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200)

“구조적인 문제요? 정권에서 사장을 임명하는?”

“맞습니다. 그러니 현재 시스템상에서는 누가 권력을 잡든 공영 방송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 주고,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거죠.”

“으흠…… 좋은 말인 거 같긴 한데…… 정치적인 이슈라 그게 가능할까요?”

“안 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저희 오프라인이잖아요.”

내 말에 백철웅이 크게 웃었다.

“하하. 그렇군요. 저희가 국내 최고 언론사라는 사실을 깜빡했군요.”

“늘 말씀드리지만, 국내가 아니라 글로벌 매체입니다.”

“그럼요, 그럼요. 아무튼 우 사장 생각이 그렇다면 저는 찬성하겠습니다. 현재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는 건 저도 동의하니까요. 그렇지만…….”

백철웅이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이어 말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여당은 물론이고 지금은 WBS를 지지하는 야당조차 자신들이 집권했을 때를 대비해서 속마음은 다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네, 그러니까 설득하고, 또 힘을 모아야겠죠.”

“역시 우 사장은…….”

“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정치를 해야 합니다.”

“아뇨. 몇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정치에는 관심 없습니다.”

“관심이 없기는 뭘요. 지금 우 사장이 하는 게 바로 정치입니다. 정치!”

* * *

그날 저녁.

나는 언론진흥재단 이사장인 모원석과 급히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 역시 현 정권의 인사로 볼 수 있지만, 그는 젊었을 적 진보 매체인 한민족 신문의 기자로 활동했었고 몇 해 전에는 TTN 사장을 역임한 적도 있었다.

그것도 현 정권과는 정반대 성향의 정권이 집권했을 때 말이다.

언론진흥재단이 있는 무교동 골목의 한 허름한 복국집에서 만난 우리는 복지리에 소주를 곁들여 먹었다.

하얀색 국물의 복지리가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이 집 복지리가 시원합니다. 제가 여기 좋아하는 건 또 어찌 알고 약속 장소를 잡았습니까?”

“이광우 의원님한테 들었습니다. 여기 좋아하신다고요.”

“허허. 거 참. 자 드십시다.”

그의 말마따나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일품이었다.

나는 그에게 소주를 따르며 천천히 말했다.

“이사장님은 이전에 TTN 사장을 하시기도 하셨죠?”

“그랬죠. 오래전 일입니다.”

“그것도 현 야당의 전신인 주인당이 집권했을 때 말이죠.”

“맞습니다. 이국대 대통령이 저를 언론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선택할 때 그 경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도움이요?”

“네, 너무 자기네 쪽 인사만 임명하면 반발이 거셀 수 있는데, 저는 반대쪽 진영에서도 거부감이 적은 사람이니까요.”

“일리가 있군요.”

나와 모원석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소주를 마셨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이사장님. 혹시 지금의 공영 방송 그리고 준공영 방송에 대한 지배 구조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하셨나요?”

“지배 구조라…… 혹시 WBS 파업 때문에 그러시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원석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서 술을 마셨다.

“저 역시 우 사장님의 말에는 동감합니다만…… 잘 아시겠지만, 정치적인 논리가 작용하는 영역이니까요.”

“정부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요직에 앉히고 컨트롤하겠다는?”

“그런 것도 있습니다만, 집권하고 나면 집권에 도움을 준 인사들을 챙겨야 하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보은 인사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대통령 입장에서야 WBS와 같은 공영 방송 사장 자리는 정말 좋은 자리죠. 뽀대나고 신경 써 준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렇지만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이사장님은 물론이고 모두가 인지하는 사실 아닙니까?”

“하하 우 사장님. 아직 젊군요. 세상이 꼭 그렇게 흑백으로만 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요. 아니 언론사 사장이시니까 저보다도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언론의 사명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거 아닙니까?”

“흠흠.”

내 말에 모원석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를 달래며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WBS 노조는 물론이고 HBS와 TTN 그리고 통합 뉴스 노조를 찾아갈 생각입니다.”

“노조를요? 거긴 왜?”

“함께 힘을 모으려고요.”

“저런…… 오프라인은 이국대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곳 아닙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들의 파업에 동참하거나 지지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그럼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시스템을 바꾸려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이사장님의 도움도 꼭 필요합니다.”

모원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내 눈을 쳐다보았다.

300분 토론.

오프라인은 공영 방송 및 준공영 방송의 지배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제로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생방송을 진행했다.

진행은 오프라인의 스타기자인 홍지혜가 맡았다.

좌측에는 파업의 당사자인 WBS 노조위원장과 그들에게 지지를 표방한 HBS, TTN, 통합 뉴스 노조위원장.

그리고 WBS 기자 출신인 현 야당 국회의원이 나섰다.

그에 맞서는 우측에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인 모원석을 필두로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HBS 부사장, TTN 사장 등 거물급 인사가 총출동했다.

스튜디오 안을 둘러보던 안재영이 고개를 좌우로 젓고는 말했다.

“뭘 어떻게 하면 저런 괴물 팀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열심히 설득하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정말 요 며칠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그저 저들을 설득하기 위해 돌아다녔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작정 전화하고 무작정 찾아가 사정하고 무작정 버티고.

‘정말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지 난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한국 언론의 수준을 끌어올려야겠다는 사명감?

아니다.

그것보다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공영 방송이 그저 싫었을 뿐이다.

잘나가는 식당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프랜차이즈 사업에 빠졌던 것도 HBS의 뉴스를 보고 나서다.

리포터는 프랜차이즈 사업이 대박이라며 좋은 아이템이 있다면 적극 시도해 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부의 요직에 있던 누군가가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큰돈을 챙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을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프랜차이즈 사업의 위험에 대한 뉴스가 버젓이 전파를 탔다.

똑같은 시간대의 똑같은 리포터가 전하는 HBS 뉴스에서 말이다.

‘공영 방송의 공정성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 갈대 같은 변동성이 꼴 보기 싫어서 말이지.’

백종해 의원과 각 노조위원장의 설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우측 인사들을 이 자리에 부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거나 부담스럽다며 자리를 피했다.

모원석이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서주지 않았다면 결코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입장이 명확한 노조 측과 다르게 정부에서 임명된 자들은 입장을 표명하기가 조심스럽겠지.’

모든 출연진이 결정된 이후 오프라인은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토요일 오후 5시에 생방송을 시작한 이유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토론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크크. 그런데 300분 토론은 누구 생각이에요? 우 사장님 본인?”

“네, 100분으로는 너무 짧으니까요.”

“300분이면 무려 5시간인데 괜찮을까요? 너무 지루해서 시청자들이 이탈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단 한 번뿐인 기회입니다. 이번 토론으로 끝장을 봐야죠.”

오프라인은 최근 일주일 동안 대다수의 기사를 공영 방송 지배 구조에 대해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덕분에 국민 다수가 왜 현재의 공영 방송 지배 구조가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지가 된 상태였다.

약속된 시간이 되고.

사회자인 홍지혜가 밝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오프라인의 홍지혜 기자입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300분 동안 공영 방송 지배 구조 개선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눌 예정입니다. 먼저 오늘 출연해 주실 분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이지 쉽게 모시기 어려운 분들을 한자리에 모셨습니다.”

그녀는 차례대로 출연진을 소개하였다.

사전에 리허설을 진행하지 않았고, 녹화 방송이 아닌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출연진 모두의 얼굴에서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1시간 동안은 왜 WBS가 파업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나왔다.

그리고 다음 2시간 동안은 그렇다면 법 개정을 통해 각 언론사의 사장을 임명하는 이사 추천권의 비율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현재 이사 추천권은 여당이 이사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뽑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결국 대통령이 원하는 인사가 임명되고 있고요.”

“아니, 그럼 정부가 아니라 야당 측 인사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아뇨. 여야의 문제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객관적이고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인사가 사장 자리에 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언제나 지금과 같은 일이 반복될 겁니다!”

생방송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홍지혜의 노련한 진행 덕분이었을까.

각 출연진들은 자신의 의견을 점잖고 매너 있게 이야기하는 동시에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청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이 일주일 내내 현재의 문제점과 각자의 입장.

그리고 여러 개선안의 장단점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한 기사를 올린 탓인지 댓글 창 역시 수준이 높았다.

<공영 방송은 민영 방송이 아니니까 정부의 정책이나 방향과 너무 다르게 가기는 어렵지 않을까?>

<7대4니 6대3이니 정치권이 서로 주고받는 지저분한 관행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아>

<벌써 3시간이 넘었는데 그다지 안 지루함. 신기하네>

하지만 3시간 동안 상대를 견제하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는 출연진 모두의 얼굴에서 힘든 기색을 발견하고는 잠시 15분 동안 쉬는 게 좋겠다는 사인을 주었다.

내가 보낸 사인을 받은 홍지혜는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잠시 15분간 휴식을 취한 뒤 2부로 이어지겠습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출연진들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홍지혜의 표정은 여유로운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 아래 그녀의 가는 다리는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실시간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중재를 담당할 사회자인 만큼 에너지 소모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스튜디오 안의 홍지혜에게 다가가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2부는 제가 진행할게요. 좀 쉬세요.”

“아닙니다, 사장님. 제가 사회를 맡았는데 계속 제가 나오는 게 맞죠.”

“아뇨. 생방송 도중에 갑자기 쓰러지시면 방송 사고 납니다. 제가 할 테니까 쉬고 계세요.”

홍지혜는 자신이 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다른 직원들을 시켜 그녀를 쉬게 했다.

출연진 대부분은 15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책상에 엎드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등 2부를 앞두고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사이 10년은 늙은 것 같은 모원석을 보고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생 많으십니다, 이사장님.”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흥.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정말 이번 토론은 모두 다 이사장님 덕분입니다.”

“휴. 내가 노망이 들었지. 그게 뭐라고…….”

* * *

며칠 전 모원석과의 저녁 식사 자리.

그는 내 말에 그게 말이 되냐며 되받아쳤다.

“그러니까 나보고 그 생방송 토론에 나오는 것은 물론 다른 이사장들과 위원장을 설득해 달란 말입니까?”

“네, 이사장님 말고는 아무도 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허허. 제가 누구 좋으라고 그 고생을 해야 하죠?”

“이사장님도 현재 공영 방송의 지배 구조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현실과 이상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게 가능할 리 없습니다.”

“이사장님. 저 이미 읽어 봤습니다.”

“뭐를 말이죠?”

“이사장님이 과거 기자협회보에 기고한 글 말입니다.”

“그게 한둘이어야죠.”

“민주주의는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언론이 앞장서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내 말에 모원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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