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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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 Amsterdam).

보통 줄여서 IDFA라 부르는 이 행사는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전 세계 최고 권위와 규모를 자랑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제이다.

10여 일간 진행되는 이 행사에서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관객들 그리고 업계 종사자와 전문가들이 한데 어우러져 자신들의 경험을 나눴다.

나와 백철웅 그리고 박창후와 홍지혜, 김지인과 민정희까지 여섯 명은 같은 비행기로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눈물 난다, 눈물 나.”

박창후가 수많은 인파로 몰린 영화관 로비에서 감격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좋아요?”

“당연하죠! 전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인의 성지라고요! 여긴!”

그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풍스럽게 생긴 영화관은 외부뿐 아니라 내부 역시 예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이들이 마치 펍(Pub)에 온 듯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영화제를 즐기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백철웅이 무언가 재미난 사실이 생각났다는 듯 내게 물었다.

“우 사장. IDFA를 어떻게 읽는지 아십니까?”

“이드파요?”

“헉! 그걸 어떻게. 난 지금까지 아이 디 에프 에이인 줄만 알았는데.”

백철웅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박창후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백 사장님. 저도 처음엔 그렇게 불렀어요.”

IDFA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표를 끊으러 갔던 홍지혜가 돌아왔다.

그녀는 영화제의 인기에 놀란 듯 이런 말을 던졌다.

“하마터면 표 못 구할뻔했어요.”

“정말요?”

“네. 이번 시간대는 제가 거의 마지막으로 구했고, 매진이에요.”

“와우. 과연 이드파네요.”

“그러게요. 한국에서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그리 인기가 없잖아요? 깜짝 놀랐어요.”

그녀의 말처럼 이곳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축제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저 다큐멘터리가 좋아서 모인 사람들.

“박 본부장님 작품은 중편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죠?”

“맞아요. 3천 편이 넘게 출품되었는데 그중 300여 편만 선정됐거든요. 그중에서도 총 15편이 노미네이트되었고 그중에 두 개가 제 작품이라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박창후의 표정에는 자신감과 뿌듯함 그리고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우리 모두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해 주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촬영했고, 편집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왔으니 이제 다큐멘터리를 보러 가 볼까요?”

같은 시각 다른 장소.

신이 나서 극장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2층 복도에서 누군가가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헤에. 유럽에 오셨다 이거지.”

카페 드 야렌(Cafe de Jaren).

암스테르담에 있는 수많은 카페 중에서도 운하에 바로 접해 있고 오랜 전통과 맛 좋은 음식으로 유명한 카페.

평소에는 자리를 잡기도 쉽지 않은 이곳은 IDFA 기간에는 다큐멘터리인들을 위한 쉼터로 변했다.

IDFA는 행사 기간 중 영화 상영 이외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그중에서도 카페 드 야렌과 같은 공간을 빌려 다큐멘터리인들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벤트가 열렸던 것이다.

박창후는 홍지혜의 도움을 받아 세계 각지에서 온 다큐멘터리 감독,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님이 만든 아덴만 여명 작전 잘 보았습니다. 실제 전장에 선 기분은 어땠나요?”

자신을 독일에서 온 다큐멘터리 감독이라 소개한 남성의 물음에 박창후는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적들이 쏘는 총알이 언제 제 옆을 스칠지 알 수 없었죠. 그럼에도 카메라를 놓을 순 없었습니다. 저는 단지 영상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찍고 있었으니까요.”

박창후의 말에 그를 둘러싼 이들이 감탄사를 뱉더니 박수를 쳤다.

박창후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여러분들 모두 같은 상황이라면 저와 같은 행동을 하셨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다큐멘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와!!”

김지인이 그런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휴. 허세는.”

“하하. 그래도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박 본부장님이 열심히 하셨죠.”

“현장에 우 사장님도 계시고, 이 이사님이나 안 본부장님도 계셨잖아요. 혼자서 다 찍은 것처럼 저러네요.”

“촬영은 박 본부장님 혼자서 찍은 게 맞죠.”

내 말에 김지인은 좋은 듯 싫은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박창후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어때요? 집에서는 지인 씨에게 잘해 줘요?”

“네? 뭘요?”

“두 분 결혼식 때 박 본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지인 씨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게 해 주겠다고요.”

“아! 헤헤. 네. 맞아요. 오빠가 정말 잘 챙겨 줘요. 제가 고집부리는 게 많은데 다 들어주고요.”

“박 본부장님이 말을 저렇게 해도 로맨티스트라는 사실은 알 만한 분들은 다 아니까요.”

그 말에 백철웅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저번에 퇴근할 때 보니까 장미 꽃다발을 차에서 꺼내 지인 씨한테 주던데요.”

“앗! 백 사장님! 그거 언제 보셨어요?”

“퇴근길에 지하 주차장에서 차 빼려고 가면서 봤죠.”

“아 부끄럽네요.”

“박 본부장이 차에서 꽃다발을 턱! 꺼내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지인 씨에게 주더군요.”

“꺄아! 어떡해!”

“하하. 덕분에 저도 그날 퇴근하면서 아내에게 꽃 한 송이를 사다 바쳤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더군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이.

박창후의 주위에는 더 많은 이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의 작품은 IDFA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었다.

“저게 지금 관객 투표 평점 순위인 거죠?”

김지인이 카페 천장에 달린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실시간으로 집계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TV에는 IDFA에 출품된 작품 중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10개의 작품이 노출되고 있었다.

박창후가 찍은 아덴만 여명 작전이 3위, 일본 대지진 도쿄 현장에 대한 다큐는 9위에 머물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 오빠가 수상한다면 그게 어느 정도의 의미일까요?”

김지인이 TV를 빤히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백철웅이 팔짱을 끼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야기했다.

“일반적으로 베네치아, 칸, 베를린 영화제가 3대 영화제라 불리지만, 적어도 다큐멘터리 분야에서는 암스테르담 영화제가 최고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그의 말에 내가 동의를 표했다.

“맞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제로는 캐나다의 핫독 영화제, 일본의 야마가타 영화제 등과 함께 최고 권위를 인정받고 있죠.”

“우아! 대단하다! 만약 오빠가 이번에 수상하게 된다면 정말 가문의 영광일 거예요.”

“분위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재작년에는 박봉남 감독의 ‘아이언 크로우즈’가 중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작년에는 이성규 감독의 ‘오래된 인력거’가 장편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올해 박 본부장 외에 한국인 감독이 만든 작품이 하나 더 노미네이트되었다고 하던데?”

“아! 맞습니다. 이창범 감독의 ‘껍데기 속 이야기’라는 작품이 장편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있죠.”

“이야. 대한민국이 다큐멘터리에서도 이렇게 저력을 보이는군요. 미디어도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백철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백철웅이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그나저나 민 작가는 어디 갔어요? 낮부터 안 보이더니.”

“아. 민 작가님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싶다고 혼자 관람 중이세요. 연락 올 때가 되었는데 안 오네요.”

김지인의 말처럼 민정희는 많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다며 하루에도 다섯 편이 넘는 작품들을 몰아서 보고 있었다.

‘그래도 이 시간이면 보통 영화 보는 걸 끝내고 우리와 함께했는데 오늘따라 늦는걸.’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박창후의 통역을 전담하고 있던 홍지혜가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왔다.

“우 사장님! 큰일이에요!”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미…… 민 작가가!”

“응?”

홍지혜는 갑자기 주변을 살피더니 우리를 인적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서는 말했다.

“납치범에게 잡혔대요!”

“네? 납치범이요?!”

“여기 암스테르담에서요?”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납치범이라니.

그런 건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일 아니던가.

“그래서 지금 어디래요?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아뇨. 민 작가한테 문자가 왔는데, 절대로 경찰에 연락하지 말고 오늘 밤 11시까지 자기가 알려 주는 주소로 우 사장님 혼자만 나오래요.”

“네? 저 혼자만요?”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상한데.’

상대는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민 작가한테 다른 말은 없었고요?”

“네. 이 문자만 저한테 달랑 왔어요.”

홍지혜는 자신에게 온 민정희의 문자를 보여 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절대 경찰에 연락하지 말고 나 혼자 찾아오라는 문자가 적혀 있었다.

흥분한 박창후가 입을 열었다.

“뭔지는 몰라도 네덜란드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는 한국이 아니잖아요. 저희는 이곳 지리에 어둡습니다.”

하지만 백철웅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긴 한데, 우 사장을 딱 짚어서 나오라는 걸 보면 우리를 아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우 사장이 먼저 상대를 만나 보시죠. 우리도 근처에 있다가 급할 것 같으면 바로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네. 백 사장님. 저도 그게 좋을 것 같네요. 홍 본부장님. 지금 민 작가한테 연락해서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물어봐 주세요.”

“네! 지금 바로 문자할게요.”

곧바로 민정희에게서 다음과 같은 문자가 왔다.

“뭐야? 렘브란트의 집이라면 여기서 도보로 5분이면 갈 거리잖아?”

박창후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를 진정시킨 뒤 이야기했다.

“납치범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혼자 그쪽으로 갈 테니까 다른 분들은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괜찮습니다. 도보로 5분이니 뛰어가면 3분도 안 걸릴 겁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경찰에 연락해 주시고요. 무엇보다.”

“무엇보다?”

“여기나 거기나 모두 암스테르담의 중심가입니다. 상대가 민 작가를 해하려고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백철웅이 두 주먹을 마주쳤다.

“그렇군! 만약 상대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굳이 이쪽에서 보자고 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박창후의 표정에서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두 분 사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납득은 갑니다만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민 작가 데리고 금방 오겠습니다. 너무 걱정들 마세요.”

그렇게 이야기한 나는 서둘러 민정희가 말한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카페 드 야렌과 마찬가지로 2층까지 뚫려있는 높은 천정이 개방감을 주었다.

내가 주변을 살피자 익숙한 얼굴이 2층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우 사장님! 여기요! 여기!”

민정희였다.

그녀는 잔뜩 겁을 먹고 있었지만 차분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의 남자가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납치범이 아니었다면 같은 남자인 내가 보더라도 잘생겼다며 한 번쯤 돌아봤을지도 모를 미남.

‘누구지?’

분명 처음 보는 인물이었는데 상대는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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