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슬아 씨랑 사귑니다.”
“진짜?”
“네. 그때 HBS 축하 무대에서 눈이 맞아서…….”
어쩐지 당시 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다른 사람 같았으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따졌을 테지만.
상대는 국내 굴지의 재벌가 자제에 얼굴 잘생기고 실력 좋은 기자가 아니던가.
대학 시절에도 여자가 끊이지 않던 녀석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그래서 제가 북한에서 돌아왔을 때 홍 본부장이랑 둘이서 MC로 나온 건가요?”
“네. 원래 계획은 홍 본부장님만 사회를 보는 거였어요.”
“그래요?”
“국민적으로 엄청나게 관심이 집중된 이슈였잖아요. 홍 본부장님만 나서기에는 뭔가 아쉬워서 제가 혹시나 하고 물어봤죠. 둘이 함께 보겠느냐고.”
“그래서?”
“흔쾌히 동의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급하게 더블 MC로 바뀐 거예요. 태극기 색상처럼 빨간색, 파란색 원피스를 입자는 것도 슬아 씨 아이디어고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둘 다 청와대에서 섭외한 인사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궁금한 사항에 관해 물었다.
“그렇지만 단순히 연인 관계라고 해서 독립 영화에 출연하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물론이죠. 단순히 저 때문에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우선, 박 본부장님의 기개에 반했다고 하더라고요.”
“기개?”
“네. 생방송 중에 전 직장이기도 하던 HBS를 비롯한 주요 방송사에 대해 작정하고 비판하던 모습이 멋져 보였다고요.”
“그건 인정. 남자인 제가 봐도 멋졌죠.”
“맞아요. 그리고 두 번째는 작품 취지가 너무 좋대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가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 무척 매력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진짜 고마운 일이네요. 작품 흥행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박 본부장님한테도 이야기했나요?”
“물론이죠. 가장 먼저 이야기했어요.”
“뭐라던가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던데요?”
“하하. 그럴만하죠. 이슬아라니. 정말 엄청난 지원군을 얻었습니다.”
“네. 그런데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주요 배역들은 민 작가가 생각해 둔 캐릭터가 있어선지.”
“이런. 카메오 출연이군요?”
“네. 본인은 아쉬워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감독이랑 작가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맞습니다. 작품을 지휘하는 건 그 둘이니까요. 아무튼 이슬아 씨한테는 고맙다는 이야기 꼭 좀 전해 주세요. 아 참. 두 분 사귀는 것도 축하드리고요.”
“감사합니다. 우 사장님. 다음에 기회 되면 소개해 드릴게요.”
그리고 그날은 그리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최근 영화 촬영을 끝마친 이슬아가 작품 홍보를 위해 오프라인에 들른 것이다.
안재영과 이슬아가 사귀는 것은 아직 비공개였으므로 둘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오프라인 사무실을 누볐다.
이미 두 번이나 본 터였지만 이슬아의 미모는 하늘에 사는 여신이 현세에 재림한 것 같았다.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뭔지 모를 후광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되는.
“와!! 이슬아다! 여신 이슬아가 회사에 왔어!”
“실물로 보니까 장난 아니네. 쩐다, 쩔어!”
“슬아 씨! 여기 사인 좀 부탁드려요!”
오프라인은 갑작스러운 이슬아의 출연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모두가 그녀와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기 위해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분주히 움직였다.
연예인들은 종종 언론사에 들러 이렇게 한 바퀴 투어를 하곤 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기자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좋은 기사를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덕분에 메이저 언론사에서는 종종 연예인들은 물론 정치인 같은 유명인들이 방문하였다.
하지만 전체 기사 중 연예 기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오프라인에서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연예인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연예 기사는 대중의 관심에 비해 그다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고, 자극적인 기사가 될 확률이 높으니 가급적 기사화하지 말라는 내 영향이 컸지만.’
그러던 차에 국내 최고의 여배우인 이슬아의 등장은 모두를 흥분케 하기 충분했던 것이다.
이슬아는 오프라인 사무실을 한 바퀴 돈 다음.
나와 몇몇 본부장들과 함께 백철웅의 집무실을 방문하였다.
백철웅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슬아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슬아 씨. 엄청난 셀럽이 방문해 주신 덕분에 저희 직원들도 정말 다들 좋아하네요. 물론 저 역시 영광이고요. 하하.”
“뭘요. 한국 최고의 언론사인 오프라인의 기자님들에게 제가 잘 부탁드리죠. 그런데 엄청난 셀럽이라면, 저보다 더 유명한 분이 오프라인에 계시잖아요?”
“네? 그게 무슨?”
“여기 우 사장님이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요즘 가장 핫한 분 아니신가요?”
이슬아는 나를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일개 기자고 슬아 씨는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연예인인걸요. 제게 주어지는 관심과 슬아 씨에게 주어지는 관심은 그 성격이나 영향력이 많이 다릅니다.”
내 말에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듯 턱에 손을 대더니 이내 활기차게 답했다.
“그렇지만 기자나 기사도 결국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살지 않나요? 대중의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기사라도 읽히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그녀가 언론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장난이에요. 요즘 재영 씨랑 함께 미디어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언론에 대해 아는 척해 봤습니다.”
“아닙니다. 새삼 슬아 씨의 언론관에 감탄하게 되는군요. 그나저나 오늘 오프라인은 어떠셨나요?”
“놀랐어요. 사무실도 좋고, 모두 엄청 젊고 패기가 넘치시던데요? 제가 언론사에 자주 방문하는데 이렇게 젊고 열정 넘치는 기자님들로 꽉 찬 집단은 처음이었어요.”
“그렇죠? 고려 일보만 해도 평균 나이가 40대 이상인데, 여긴 20대니까요.”
안재영의 말처럼 최근 언론사는 갈수록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참 기자들은 자리에서 나갈 생각 없이 버티고 있는데 신규 인력 채용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철웅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대부분 언론사에서 가장 많은 연령대가 50대 이상이니까요. 반면 30대 이하는 가장 적은 기형적인 역피라미드 구조죠.”
“한국 언론사의 고질적인 문제죠. 윗선은 적체되고 아래는 들어오지 않으니.”
“저도 50대이긴 합니다만. 나이 든 조직은 병들기 마련입니다. 변화를 거부하고 예전의 관성을 고집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가 오프라인을 좋아하나 봐요. 박 본부장님도 우 사장님도요.”
이슬아가 환히 웃으며 말하자 안재영이 괜히 심술이 난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중얼거렸다.
“흥. 남자친구는 안 좋아하시고요?”
“어머! 안재영 씨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제가 다른 분들에게 잘 보여야 그분들이 안재영 씨를 예뻐라 해 줄 텐데 말이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공주님. 오늘 저녁은 좋은 곳으로 모시지요.”
모두 안재영과 이슬아의 넉살에 웃음을 보였다.
이슬아는 국민 여배우라는 칭호와는 무관하게 무척이나 털털하고 격의 없는 사람이었다.
예쁜 데에다가 성격도 좋으니.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 *
마르코의 합류 이후 오프라인의 홈페이지는 이전보다 훨씬 심플해졌다.
반면 개별 기사 화면은 날로 화려해졌다.
마우스를 올리면 화면이 동적으로 변하면서, 다양한 인포그래픽과 애니메이션이 나와 기사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외신들은 한국 언론사 오프라인의 깔끔한 UI를 보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탁월한 UI……. 언론사 홈페이지 디자인의 미래를 제시하다>
뉴욕 타임스 기사가 나간 이후 나는 이덕오를 내 방으로 불렀다.
“어때? 마르코 녀석 쓸 만해?”
나의 물음에 이덕오가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이지 뛰어납니다. 코딩뿐만 아니라 퍼블리싱까지 잘해요!”
“퍼블리싱이면 웹디자인까지 잘한다는 의민가?”
“그렇죠. 지금 홈페이지 UI/UX는 전부 마르코 작품이에요.”
“뉴욕 타임스에서도 언론사 홈페이지 디자인의 미래라고 칭찬하더군.”
“네. 저도 봤어요. 저나 마르코나 둘 다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 수 있을지 매일매일 많은 의견을 주고받고 있어요.”
“그래? 그런데 그 친구 한국어는 못할 텐데 정말 코딩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거야?”
“물론이죠. 정말 답답할 땐 영어 잘하는 친구를 통역으로 부르고요.”
나나 이덕오 모두 마르코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문제는.
“여전히 몇몇 사람들은 마르코가 저지른 사건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어. 네가 잘 케어해 줘.”
“네. 알고 있어요. 마르코도 그 사건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더라고요.”
“그래. 그건 그렇고. DC 소프트랑 기술 협력은 잘되어 가고 있어? 얼마 전에 정선호 회장한테 연락 왔던데.”
“뭐라고요?”
“조만간 멋진 기술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아. AI 기사요?”
AI 기사.
인간이 아닌 인공 지능 컴퓨터가 머신 러닝을 통해 직접 기사를 쓰는 것으로 실현될 경우 언론계의 일대 혁신이 가능했다.
“단순하거나 반복적인 기사들은 AI가 직접 쓰고, 기자들은 대신 심층취재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기대가 커요.”
“그러게. 증시나 스포츠 기록 등 간단하고 반복적인 기사들은 AI를 통해 기사가 나오면 업무 강도가 줄어들면서 기자들도 일하기 편해지겠지.”
“네. 지금 개발하고 있는 게 증시랑 스포츠 경기 전적 자동화하는 기술이에요. 사회나 경제, 문화 등 다른 기사들은 자연어 처리에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해서 당장은 어렵고요.”
“그래. 증시랑 스포츠 기록만 자동화돼도 큰 진전이지.”
“조만간 오프라인 기사로 테스트 예정이에요. 진행되면 알려 드릴게요.”
“응. 마르코한테도 기회 되면 DC 소프트와 기술 협력할 때 함께 참여하라고 해. 좋아하겠다.”
AI는 2016년, 프로 바둑 기사인 이세돌이 AI인 알파고와 겨뤄, 이세돌이 4승 1패로 패배하면서 대중에 크게 각인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체감하기 어려운 기술이었으니까.’
지금부터 꾸준히 AI 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은 2016년에는.
정말로 AI를 통한 기사 생산이 일반화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19세기 초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처럼 AI 기술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나올지도 모르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지.’
DC 소프트와 MOU를 맺고 AI 기사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는 물론 내부에도 철저히 비밀로 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내가 AI 기사에 대한 기자들의 거부감에 대해 걱정하는 사이.
이덕오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기, 형님.”
“응.”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내일? 왜?”
“저희 집에서 삼겹살 파티하기로 했거든요. 마르코랑 재영이 형님이랑요.”
“셋이?”
“네. 원래 총각 모임으로 하려 했는데, 안 본부장님이 갑자기 배신을 때렸죠. 휴.”
이덕오는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예인 여친이라니. 우린 안될 거야, 아마…….”
그나저나 이덕오와 마르코와 안재영이라.
뭔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단번에 대답했다.
“좋아! 콜!”
이렇게 남탕으로 진행될 삼겹살 파티는.
의외의 인물이 참전하면서 일대 혼란이 찾아온다.
집에 있는 문이란 문은 활짝 열어 둔 이덕오는 현관에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한겨울의 한기가 좁은 옥탑방을 지배하며 입김이 나왔다.
“이 이사님. 아니 덕오야. 그냥 문 닫고 구우면 안 될까?”
“아이고, 형님도! 집에 삼겹살 냄새 배면 얼마나 고약한데요!”
“이러다 얼어 죽겠다, 얼어 죽겠어. 이러면 곤란한데…….”
안재영의 말에 나는 요란 떨지 말라며 한마디 했다.
“이 정도 추위 가지고 뭘. 추우면 저기 전기장판 위에 가 있든가.”
“아이 진짜. 다 이유가 있단 말야. 그러는 넌 지금 입에서 허연 입김 나오는 건 알고는 있냐?”
“이유는 무슨.”
“어휴. 성인군자 납셨네, 납셨어.”
나와 안재영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마르코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안재영이 마르코를 향해 영어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