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들린 듯 말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휴. 얼굴만 좀 덜 잘생겼어도…… 본성은 착한 거 같은데.”
마르코는 그렇게 몇 번이나 우리 쪽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멀어져 갔다.
백철웅이 내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우 사장. 생김새는 전혀 다르지만 느낌은 어째 우리 이 이사랑 조금 닮은 것 같지 않아요?”
* * *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쾌거!>
<껍데기 속 이야기와 아덴만 여명 작전……. 암스테르담 영화제 대상 수상!>
<암스테르담을 휩쓴 대한민국의 다큐멘터리>
IDFA 2011 종료 하루를 남기고 암스테르담에서 날아온 낭보에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장편 경쟁 부문에서는 시청각 장애를 딛고 10년간 사랑을 가꿔 온 한 부부의 삶을 기록한 ‘껍데기 속 이야기’가 대상을.
중편 경쟁 부문에서는 아덴만 여명 작전의 치열한 현장을 날것 그대로 기록한 ‘아덴만 여명 작전’이 대상을 수상.
장편과 중편 부문 모두 한국의 다큐멘터리가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시상대에 오른 박창후는 수상 소감을 묻자 이렇게 밝혔다.
“앞서 장편 부문에서 대상을 받으신 이창범 감독님을 비롯하여 한국의 수많은 독립 PD님들이 엄청나게 고생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수상을 제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계시는 한국의 모든 독립 PD님들에게 바칩니다.”
박창후는 오프라인이나 부인인 김지인에 대한 언급 없이 한참 동안 한국의 독립 PD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15분이 넘게 그의 말이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도중에 말을 자르는 이는 없었다.
잠시 뒤.
그의 말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자 시상식장 안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가 자리에 돌아오자 백철웅이 넌지시 물었다.
“독립 PD 일이 그렇게 많이 힘듭니까?”
“그럼요.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는 돈이 안 되니까요. 독립 PD들은 늘 배가 고픕니다. 힘들어요. 다들.”
“그렇군요. 고생했어요. 수상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아닙니다. 백 사장님. 정신이 없어서 오프라인과 두 분 사장님들께 감사 인사를 못 전했는데,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독립 PD는 그 이름처럼 방송국에 소속된 직원이 아니었다.
쥐꼬리만 한 제작비에, 적은 제작 인력, 그에 대비되는 큰 노동 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에 대한 열정만으로 버티는 이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찍은 촬영 원본에 대한 소유권이 방송사에 있다는 것이었다.
멋진 영상을 만들어서 높은 시청률이 나오거나, 해외 방송국에 재판매되거나, 광고를 받더라도 독립 PD에게 돌아가는 돈은 1원 한 푼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나와 박창후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IDFA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 누구나 초청받기를 원하는 꿈의 무대입니다. 지금도 제가 대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어두웠다.
“저는 HBS에 있을 때도 정규직이었지만 대다수 다큐멘터리 감독님들은 독립 PD라는 이름으로 방송사의 외주를 받아 일하고 있어요.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생하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제가 이런 상을 받아도 될는지…….”
“물론이죠. 박 본부장님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저는 물론 오프라인 직원들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괜한 죄책감 갖지 마세요.”
“그래도요. 그래서 수상 소감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 사장님.”
“뭐가요?”
“수상 소감에서 오프라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해서요. 제 불찰입니다.”
“뭘요. 이해합니다. 그나저나 박 본부장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국의 다큐 대다수가 지금 이렇다는 말이죠?”
“네. HBS는 물론 교육 방송이고 뭐고 죄다 말도 안 되는 제작비를 주고는 작품을 만들라고 하고 있죠.”
“그렇단 말이죠.”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박 본부장님.”
“네.”
“대상도 타셨겠다, 우리 이 문제로 한 건 더 해 볼까요?”
“하하. 저야 우 사장님이 하자고 하면 따를 뿐이죠. 뭔데요?”
“잠시 귀 좀.”
나는 그의 귀에 대고 한 가지 이야기를 건네주었다.
박창후의 두 눈이 토끼처럼 커지더니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 번졌다.
# 4장 아이러니
어느덧 계절은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었다.
12월 초.
찬바람에 사람들의 옷차림도 제법 두툼해졌다.
시동을 켜고 오래지 않아 히터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왔다.
“훈훈한 게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조수석에 탄 박창후가 히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에 손을 녹이며 말했다.
잔뜩 멋을 부린 그의 옷차림은 오늘 같은 날씨에는 많이 추워 보였다.
“폼생폼사라지만 안 추우세요?”
운전대를 잡은 안재영의 말에 박창후가 웃으며 답했다.
“그럼! 아니 실제로는 춥지만 그렇다고 후줄근하게 입고 갈 순 없잖아. 하하.”
차 안에는 네 명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
나와 백철웅 그리고 박창후와 안재영.
우리가 향하는 곳은 여의도에 위치한 HBS 본사였다.
“이번 수상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봐요. HBS에서 생방송 축하 무대를 다 마련하고요.”
“대단하다마다. IDFA는 전 세계 다큐멘터리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무대란 말이지. 거기에 대상이라니 지금도 안 믿긴다.”
백철웅도 한마디 거들었다.
“박 본부장. 대단합니다. 국민적 관심이 엄청나요. 그러니 HBS에서도 황금 시간대인 8시에 생방송으로 편성한 거 아닙니까?”
“에이 뭘요.”
“거기에 이창범 감독과 단둘이 나오니 이제 내일부터 박 본부장 얼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군요. 하하.”
그 말에 안재영이 박창후를 놀리듯 말했다.
“아닙니다. 백 사장님. 요즘은 황금 시간대라고 가족 모두가 텔레비전 앞에서 시청하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HBS는 뭔가 올드한 느낌이 있어서 젊은 사람들은 잘 안 봅니다.”
“하하. 그래도 뿌듯합니다. HBS에서도 인재를 놓쳤다며 아쉬워하지 않겠습니까.”
박창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안 그래도 어제 아는 선배한테 전화가 왔는데, 전 직장인 HBS에 대해 잘 좀 이야기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네. 그래야죠. 잘 이야기해 주세요.”
백철웅은 기분 좋은 듯 웃었지만 나와 박창후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안재영이 운전한 승용차는 HBS 본관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저는 주차하고 따라갈 테니까 먼저 내리세요.”
안재영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차에서 내렸다.
“휴. 여기 오랜만이네요.”
축하 무대를 앞두고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온 박창후가 HBS 본관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떠세요? 아쉽나요?”
“네? 뭐가 아쉬워요?”
“공기업인 HBS를 떠나서 오프라인에 온 거요.”
“그럴 리가요! 여기 있었으면 여전히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을 겁니다.”
“하하. 지인 씨도 못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백철웅의 말에 박창후도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지인이는 물론이고 백 사장님이고 우 사장님이고 다들 못 만나겠죠. 저는 여기 HBS를 떠난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 맞다!”
“응?”
“그러고 보니 우 사장님도 HBS 수석 합격하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가진 않았지만요.”
“흐흐. 거봐요! 우 사장님도 HBS에 갈 수 있었으면서 가지 않고 오프라인 만드시고는 왜 저한테는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농담입니다. 춥네요. 어서들 들어가시죠.”
출연자인 박창후는 관계자를 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HBS의 고위 관계자가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HBS 부사장 조승우입니다.”
그는 우리를 VIP 대기실로 직접 안내했다.
“지금 사장님이 외부 출장이셔서 제가 두 분을 맞이하는 점 이해 바랍니다.”
“뭘요. 부사장님 덕분에 편안합니다.”
같은 언론사 사장에 대한 배려였을까.
깔끔한 정장 차림의 조승우는 정중한 태도로 우리를 맞았다.
주차를 마친 안재영이 본관 안으로 들어서자 조승우가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백철웅과 조승우는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며 움직였다.
조승우는 뒤에 있는 나를 흘깃 보고는 말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올해 우 사장님의 연세를 알 수 있을까요?”
“올해 스물일곱입니다.”
“과연. 대단합니다. 이십 대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만 정말로 놀랍습니다. 제 작은아들도 우 사장님과 같은 나인데…….”
“뭐가 놀랍다는 말씀이시죠?”
나의 질문에 조승우는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우리가 VIP 대기실에 도착하자 조승우는 다른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네. 안내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그가 떠난 뒤.
백철웅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말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자기 아들뻘 되는 사람이 국내 최고 언론사 사장이라는 게 뭔가 어색해서 그랬을 테니.”
“네. 백 사장님.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럼 됐고요.”
HBS는 연공서열 중심의 조직이었다.
분명 20대의 언론사 사장이 낯설게 느껴졌으리라.
* * *
“안녕하세요, 슬아 씨. 요즘 SNS에는 이 이야기가 화제라면서요?”
“그럼요. 대한민국 영화계의 쾌거잖아요! 혹시 여러분은 저희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아시나요?”
두 명의 사회자가 만담을 주고받듯 이야기를 꺼내자 방청석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네!!”
남자는 국내 최고의 MC로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김제철.
여자는 국내 최고의 여배우이자 뭇 남성들의 워너원인 이슬아였다.
“모두들 오늘 행사가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아실 것 같고. 그럼 IDFA에 대한 소개부터 하는 게 맞겠죠?”
“네! IDFA는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약자로…….”
첫 순서는 IDFA에 대한 소개였다.
이어서 영화계의 거장들과 다큐멘터리 감독 등 동료들의 칭찬과 덕담이 릴레이 카메라 형식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안재영의 시선은 대형 TV가 아닌 무대 앞 여자 사회자인 이슬아에게 꽂혀 있었다.
HBS는 우리를 배려해 무대 바로 앞 공간에 오프라인 전용석을 두 자리 배치해 주었는데 덕분에 무대 앞이 무척이나 가까이 보였다.
“저기, 안 본부장님.”
“아 네. 우 사장님.”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 아닙니까?”
“아? 제가 그랬나요? 하하. 이슬아 씨가 너무 예뻐서요.”
물론 그의 말에 반박할 생각 따윈 없었다.
이슬아.
뛰어난 미모는 물론이고 연기력 또한 발군이라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재림이라는 찬사를 받는 그녀였다.
특히나 그녀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했다.
매일 나오는 찌라시에 이슬아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은 수년간 하나도 없을 정도였으니.
“나중에 끝나고 사인이라도 받지 그래요?”
“물론이죠. 우 사장님이 말 안 해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하하.”
나와 안재영이 이슬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은 흘러 드디어 오늘의 두 주인공인 이창범 감독과 박창후의 수상 소감이 발표될 때가 되었다.
먼저 이창범 감독이 무대에 섰다.
뜨거운 박수가 이어지고.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고는 목이 메는지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이창범입니다. 제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쓴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따뜻하고, 아름답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에 진심이 가득 담겨있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