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00)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었다.

“네. 북한에서 저를 찾는다고 합니다.”

“북한에서요?”

이국대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의자 깊숙이 몸을 눕히고는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국정원 보고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고…….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요?”

“죄송하지만 정보원은 밝힐 수 없습니다.”

“크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북한에서 우 사장을 보자고 하는 사람은?”

“김정일의 첫째 딸인 김설송입니다.”

“김설송?!”

이국대는 있을 수 없다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북한의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입니다. 그런 그녀가 왜?”

“그녀가 누군지 알고 계시는군요. 사실 저도 그녀가 왜 저를 찾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단지?”

“무언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보통 일이 아니다라…….”

그는 한 손가락으로 나무로 된 의자의 팔걸이를 계속하여 두드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평소보다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의 요구는요?”

“없습니다. 그저 저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확실한 정보입니까?”

“네. 출처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껄껄. 접선지나 시간,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없이 무작정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를 무시하는 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대통령님이 잘 처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국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이동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좋습니다. 재임 기간 내내 북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좀 바꿀 수 있다면 좋은 기회겠죠.”

“대통령님.”

“우 사장을 지금 이 시각으로 비공개 대북 특사로 임명하겠습니다. 북한에 이야기하고 서울 공항에 비행기 띄울 테니 지금 당장 다녀오십시오.”

이후 일정은 일사천리였다.

청와대에서 곧바로 성남에 위치한 서울 공항에 도착한 나는 준비된 전세기에 올랐다.

시계를 보자 겨우 오후 9시 15분에 불과했다.

‘대통령을 5시 45분쯤 보았는데 놀라운 속도로군.’

이국대의 빠른 결정도 결정이지만 더 놀라운 건 북한이었다.

청와대가 북한에 연락을 하자마자 비공개 대북 특사를 수락했다는 것 아닌가.

마치 준비하고 있으니 어서 오라는 듯.

자리에 앉으니 검은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국정원 2차장인 손성택입니다.”

“오프라인 사장 우세진입니다.”

“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무척 젊으시군요.”

그는 내 옆자리에 앉더니 철제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북한 김일성 집안의 가계도입니다.”

그의 말대로 서류에는 북한 최고 지도자의 가계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김일성에서부터 김여정까지.

이름과 나이, 지위, 취미에서부터 사소한 말버릇까지.

“이걸 주시는 이유가 뭐죠?”

“도착하기 전에 미리 숙지하는 게 좋을 겁니다. 괜히 실수해서 북한에 억류되고 싶지 않다면.”

김설송이 직접 불러 가는 길이었다.

그들이 나를 붙잡아 억류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새삼 손성택의 말을 들으니 지금 내가 가는 곳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비밀에 휩싸인 국가인 북한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후후. 혹시나 제가 억류되면 차장님께서 저를 구하러 와 주십니까?”

내가 농담을 던지자 손성택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하하.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옵니까. 보통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놀랍군요.”

“농담입니다. 별 탈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물론이죠. 우 사장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일촉즉발인 지금의 남북 관계가 더욱 험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현재 좋지 않은 상황이기도 하고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손성택은 끊임없이 내게 강조했다.

부디 조심하라고.

저 멀리 평양 공항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 5장 평양

평양 순안 국제공항은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로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손성택은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은 채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 반복했다.

한 계단 한 계단.

비행기에서 내려갈수록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군인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30대로 보이는 우람한 체격의 남성은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노려보았다.

카키색 군복을 입은 그는 내가 활주로에 발을 딛고 나서야 손에 들고 있던 검은 우산을 펼쳐 나를 씌워 주었다.

“우세진 동지닙까?”

억센 북한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래 김금철이라고 합네다.”

“우세진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공항 안으로 나를 묵묵히 이끌었다.

그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 주변을 살폈다.

바둑판 모양의 흰색 금이 그려진 활주로에는 고려 항공 비행기 3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뿐인가.

눈앞에 보이는 건 조그마한 임시 건물 한 채가 전부였다.

손성택에게 현재 신청사가 공사 중이라 임시 청사만 설치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외 주변은 그야말로 허허벌판.

‘과연 이곳이 북한 최대의 국제공항이 맞나 싶을 정도로군.’

입국 검사실을 통과하자 정면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커다랗게 보였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얼굴.

내가 사진을 조용히 응시하자 그제야 김금철이 입을 열었다.

“바쁩네다. 날래날래 움직이시라우.”

그가 멈춘 곳은 삼엄한 경비 속에 주차된 한 고급 리무진 앞.

80년대에 출시된 것으로 보이는 클래식 벤츠 차량의 은색 철제 로고가 날카롭게 빛났다.

“여기에 타면 됩니까?”

내가 묻자 김금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친절히 차 문을 열어 주더니 어서 타라는 손짓을 했다.

차 안으로 들어서자 강한 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가 탄 방향의 반대쪽에서 나는 냄새였다.

나는 그녀가 김설송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혹시 김설소…….”

그녀는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에 입을 맞추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막한 벤츠를 타고 얼마나 갔을까.

동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두웠던 허허벌판을 지나니 빛을 내뿜는 고층 빌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아 보이는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김설송이 손수 차 문을 열더니 내게 내리라는 눈빛을 보냈다.

겨울비 내리는 늦은 저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길을 지나는 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저 멀리 김정일과 김정은의 초상화가 걸린 곳만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을 뿐.

멍하니 서 있는 내게 김설송이 재촉했다.

“뭐 합네까. 날래 따라오지 않고.”

김설송의 뒤를 쫓아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내 뒤로 두 명의 건장한 남성이 붙었다.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곳이 지구가 아닌 다른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땡.

빠르게 움직이던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최고층인 45층에서 멈췄다.

두 명의 남성은 정지된 시간 안에 굳어 버린 듯 엘리베이터에서 가만히 있더니 더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디지털 도어록으로 문을 연 김설송은 집안으로 나를 들여보냈다.

“왜요? 숫자 찍는 자동문 처음 봅네까?”

“아, 아닙니다.”

그녀의 말처럼 북한에서도 디지털 도어록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여기가 대체 어딘지 궁금했다.

그녀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가 대동강입네다. 평양의 젖줄이지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희미한 가로수 등 아래로 대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게 보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는 어딥니까?”

“내 집이지 어딥네까? 하하. 생각보다 우세진 동무 얼빤합네다.”

“어, 얼빤이요?”

“아. 남조선말로 어리벙벙하다는 뜻입네다.”

조금 억울했지만, 손성택이 재차 조심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략 40살 정도 되었을까.

짙은 네이비 블루 색상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보름달처럼 둥그런 얼굴과 풍만한 체형의 소유자였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김설송은 고개를 홱 돌리며 이야기했다.

“뭘 그렇게 빤히 결혼한 에미나이의 몸을 쳐다보는 겝니까. 어림없습네다!”

나는 지지 않고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물었다.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도 평양으로 부르면서까지요.”

“후후. 수정하갔습니다. 다시 보니 의사스럽습네다.”

“의사?”

“아. 의젓하다는 말입네다. 같은 동포인데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구만요.”

그녀는 소파에 앉으라는 듯 내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와인 한 병과 와인잔 두 개를 가져왔다.

“드시라우. 설마 우림술(과일주) 못 먹는 건 아넵니까?”

“아뇨. 좋아합니다.”

“다행입네다.”

그녀는 내게 와인을 한 잔 따르고는 여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세진 동무를 부른 까닭을 압네까?”

“모릅니다.”

“하하. 모르고도 그냥 온 겁네까?”

“네. 다만.”

“다만?”

“무언가 엄청난 일이 있을 것 같다는 기자로서의 직감이 있었죠.”

“기자의 직감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닙네다.”

그녀는 거실 한가운데 있는 컴퓨터를 켜더니 내게 그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녀의 컴퓨터는 놀랍게도 애플의 아이맥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애플의 최신 컴퓨터라니.’

새삼 그녀의 높은 지위와 함께 뛰어난 IT 실력을 엿볼 수 있었다.

“아이맥이군요.”

“호호. 아시는구만요. 내래 미제(美帝)는 싫어합니다만 잡스는 좋아했습네다. 그 양반 그렇게 일찍 갈 줄 몰랐는데……. 아쉬운 사람입네다.”

“그래서 저한테 뭘 보여 주시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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