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200)

이어서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뭣보다 한국에 돌아와서 여기저기서 축하해 주신다고 너무 정신이 없었는데요. 이제는 축하 말고 술을 먹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게 연락해 주시는 분들은 말로만 말고 술을 사 주십시오. 술이요!”

“아하하하.”

그의 말에 무대가 뒤집혔다.

영화를 만드는 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새삼 느껴지는 멘트였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가고.

드디어 박창후의 차례였다.

한껏 멋을 부린 박창후가 무대에 오르자 오프라인 전용석에서 터질 것과 같은 함성과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박창후! 박창후!”

“와아아아!!”

그러자 바로 앞에 있던 남성 사회자인 김제철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여기 앞에 군부대에서 나오셨나요?”

그 말을 이슬아가 재치있게 받아쳤다.

“저희 앞에는 박창후 감독님의 동료이신 언론사 오프라인 분들이 와계시는데요. 역시 기자답게 파이팅이 넘치십니다.”

그녀가 이쪽을 향해 손을 내밀자 카메라가 우리를 비췄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모두들 나를 따라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김제철이 웃으며 말했다.

“박창후 감독님은 회사에서도 정말 인기가 많으신가 보네요. 그런데 슬아 씨. 혹시 그거 아세요?”

“네? 어떤 것 말이죠?”

“박창후 감독님이 오프라인에 들어가기 전에는 바로 여기 HBS의 카메라 감독이었다는 사실 말이에요.”

“앗! 정말인가요? 박 감독님 그게 사실인가요?”

그녀가 박창후를 바라보며 묻자 박창후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네. 여기에서 몇 년 일했습니다.”

“어쩐지. 저도 박 감독님이 만드신 두 작품을 모두 보았는데요. 촬영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역시 연륜이 있으신 분이셨군요.”

이슬아의 말을 김제철이 받았다.

“그러게요. 오프라인 분들이 듣기에 조금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촬영에 있어서만큼은 HBS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말에 안재영을 비롯한 몇몇 직원들이 야유를 보냈다.

“우~~”

그러자 이슬아가 웃으며 말했다.

“호호. 앞에 계신 오프라인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그녀의 말에 어디선가 이쪽으로 마이크가 배달되었다.

안재영이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오프라인에서 취재 본부장을 맡고 있는 안재영이라고 합니다.”

“어머나! 엄청 젊으신 분 같은데 높으신 자리에 계시는군요!”

“네. 오프라인의 평균 나이가 20대거든요. 여기 HBS와는 많이 다르죠.”

“와. 정말 멋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재기발랄하고 신선한 뉴스를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아무튼, 박창후 본부장님은 HBS의 자식이 아니라 오프라인의 자식입니다.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안재영이 이슬아에게 가볍게 윙크를 날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슬아가 묘한 미소를 보이며 안재영을 바라보는 사이 김제철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화제를 바꿨다.

“자. 오프라인 동료 여러분들의 응원도 들어 보았고요. 이제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분인 박창후 감독님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겠죠? 박 감독님 수상 소감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스포트라이트가 박창후를 비추면서 주변이 어두워졌다.

박창후가 마이크를 잠시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여러분 그 누구의 자식도 아닙니다. 제 어머니 이선미 여사의 자식이죠.”

“하하하하.”

그의 농담에 무대는 웃음으로 가득 찼다.

“농담이고요. HBS와 오프라인 모두에 무척이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HBS는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출발점이고요. 오프라인은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현재입니다.”

한동안 HBS와 오프라인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던 박창후의 표정이 순간 돌변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가능할까요?”

그가 두 MC를 향해 양해를 구하자 두 MC 모두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그가 잠시 침을 삼키더니 목소리 톤을 한층 높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독립 PD는 죽어서도 가난합니다. 제작비는 20년 전보다 낮아졌는데,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이를 메꾸기 위해서는 결국 독립 PD의 노동 강도가 말도 안 되게 가혹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박창후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축하 공연장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방송사가 제시한 제작비로는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독립 PD가 힘겹게 정부 지원금을 확보하잖아요? 그럼 방송사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돈 내놓으라고요. 부유한 방송사가 가난한 제작사에 삥을 뜯는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HBS 측 관계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뿐입니까? 독립 PD들이 만든 영상에 대한 저작권과 소유권은 방송사가 가져갑니다. 자기가 찍은 영상으로 2차 콘텐츠를 만드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죠. 그런데도 방송사는 VOD 서비스나 광고 수주, 해외 판매 등으로 얻은 수익의 1원 한 푼 보태주지 않습니다. 여기 HBS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

갑자기 마이크가 꺼지더니 스포트라이트가 두 MC에게 넘어갔다.

카메라 역시 두 MC를 비추고 있었다.

두 MC는 당황한 가운데서도 준비된 멘트를 읊으며 방송을 진행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시간관계상 박 감독님의 수상 소감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흥겨운 축하 무대를 함께 보시죠!”

“네에! 국내 최고의 아이돌이죠? 뷰티걸스가 부릅니다. 아이러니! 박수로 맞아 주시죠!”

박수와 함께 아이돌들이 나오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무대에 울려 퍼졌다.

“아이러니~ 아이러니~ 인생은 아이러니야~♪”

정말로 아이러니한 현장이었다.

<왜 방송사는 독립 PD가 받는 정부 지원금을 떼어 가는가>

<방송사의 갑질……. 독립 PD들 “개선돼야 한다” 한목소리>

<독립 PD가 죽어간다……. 외주 시스템 개선 절실>

HBS의 축하 공연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준비했던 기사를 한꺼번에 게재했다.

박창후의 수상 소감이 생방송 중 갑자기 어색하게 끊긴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던 사람들도 우리가 낸 기사를 보고 사정을 이해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독립 PD들이 개고생해서 다큐멘터리가 나오는 줄 첨 앎…….>

<대한민국은 갑질의 나라인가?! 언제쯤 이 땅에서 이런 문제가 사라질지.>

<진짜 썩은 내 한번 오지네. 만든 사람은 죽어나는데 방송사만 살판났네!>

해당 기사는 다음 날까지 포털에서 많이 본 기사 1위에 올랐고 방송사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방송사를 제외한 다른 언론사에서도 관련 기사를 쏟아 냈다.

결국.

HBS를 비롯한 WBS와 DBS, 그리고 TBC 등 주요 방송사에서 단체로 사과문을 올리고 해당 관행을 개선하겠다는 성명을 냈다.

HBS의 사과문을 자세히 읽던 박창후는 만족스럽다는 듯 함박웃음을 보였다.

“새삼 오프라인의 파워를 느낍니다. 방송사에서 이렇게 빨리 백기 투항할 줄이야. 오랫동안 수많은 지적이 있었지만 전혀 고칠 생각이 없었거든요.”

“박 본부장님의 결심이 컸습니다. 박 본부장님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당당히 꺼내지 못했을 겁니다.”

“맞아요. 자기 밥그릇이 걸려 있는 일이잖아요. 누구도 못 할 일을 해내셨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안재영이 박창후를 두둔하고 나섰다.

하지만 백철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고. 어제부터 HBS 고위 인사들이 저한테 어찌나 전화를 해 대는지. 설마 우 사장은 이미 알고 있던 건 아니죠?”

“설마요. 저도 어제 박 본부장님이 무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능청스럽게 이야기하자 백철웅이 머리가 아픈 듯 고개를 저었다.

나와 박창후는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암스테르담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미리 박창후와 입을 맞추었지만 말이죠.’

처음에는 기사로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HBS에서 축하 무대를 마련해 준다고 하지 않던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안재영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백철웅에게 말했다.

“HBS의 자충수가 컸어요. 박 본부장님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갑자기 마이크를 껐으니까요. 시청자들도 도중에 갑자기 무슨 일이지 싶었을 거예요.”

“아니 생방송은 그렇다 치고 마치 미리 준비한 것처럼 관련 기사를 쏟아 내지 않았습니까?”

“HBS로서는 타이밍이 조금 안 좋았을 뿐입니다. 백 사장님도 IDFA 현장에서 박 본부장님의 수상 소감은 이미 듣지 않았습니까. 잘못된 관행이었어요. 문제를 제기하는 게 옳습니다.”

내 말에 백철웅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나는 백철웅을 달래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백 사장님도 속은 시원하지 않으셨습니까? 독립 PD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보라는 이야기도 하셨고요.”

“뭐 그렇지만……. 알겠습니다. 아무튼 일이 잘 풀렸으니 다행입니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나는 다른 안건을 꺼냈다.

“이건 이쯤 하면 될 것 같고. 이번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마르코 건입니다.”

마르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만큼 모두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홍지혜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는 이 사람의 채용에 대해 반대합니다. 범죄자입니다. 디도스 공격의 주범이고, 민 작가님을 납치하고 우 사장님을 협박한 인물이잖아요. 이런 사람을 회사에 채용하는 건 무척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론이었다.

범죄자를 신고하지 않고 회사에 채용하겠다니.

이번에는 안재영이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 사장님이 이 안건을 꺼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저는 그자가 무척 재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재능도 좋지만 범죄잖아요? 잡스가 그를 괜히 해고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의장은 그에게 한 번쯤은 기회를 줘 봐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과 범죄자는 절대 채용할 수 없겠다는 의견으로 팽팽히 갈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덕오가 손을 올렸다.

“제 개인적으로는. 마르코에게 관심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애플의 앱/웹 서비스를 개발한 사람이기도 하고 저희 홈페이지에 대해 자세한 분석을 내놓기도 했고요.”

“이 이사님! 디도스 공격으로 제일 불편하고 힘들었던 건 이 이사님이 아니셨던가요?”

“네. 홍 본부장님.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재미있었어요. 덕분에 저도 디도스 공격이나 보안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였고요.”

“그런…….”

홍지혜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파 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사람들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나 페이스북과 같은 일류 IT 기업들은 해커를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합니다.”

“네?”

홍지혜를 비롯한 반대파들이 눈을 크게 뜨며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해킹 공격에 대한 피해를 줄이려면 해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외부 수혈을 하는 거죠. 해커의 전문 기술을 파악해야 공격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으니.”

“우 사장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해커의 사고방식을 배우면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 그들이 어떤 공격 방식을 취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덕오가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최루리가 손을 들었다.

“다 좋은데, 그는 이탈리아 사람이잖아요? 이탈리아에 지국을 내실 계획은 아닌 것 같고. 그럼 만약 그를 채용한다면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언어는요? 물론 저나 몇몇은 영어로 그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주로 이 이사님을 비롯한 개발진들과 소통할 텐데 불편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이덕오를 바라보았다.

이덕오가 부끄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개발자는 코드로 소통하거든요.”

“코드요?”

“네. 굳이 말을 많이 섞을 필요 없어요. 코딩만으로도 이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걸 하고 싶은지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회사의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CTO인 이덕오가 저리 이야기하자 이제는 아무도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홍지혜와 최루리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는 사이.

납치 사건의 당사자였던 민정희가 쐐기를 박았다.

“저는 우 사장님과 이 이사님 의견에 찬성합니다. 괜찮은 친구였어요.”

“네? 괜찮았다고요?”

“네. 제 스타일이기도 하고…… 아무튼 저는 찬성합니다!”

이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프라인 내에서 가장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이덕오와 민정희가 마르코를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들 동의하신 것 같군요. 그를 당장 한국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영국에서 면접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영국이요?”

“네. 다음 주에 BBC와 가디언이 공동 주최하는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가 있잖아요? 그에게 런던으로 오라고 해서 면접을 보는 겁니다.”

“아! 맞아!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가 벌써 다음 주군요!”

최루리가 잊고 있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행사는 작년에 있었던 CNN의 깜짝 초대와는 다르게 주최 측에서 공식으로 초대한 건이었다.

“네. 최 본부장님에게 준비를 맡겼던 것 같은데, 진행에 차질 없죠?”

“물론이죠! 갑자기 말씀 주셔서 놀랐을 뿐이에요. 발표 자료랑 내용 정리해서 오늘 중에 공유드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