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절대 안 됩니다. 모든 질문은 다 그렇게 뻔하고 평범한 것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계속 그렇게 분수없이 놀아 댈 겁니까!”
“아뇨. 저도 그건 양보할 수 없습니다.”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지고.
결국, 승자는 내 쪽이었다.
김설송은 체념한 듯 말했다.
“김정일 동지께서 마음이 바뀌면 인터뷰는커녕 목이 날아갈 수도 있습네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기자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입니다.”
“기자라……. 알겠습네다. 내래 김정일 동지를 잘 설득해 보겠습네다.”
“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이틀 만에 내가 만든 10개의 질문과 김설송이 부탁한 2개의 질문을 합쳐 총 12개의 사전 질문이 완성되었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재미있을 것 같다며 빨리하자고 하시는데……. 언제가 좋겠습네까?”
“저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마침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로 빠졌던 저희 직원들도 한국으로 모두 돌아온 것 같고요.”
“좋습네다. 내래 빠른 시간 내에 잡아 보겠습네다.”
그렇게 어디론가 전화를 건 김설송은 밝은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일 낮 오후 2시. 조선 중앙 방송에서 찍기로 했습네다.”
“내일 낮이요?”
“네. 빠를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습네까.”
“아 네.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잡힐 줄은 몰랐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았습네까. 더 늦어져서 좋을 것 없습네다.”
“김설송 동지는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도 인정한 백두 혈통입네다! 방송국 일정 따위는 일도 아닙네다.”
신복남이 자신의 부인인 김설송을 자랑하며 나섰다.
나는 이 기회를 틈타 불쑥 요구 사항을 하나 말했다.
“그렇다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이요?”
“네. 평양 시내를 구경하고 싶습니다.”
내가 말을 끝내자 김설송 부부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양 공항에 내려 김설송의 집에 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갔지만, 그녀의 집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그저 창밖으로 콩알만큼 작은 차량과 사람들이 오가는 걸 지켜볼 뿐.
“답답해서 그렇습네까?”
“아뇨. 명색이 기자입니다. 북한의 모습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습니다.”
“여기 저희 집에서 보면 될 거 아닙네까. 북한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좋은 아파트입네다.”
“저는 북한의 사람들과 북한의 거리가 궁금한 겁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거 말고요.”
내가 세게 나오자 이번에는 신복남이 말을 꺼냈다.
“동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북조선 내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입네다. 남조선 측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네까?”
사실이었다.
이국대 대통령은 나를 대북특사에 지명했지만, 그 앞에는 ‘비공식’이라는 수식어가 달려있었다.
정부는 물론이고 오프라인과 나 개인적으로도 어디에도 알리지 않았다.
“인터뷰만으로도 파격입네다. 거기에 생방송까지. 그 이상의 요구는 무리입네다!”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탁했다.
“직접 걸어 다니지 않아도 좋습니다. 처음 여기 왔을 때처럼 차를 타고 평양 시내를 볼 수는 없겠습니까?”
“차로?”
“네. 평양까지 왔는데 아파트에서만 있었다고 하면 평생 놀림거리가 될 겁니다.”
나의 간곡한 부탁에 김설송과 신복남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안방으로 들어가 상의를 하는 것 같더니 다시 거실로 나왔다.
김설송이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좋습네다. 지금 제 차를 타고 딱 1시간만 평양 시내를 함께 봅세다.”
“고맙습니다! 설송 씨!”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설송 씨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어떻게 호칭을 부르면 좋을지 몰라 별다른 호칭 없이 말을 꺼냈었는데 말이다.
내 말을 들은 김설송이 뭐가 그리 웃기는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설송 씨라.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호칭입네다. 아하하하.”
그녀는 한참을 웃다가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덕분에 간만에 웃었습네다. 좋습네다. 가십세다.”
그녀는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집 밖으로 나섰다.
나는 신복남과 함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복도로 나오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았던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일주일만의 탈출이었다.
* * *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오자 두 명의 남성이 다시 내 뒤로 붙었다.
그들은 나와 김설송 부부가 차를 탈 때까지 따라오더니 모두 차에 오르자 움직임을 멈췄다.
“저들은 뭐 하는 이들입니까?”
“경호원입네다. 아파트 안에서 우리 부부를 경호하는.”
“앞에 계신 분도 경호 목적인가요?”
내가 가리킨 조수석에는 낯익은 인물이 앉아 있었다.
바로 평양 방문 첫날 만났던 김금철이었다.
“그는 국가 보위성 소속의 중좌입니다. 동기들 중 가장 빨리 중좌를 달았습네다.”
“그렇군요. 눈매가 보통이 아니라서 기억에 남습니다.”
“하하. 우세진 동무 같은 사람은 그에게 한 입 거리도 안 될 겁네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다 그랬죠?”
“네.”
그녀는 창밖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평양의 중심지인 창전 거리입네다. 올해 재개발 공사를 끝낸 최첨단의 거리로 고층 아파트와 식당, 극장 등이 몰려 있습네다.”
“45층짜리 아파트가 여기 말고도 또 있습니까?”
“창전거리에는 몇 개 더 있습네다만, 그 외에는 없습네다.”
“저 앞에 보이는 거대한 동상이 있는 곳은 어딥니까?”
“아. 만수대 언덕입네다.”
그녀는 그쪽으로 차를 움직이라고 지시하더니 내게 평양 시내 곳곳을 소개해 주었다.
길을 따라 만수대 언덕을 시작으로 조선 혁명 박물관과 모란봉 극장, 옥류 호텔 등이 차례로 소개되었다.
근처를 가볍게 한 바퀴 돈 차량은 유턴하더니 다시 아파트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동강 강변에 붙어 있는 특이하게 생긴 한옥을 가리키더니 다른 곳을 소개할 때보다 더 높은 톤으로 말했다.
“저기가 평양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입네다. 남조선의 두 대통령도 저기서 식사를 하셨습네다!”
“아! 저기가 그 유명한 옥류관이로군요.”
“우세진 동무는 냉면 좋아합네까?”
“네. 즐겨 먹습니다.”
“그래요. 그럼 저녁 시간도 다 되어 가는데 잠깐 들렀다 갑세다.”
그녀는 기사에게 옥류관으로 들어가자고 손짓했다.
한옥 모양을 한 옥류관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식당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엄청 크군요.”
“본관 좌석만 천 석이 넘습네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지시로 만들어진 식당입네다. 북조선 최고의 식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네다.”
그녀의 얼굴에는 옥류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나 역시 그녀의 자부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옥류관은 평양 냉면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죽기 전에 반드시 가 봐야 할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가기 어렵다는 성지에 직접 와 있다는 사실에 벅찬 감격이 몰려왔다.
한쪽 테이블에 앉은 나와 김설송 부부 그리고 김금철은 모두 평양 냉면을 주문했다.
신복남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일단 소주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기다리는 게 평양 냉면을 즐기는 첫 번째 단계입네다. 김금철 동지도 술 괜찮죠?”
김금철이 주변을 살짝 둘러보더니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신복남이 시킨 소주가 나왔다.
하얀색 병에 붉은색으로 ‘평양주’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김정일 동지께서 조선의 국주라고 일컫는 술입네다. 맛이 좋을 겝네다.”
넷이 가볍게 건배를 하고 술을 들이켜는데.
고급 위스키를 마실 때처럼 부드러운 향이 코끝을 스치더니 목 넘김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좋은데요?”
“그렇습네까?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네다.”
그렇게 석 잔 정도가 빈속에 들어갔을 무렵.
학수고대하던 옥류관 평양 냉면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이 얼마나 기대하는 순간이란 말인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젓가락을 들고는 첫 면을 뜨려고 했다.
순간 김설송이 외쳤다.
“잠깐!!”
김설송은 냉면을 먹으려는 나를 저지시키더니 고개를 저었다.
“옥류관 냉면은 그래 먹는 게 아닙네다.”
“그럼?”
“이걸 보십시오.”
그녀는 면 위에 올려진 계란 지단과 오이 그리고 고기를 그릇 한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던 가두배추(양배추)김치를 반대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고명 아래 감춰져 있던 짙은 갈색빛 면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면을 집어 올리십소.”
그녀의 말을 따라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어 올렸더니 그녀는 면에다 식초를 살짝 뿌렸다.
면을 타고 조르르 흘러내린 식초가 육수 속으로 퍼져 나갔다.
시큼한 향이 그릇 가득 올라왔다.
그녀는 이제 먹어도 괜찮다는 듯 내게 손짓했다.
‘별 이상한 방법이 다 있군.’
속으로 그리 생각한 내가 면을 한입 베어 문 순간.
면이 아닌 젤리를 씹은 것처럼 쫄깃한 식감이 전해지더니.
이윽고 입안에서 천국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단맛과 짠맛이 함께 올라오더니 곧이어 신맛이 혀를 강타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가두배추김치의 은근한 매운맛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아우. 이거 참…….”
자신들은 냉면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셋은 나의 반응을 보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복남이 신이 나서는 이야기했다.
“역시! 우세진 동무는 평양 냉면을 먹을 줄 아는 남자로구만!”
“정말 엄청나네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후후. 그렇지요? 100% 메밀입네다.”
“100%요? 그게 가능한가요? 이런 식감이 나오지 않을 텐데.”
“그게 다 옥류관의 비법 아니겠습네까. 자. 그 감흥이 식기 전에 어여 더 드십시오.”
김설송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젓가락을 움직인 나는 꿩고기를 한 입 집어서 면과 함께 입안으로 넣었다.
고소한 꿩고기와 쫄깃한 메밀면의 조화가 놀라웠다.
국물은 또 어떠한가.
여러 가지 맛을 한 그릇에 섞은 듯 새콤달콤한 맛이 입속에서 축포를 터뜨렸다.
육수를 한 모금 마신 나는 냉면 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물었다.
“육수를 맛보니 한 가지 고기로 우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오! 정확합네다. 우세진 동무 음식에도 일가견이 있습네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평양 냉면은 즐겨 먹는 편이거든요.”
“꿩고기에 닭고기 그리고 쇠고기와 돼지고기, 잘 익은 동치미 국물을 섞어서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비율이나 정확히 뭐가 들어가는 건지는 아무도 모릅네다.”
“맞습네다. 평양에도 이곳의 맛을 따라 하려는 식당은 많습네다만, 옥류관과 같은 맛을 내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네다.”
“정말 정말 맛있습니다. 혹시 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