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200)

나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난간을 통해 그쪽으로 이동했다.

둘의 앞에 선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으라는 듯 의자를 향해 손짓을 보냈다.

내가 앉자 그가 영어로 물었다.

“반갑습니다. 오프라인 우세진 사장님.”

그는 유독 오프라인이라는 부분을 강조하여 말했다.

나는 그를 바라본 채 나지막이 한국어로 물었다.

“민 작가님. 몸은 괜찮습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민정희의 말속에는 떨림과 안도, 두려움과 기대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누군지 알아요?”

“아뇨.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우리 둘이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자 상대 남성이 불만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요. 영어 못해요?”

그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민정희에게 말했다.

“아가씨. 통역 좀 부탁해요.”

민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음료를 한입 마시더니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방법이 다소 거칠었다면 사과드리죠.”

“됐고, 원하시는 게 뭐죠?”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단지 우 사장님을 만나 뵙고 싶었을 뿐입니다.”

“오해요? 저희 일행을 납치해 놓고서 한다는 말이 오해라고요?!”

“이런! 어떤 멍청한 납치범이 암스테르담 한가운데 위치한 카페에서 만나자고 할까요. 하하. 저쪽을 보세요.”

그는 유리창 넘어 한 집을 가리켰다.

“저기가 바로 바로크 시대 최고의 화가인 렘브란트의 집입니다. 네덜란드 최고의 관광명소죠. 납치요? 전혀 아닙니다.”

그는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와 민정희를 바라보았다.

“오케이. 그렇다고 해도 모르는 여성을 겁박해서 저를 여기로 부른 건 분명 범죄 행위입니다.”

“하하. 그런 건 범죄의 축에도 속하지 못하죠. 디도스 공격 정도는 돼야 범죄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디도스 공격이라니.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전에 오프라인에 건 디도스 공격은 바로 제가 한 겁니다. 메일도 보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디도스 공격도 디도스 공격이지만 신원미상의 자에게 온 이메일은 오프라인 내부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으니까.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에게 해고된 이탈리아 개발자?”

“이야! 그 이메일을 읽으셨군요!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저예요.”

그는 자신이 맞다며 크게 박수를 쳤다.

“그래서 도대체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그 말을 끝내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를 고용하세요.”

일순 정적이 흘렀다.

나와 민정희 모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상대 남성이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혹시 내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나요?”

“아뇨.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런 말이 없죠?”

“당황스러워서요.”

내 말에 상대는 씩 웃더니 소파에 깊게 몸을 눕혔다.

“놀랍게도 오프라인은 제 디도스 공격을 죄다 막아내더군요. 동남아랑 중국 쪽에서 감염된 수만 대의 PC로 공격을 했는데 말이죠.”

“치사한 수를 썼군요!”

민정희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하하. 원래 디도스 공격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개인 컴퓨터로는 정체를 들킬 뿐 아니라 상대 서버에 흠집조차 낼 수 없으니까요. 감염된 좀비 PC를 이용하는 거죠.”

“흥. 저희 오프라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이번엔 고용을 시켜 달라니, 그런 억지가 어딨죠?”

민정희는 자신이 오프라인의 대변인이 된 것처럼 상대를 쏘아붙였다.

상대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당신 말고, 우 사장이랑 이야기하고 싶은데.”

민정희가 바짝 약이 오른 얼굴로 내게 말했다.

“사장님이랑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네요.”

“네. 왜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은 건지 물어봐 주세요.”

민정희는 상대에게 내 질문을 전했다.

그러자 상대 남성이 허리를 기울여 내 쪽으로 몸을 빼고는 말했다.

“제 공격을 막은 게 신기해서 한번 샅샅이 뒤져 보았죠. 아니 이걸 어떻게 막은 거지? 그래서 사이트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이건 정말 걸작이더군요. 애플이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요.”

이덕오가 뛰어난 개발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는 잠자코 상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사이트를 다 찾아보고 결심했습니다. 이 회사에 들어가서 일하겠다고.”

민정희가 그 말을 전하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 약간 미친 거 같아요. 사이코패스 아니에요?”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고 말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첫째 디도스 공격으로 영업을 방해했습니다. 둘째 우리 회사 직원을 협박하고 납치를 시도했습니다.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당신을 고용할 이유가 있을까요?”

상대 남성은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 회사에 합류한다면 지금보다 개발력이 두 배는 오를 겁니다.”

그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만들어 보였다.

나 역시 그쪽으로 몸을 당기고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요? 그것 말고는 없나요?”

“으응? 저 한 사람의 합류로 개발력이 두, 두 배로 뛰는데 더 필요한 게 있나요?”

상대는 내 반응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하며 버벅거렸다.

“두 배라. 좋죠. 그런데 당신은 무례하고 거만하고, 또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에요. 오프라인이 글로벌을 지향하는 건 맞지만 직원 대다수는 한국인입니다. 당신은 한국어를 할 수 있나요?”

“그…… 그건.”

상대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그걸 떠나서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죠? 민정희 씨가 우리와 일행인지는 또 어찌 알았고요? 설마 우리를 염탐했나요?”

민정희는 오프라인의 정규직이 아니었다.

작가로서 이번 다큐멘터리 영화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로 고용된 몸.

민정희가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가세했다.

“맞아! 게다가 당신 이탈리아 사람이라면서 여기 암스테르담에는 무슨 일로 온 거죠?”

나와 민정희의 공세에 상황은 역전되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거만한 태도로 이야기하던 상대는 자세를 바로잡더니 목소리 톤을 낮췄다.

“사이트를 살펴보다가 영상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이번 IDFA 행사에 초청받았다는 정보를 보았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이쪽으로 오겠다 싶어서 와 보았죠.”

“그저 그 정보 하나만으로?”

“네. 사실 앞에 있는 여자분은 누군지 잘 모릅니다. 단지 영화관에서 당신들과 함께 있는 걸 보고 일행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러면 내 얼굴은 어떻게 알고?”

“왜 모르겠습니까. 광고도 찍으셨던데요? 유튜브에 다 있습니다.”

“그런.”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민정희가 화를 내며 따졌다.

“당신이 하는 짓이 스토킹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물론 우리 우 사장님이 좀 유명하긴 하죠. 그래도 그건 범죄입니다. 범죄라고요!”

“광고를 보는 게 범죄인가요.”

“아무튼 당신은 지금 아주 큰 일을 저질렀습니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언론사의 사장이에요. 이런 사람을 협박하다니!”

민정희는 계속해서 상대 남성을 향해 훈계를 날렸다.

상대는 아까와는 다르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는 민정희에게 혼이 나기 시작했다.

흡사 누나가 동생을 나무라는 모습.

‘재능에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순진한 건가.’

그를 천천히 관찰해 보니 의외로 눈빛이 무척이나 맑았고, 얼굴은 앳돼 보였다.

또한 어딘가 이덕오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커뮤니케이션이나 사고방식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잘만 키운다면…….’

* * *

“이 잘생긴 외국인은 누굽니까?”

카페 드 야렌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철웅이 내가 데리고 온 남성을 보고는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네? 이 자가 민 작가를 납치하고, 우리 회사에 디도스 공격을 한 사람이라고요?!”

모두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나와 외국인 남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남성의 이름은 마르코.

한국 나이로 올해 23살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어린 나이에 애플에 취직.

2년간 애플의 혁신에 공헌하였으나 대인 관계에 문제를 보이며 CEO인 잡스에 의해 해고되었다.

“나 원 참. 그래서 잡스한테 해고를 당해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는데, 우리가 잡스 부고를 제일 처음 올리고, 관련 기사를 다루니까 홧김에 디도스 공격을 감행했다고?”

박창후가 황당하다며 마르코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진짜 미남은 미남이네요. 이탈리아 남자들이 잘생겼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말 잘생겼어요! 와. 연예인 저리 가라다, 정말.”

김지인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마르코를 쳐다보자 박창후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면서 화를 냈다.

“지인아! 이 녀석은 범죄자야, 범죄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그냥 잘생겼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지!”

둘은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였다.

민정희가 이마에 손을 올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부부 싸움은 숙소 가서 하시고요. 그래서 이 남자를 어떻게 하실 거예요?”

민정희의 물음에 모두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장은 저도 뭐라고 답을 드리기가 어렵네요. 한국에 돌아가서 이덕오 이사나 다른 분들하고 상의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백 사장님은 어떠세요?”

내가 공을 백철웅에게 던지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나, 나는 잘 모르겠군요. 우 사장 말대로 한국에 돌아가서 의논해 봅시다. 크흠.”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르코를 바라보고 말했다.

“마르코. 네가 한 짓이 명백한 범죄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

“네, 네.”

그는 마치 순한 양이 된 것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프라인의 사장이기는 하지만 독단으로 너의 처우에 관해 결정하기는 어려워. 그러니까 한국에 돌아가서 우리 임원들하고 상의해 보고 연락할게. 이해했어?”

“네, 넵!”

“오케이. 그럼 여기에 네 연락처랑 이메일 주소 적어 주고.”

나는 스마트폰을 마르코에게 건넸다.

마르코가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는 모습을 보던 홍지혜가 내게 말했다.

“그런데 정말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그게 진짜 연락처인지도 불분명하고 잠적하면 끝일 텐데.”

마르코는 홍지혜가 한국어로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충 감으로 눈치를 챘는지 내 스마트폰에 저장된 자신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마르코가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홍지혜에게 믿어 달라는 눈빛으로 자신의 아이폰을 보여 주었다.

홍지혜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 그럼 다시 연락할 테니까 이쯤에서 헤어지자. 민정희 씨에게 다시 한번 제대로 사과하고.”

내 말에 마르코가 민정희를 바라보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허허. 다음부터는 조심해요.”

민정희는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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