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00)

모두 혈기 왕성한 20대였다.

게다가 좁은 옥탑방 안에서.

남녀의 숫자까지 맞았다.

크리스마스이브라는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취기가 더해질수록 술자리 게임에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엠 그라운드 게임, 배스킨라빈스 31, 쥐를 잡자 등 다양한 게임이 진행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나를 마시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중 새로운 게임으로 눈치 게임이 시작되었다.

“7!”

내가 마지막으로 7을 외치자 지금까지 아무런 숫자도 외치지 못한 이슬아가 잔뜩 혀가 꼬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놔……. 흑기쏴! 흑기쏴 신청이욧!”

그러자 이슬아의 남자 친구인 안재영이 시원하게 폭탄주 원샷을 들이켜더니.

소원으로 크리스마스 더블 데이트라는 카드를 꺼낸 것이었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본디 흑기사의 소원이란 자신을 지목한 상대방, 단 한 사람에게만 요구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 다 술에 취할 대로 취한 상태로 그 점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한 채 일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못한 상태가 이어지던 중.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김혜원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요! 저! 세지니 오빠야랑 저랑 둘이요!”

그러니까 술에 취한 안재영이 엉뚱한 소원을 빌었고, 그걸 또 술 취한 김혜원이 받은 것이었다.

단지 술자리 해프닝이라고만 생각했던 사건은.

오늘 아침 안재영이 내게 전화를 하면서 재개되었다.

-세진아! 어젠 집에 잘 들어갔어?

“그래. 무슨 일인데 일요일 꼭두새벽부터 전화야?”

-왜긴? 잊었어? 우리 너희 고시원 앞이야. 빨리 짐 챙겨서 내려와.

“뭐? 우리?”

* * *

새벽같이 강원도로 떠난 덕분일까.

우리는 일요일의 크리스마스임에도 별다른 차량 정체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바다다!”

거친 해풍과 함께 큰 너울이 일렁이는 겨울 바다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커다란 파도가 일더니 부서지며 다시 일어나고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모두 겨울 바다의 매력에 빠진 듯 한동안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적을 깬 것은 김혜원이었다.

“와. 좋다. 그런데 여기 재영이 오빠 아는 사람 집이에요? 바닷가 언덕 위의 집이라니. 너무 멋져요!”

그러자 안재영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아. 여기 우리 집 별장.”

“네? 별장이요?”

“응. 너랑 슬아랑 연예인이라서 남들 눈에 띄면 소란이 일어날까 봐 우리 집 별장으로 왔는데, 괜찮지?”

“괜찮고 말고요! 완전 좋아요!”

김혜원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안재영의 별장 곳곳을 누볐다.

2층으로 된 별장은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어디서든 바다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세진이 오빠! 여기 2층으로 와 보세요! 바다가 훨씬 더 잘 보여요!”

그녀는 2층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꼭 자기 얼굴에 어울리는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나와 안재영 그리고 이슬아는 서로 웃음을 보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2층 거실에 설치된 소파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속은 좀 어때? 어제 과음했는데.”

어제 술을 마시면서 말을 트기로 한 우리는 서로를 편하게 불렀다.

평상시 여러 번의 만남을 갖는 것보다 단 한 번의 술자리가 갖는 위력은 이렇게나 굉장했다.

이슬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우. 말도 마요. 초록색만 봐도 속에서 막 올라오려고 그래요.”

“초록색?”

“소주병 색깔은?”

“하하. 그렇네. 점심은 해장을 좀 해야겠는걸. 그렇다고 식당을 가기는 그렇고……. 재영아, 뭐 해장할 만한 거 없어?”

“해장이라. 부엌에 뒤져 보면 라면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면? 재벌가도 라면을 먹어?”

이슬아의 물음에 안재영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럼! 재벌가는 사람 아닌가. 우리도 똑같이 라면도 먹고 순댓국도 먹고 그래.”

“신기하다. 삼시 세끼 스테이크만 먹을 것 같은데.”

“하하. 그렇게 먹다간 고지혈증으로 큰일 날걸? 아무튼 그럼 오늘 점심은 라면이다? 모두 오케이?”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얼큰한 라면만큼 해장에 좋은 음식이 또 있을까.

이윽고 안재영이 커다란 냄비에 라면을 끓여서 2층으로 가져왔다.

스팸과 참치 그리고 김치와 소시지 등 이것저것이 잔뜩 들어 있는 라면은 부대찌개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젓가락을 가져다 허겁지겁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면발과 함께 국물 한 숟가락을 넘기고 나서야.

‘이제 좀 살 것 같군.’

깊은 안도감과 함께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원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근데 세진이 오빠는 가만히 보면 우리랑 또래가 아니라 나이 많은 아저씨 같아.”

“아! 그 느낌 나도 알 것 같아. 뭐랄까……. 인생을 달관한 느낌?”

“맞아요, 맞아! 오빠 진짜 스물일곱 맞아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속에 있는 실체는 서른여섯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아닌가? 회귀한 뒤로도 나이를 먹었으니 서른일곱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라면을 먹는데 이번에는 안재영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지? 너 요즘 정신없이 바쁜 것 같은데.”

“어. 오늘은 일요일이잖아?”

“아니 그래서. 내일 출근이잖아. 그냥 집에서 푹 쉬게 내버려 둘 걸 괜히 내가 고집부렸나 싶기도 하고.”

“괜찮아. 덕분에 겨울 바다도 보고 너희 집 별장에도 와 보고 좋네.”

“그럼 다행이고. 어차피 오늘 일요일이라 오후에 출발하면 엄청 막혀. 아예 저녁 늦게 출발하는 게 더 빠르니까 그때까지 푹 쉬다 가.”

“그래. 고맙다.”

얼마만의 휴식이었을까.

우리는 소파에 둘러앉아 이야기도 나누었다가.

티브이나 책을 보기도 하였고.

피곤한 사람은 방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였다.

그러다 심심하면 멍하게 바다를 쳐다보며 뒹굴거렸다.

어느덧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더니 금세 깜깜해졌다.

나와 안재영은 근처 항구에서 회를 사서 오기로 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집에서 편히 기다리세요, 레이디들~”

안재영은 느글거리는 멘트와 함께 내 손을 잡고는 별장을 떠났다.

그는 주변 지리가 익숙한 듯 빠른 속도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여기 자주 오나 보지?”

“가끔. 부모님도 여긴 잘 안 들르시거든.”

“아무튼 오늘 초대해 줘서 고맙다.”

“내가 고맙지 뭘.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오늘 푹 쉬었어?”

“응. 간만에 정말 제대로 쉰 기분이었다.”

“다행이네. 그런데 세진아.”

“응.”

“너 그거 아냐?”

“뭐?”

“너 되게 위태로워 보이는 거?”

위태롭다라.

한 곳만 향해 전력 질주를 한 탓일까.

새삼 나를 챙겨 주는 안재영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냐.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인데 뭐.”

“그럼 됐고. 그나저나 혜원이 걔 어때?”

“김혜원?”

“그래. 네 파트너 말야.”

“파트너는 무슨.”

“그럼 더블 데이트로 함께 온 상대가 파트너가 아니면 뭐냐.”

“어감이 이상하잖아.”

“이상하긴 무슨. 아무튼 걔 괜찮지 않아? 애도 착하고 싹싹하고. 우리 슬아랑은 정반대로 청순가련하잖아. 지나가는 남자들 백이면 백 다 올킬일걸? 물론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연예인이니까 그렇지. 순수해 보이긴 하더라.”

“그렇지? 너도 생각 있으면 나처럼 연애해 보든가. 서로 의지도 할 수 있고 힘도 되고 좋아.”

“난 됐어. 할 거 많다.”

“연애하면서 하면 되잖아. 성공이랑 사랑 중에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냐. 지금 시점에서 둘 다는 내게 무리다.”

“너 설마 아직도 소월이 못 잊고 그런 건 아니지?”

“설마. 연락 안 한 지 오래됐다.”

“그래? 소월이는 요즘도 가끔 네 안부 묻던데? 잘 지내냐고.”

“됐고. 회 센터는 아직도 멀었냐?”

“곧 도착이다. 조금만 기다려.”

우리가 횟감으로 도미와 광어를 사고는 회 센터를 떠나려던 무렵.

굉장히 익숙한.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낯선 물고기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 물고기를 보고 멍하게 서 있자 안재영이 왜 안 따라오냐고 소리치더니 웃으며 말했다.

“뭐야? 개복치잖아?”

“저거 개복치 맞지? 실물은 처음 본다.”

“그래? 여기 오면 가끔 있어. 왜? 살까?”

“뭐? 개복치도 먹을 수 있어?”

“먹을 수 있으니까 여기 있는 거지. 아줌마! 여기 개복치 회 좀 떠 주세요!”

안재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개복치 회를 주문했다.

행동력 하나는 정말 최고인 녀석이다.

“넌 먹어 봤어?”

“아니 먹어 본 적은 없는데 먹어 본 사람은 그리 추천하진 않는다던데?”

“그래? 맛이 없나?”

“모르지. 오늘 가서 먹어 봐.”

그렇게 우리는 개복치 회까지 추가하여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다.

두 손 가득 횟감을 가지고 온 우리를 이슬아와 김혜원이 격하게 반겼다.

둘은 오늘은 술을 마시지 못할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아……. 이렇게 멋진 회를 앞두고 술을 못 마실 줄이야.”

“그러게요, 언니.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하하. 너네 연예인 맞아? 그렇게 술 좋아해서 몸매 관리는 어떻게 하려고?”

“오빠가 신경 안 써도 알아서 잘하니까 괜히 태클 걸지 마세요~”

이슬아가 어린아이를 다루듯 안재영을 놀렸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이었다.

회 센터에서 가지고 온 회를 풀자 모두의 눈길이 개복치에게 쏠렸다.

보통은 고급 횟감의 대표 격인 도미에 관심이 쏠렸을 터이지만.

개복치는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횟감으로도 무척이나 신기한 외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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