의 볼을 놓아주었다.
박창후의 볼은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박창후가 부은 볼을 만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 진짜 쪽팔리게. 사람들 앞에서…….”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민정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지인 씨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요. 제가 이야기할게요.”
그녀는 박창후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났는지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휴. 정말 덕분에 웃었네요. 별거 아니에요. 작년에 오프라인에서 G20 서울 정상 회의 주관하셨잖아요?”
“아. 오바마도 오고 시진핑도 왔던 행사요?”
“네. 맞아요. 그때 오프라인이 대박을 내지 않았습니까? 지금 제 옆에 계신 홍지혜 기자님이 오바마를 상대로 카운터를 날리셨죠! 와!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소름이 다 돋네요!”
민정희는 정말로 닭살이 돋았는지 오른손으로 왼손을 긁었다.
그리고 존경한다는 표정으로 홍지혜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홍지혜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뭘요. 저는 우 사장님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요.”
“바로 그거예요!”
“네?”
모두 민정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덕오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바로 그거라니.”
“방금도 홍 기자님이 우 사장님이 시킨 대로 했다고 했잖아요.”
“네. 그랬죠.”
홍지혜도 궁금하다는 듯 민정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민정희가 씩 웃으며 말했다.
“G20 정상 회의가 끝나고 어느 방송국이었더라? 아무튼 홍 기자님을 인터뷰한 게 있었어요. 혹시 기억나세요?”
“방송국 인터뷰요? 당시에 워낙 여기저기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서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렇죠? 그럴 거예요. 저도 어딘지 모르겠네요. 하하. 아무튼 그 인터뷰에서 홍 기자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어떤?”
“인터뷰어가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당시 오바마에게 어떻게 그런 질문을 당당히 할 수 있었던 겁니까?’라고요.”
“네. 그런 질문은 다들 비슷하게 주셨던 거 같아요.”
“압권은 홍 기자님의 답변이었어요. 그건 다 저희 우세진 사장님 덕분이었다고요.”
“아!”
그제야 모두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 사장님이 미리 오바마가 던질 질문에 대응하라고 알려 주셨고, 손을 들 타이밍도 알려 주셨다고요.”
“맞아요. 그렇게 대답했었죠.”
“그때 온몸에 전율이 좌르륵! 나도 저런 사장 밑에서 기자로 일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자요?”
홍지혜의 물음에 민정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드라마 작가는 공상의 이야기를 지어내야 하잖아요? 하지만 기자는 실제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취재를 하고요. 그러면 글이 안 써지는 슬럼프도 없을 테고, 더 즐겁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신나게 말하던 민정희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는지 고개를 떨궜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여러분들과 같은 기자가 되는 건 어렵겠죠. 그냥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요.”
“아니에요. 기자가 뭐 별건가요? 현실을 반영해서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가 훨씬 대단하죠.”
내 말에 민정희가 고맙다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었다.
보도 자료 및 취재를 기반으로 한 기사와 비교했을 때 자료 조사 및 상상을 기반으로 한 글쓰기는 엄연히 다른 상품이었다.
‘서로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이나 시나리오와 같은 문학 작품은 사실을 찾는 기사보다는 훨씬 더 고차원의 진실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었다.
‘둘 다 글쓰기를 통해 진실과 사실을 찾는다는 점은 같지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문학의 스케일이 훨씬 크지.’
내 말에 홍지혜도 동감했다.
“저도 우 사장님 말씀에 동의해요. 기자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이 뭔지 아세요?”
홍지혜의 물음에 민정희가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진실을 보는 눈?”
“음.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함이라고 생각해요.”
“오호. 생각도 못 했네요. 성실함이라니.”
“왜요? 성실함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다만 작가는 성실하기만 해서는 곤란하지 않나요? 상상력이랄까, 예술이랄까. 그런 플러스알파가 추가되니까요.”
홍지혜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홍 본부장님 이야기를 들으니 그런 것 같네요. 사실 기자가 상상으로 기사를 쓰면 놀림을 받잖아요?”
“맞아요. 댓글로 ‘소설 쓰지 말라’거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는 비아냥은 정말 견디기 힘든 말이죠.”
어느덧 술자리 화제는 기사 쓰기와 소설 쓰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모두 자기 생각을 밝히며 뜨거운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민정희가 갑자기 생각났다며 소리쳤다.
“저기요!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요. 그거 언제 해요?”
“11월 중순이요. 그건 왜요?”
박창후의 물음에 민정희가 즉각 답했다.
“괜찮으면, 저도 제 사비로 따라가도 될까요?”
“응? 민 작가님도 거기에 간다고요?”
“네! 제가 지금 만드는 작품도 다큐멘터리 영화잖아요? 다큐멘터리는 제 전문이 아니라서 다른 작품들도 구경하면서 안목을 넓히고 싶어서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네? 제 돈 내고 따라가는 건데 그것도 안 되나요? 저는 여러분들 귀찮지 않게 혼자서 다닐게요.”
민정희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홍지혜와 김지인이 제발 부탁한다며 두 손을 모았다.
“사장님. 민 작가님이 가시는 건 개인의 자유잖아요. 왜 그러세요. 같이 가게 해 주세요.”
“네! 지인 씨 말이 맞아요. 저희에게 민 작가님이 암스테르담에 가는 걸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고는 입을 열었다.
“아뇨. 민 작가님 사비가 아니라 회삿돈으로 같이 가자고요. 민 작가님도 지금은 오프라인의 일원이잖아요. 아닌가요?”
내 말에 모두가 환호했다.
민정희는 살짝 눈물을 훔치며 고맙다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우 사장님.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박창후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고급스럽게 포장된 양주를 한 병 가져왔다.
로열 살루트 38년산.
금으로 된 라벨과 화강암 풍의 도자기 병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헤헤. 오늘 기분입니다. 이거 나중에 자식 낳아서 녀석이 결혼하면 주려고 아껴 놓은 건데, 그냥 오늘 따야겠네요. 지인아. 안주는 내가 만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