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200)

그가 썼던 글에는 공영 방송 지배 구조에 대한 날 선 비판이 가득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잔에 술을 채워 넣으며 말했다.

“말미에 이렇게 쓰셨더라고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영 방송을 바꿔야 한다고요. 더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바뀌면 안 된다고 말이죠.”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내가 준 술을 그대로 마셨다.

그렇게 그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그는 이번 토론의 출연을 결심한 것은 물론 내가 지명한 다른 출연진들의 설득에 적극적으로 나와 준 것이다.

* * *

모원석의 눈은 그때를 회상이라도 하듯 아련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러다가는 300분 토론은커녕 1,000분 토론을 해도 끝이 안 날 것 같은데…… 그래도 2부를 진행할 겁니까?”

“물론이죠. 2부 사회는 제가 볼 예정입니다.”

“그래요? 정말 대본에도 없는 출연이로군.”

“뭐 그게 생방송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내가 씩 웃어 보이자 곧 15분이 다 되었다는 알람이 울렸다.

모든 출연진이 옷깃을 여미며 다시 진행될 토론을 준비하였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는 사회자가 바뀌었다는 점을 공지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3시간이 넘는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30만 명이 넘는 분들이 이 토론을 지켜봐 주고 계시는 점,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2부의 사회는 저 우세진이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러자 유튜브의 댓글 창이 빠르게 움직였다.

<뭐야뭐야, 우세진이 나왔어?>

<대박! 저번 김정일 인터뷰 때처럼 뭔가 센 거 한 방 때리려고 그러나?>

<홍지혜도 좋지만 우세진도 좋아. 뭔가 연륜이 느껴져>

나는 댓글을 살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패널분들이 오랜 시간 속에서도 너무나도 질서정연하고 수준 높은 토론을 진행해 주셔서, 오늘 토론을 개최한 오프라인의 사장으로서 무척 감사드리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출연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옆에서 토론을 지켜보니 너무나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아쉬운 점이요?”

모원석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여러분들 논의는 여당 측 인사가 몇 명이어야 하는지 혹은 야당 측 인사는 몇 명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로밖에 보이지 않아서요.”

“네? 사장 임명권에 있어 각 진영의 이사 추천권만큼이나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WBS 노조위원장이 나를 바라보며 잘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나는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시각의 제안을 던졌다.

“정치권의 이해타산이나 정권의 입맛이 아닌 국민의 힘으로 뽑는 겁니다.”

“국민의 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TTN 사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 사장님, 지금 공영 방송 사장을 무슨 대통령 선거하듯 국민 투표로 뽑자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국민들은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고 그런 식으로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자원이 허비되고 말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국민의 힘으로 뽑자는 거죠?”

“국민대리인단을 도입하는 겁니다.”

“국민대리인단이요?”

스튜디오 안이 웅성거렸다.

나는 잠시 숨을 돌렸다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네, 국민대리인단을 통해 공영 방송 상위 기관 이사를 뽑고 이들이 다시 사장을 뽑는 겁니다.”

“국민대리인단은 어떻게 뽑는 건데요?”

“일정 조건을 부여해서 뽑을 수도 있겠지만 만 19세 이상 성인이라면 누구라도 랜덤하게 선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죠.”

“네? 그게 무슨!”

성인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어리든 많든.

각자의 생각과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여 공영 방송의 주요 인사를 뽑는 것이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제안은 휴식 시간을 통해 조금 식어 있던 토론장을 다시금 뜨겁게 달궜다.

출연진 모두가 내 의견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힘과 동시에 그렇다면 국민대리인단의 규모를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기준을 통해 선별하고, 또 어떤 방식을 통해 추천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남은 2시간은 정말이지.

내가 뭐라고 이야기할 틈조차 없었다.

자기네들끼리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공영 방송의 중립성을 지키며 정치권의 개입을 최소화할 방법에 대해.

수많은 의견과 아이디어가 도출되었다.

토론이 끝나고 얼마 후.

이날 토론에 참가했던 야당 국회의원의 주도하에 다음과 같은 법안이 발의되었다.

국민이 직접 공영 방송 사장과 이사를 임명할 수 있게끔 공영 방송의 지배 구조를 개선하는 법안 말이다.

300분 토론을 본 국민 대다수가 해당 법안의 발의에 환호하며 이를 반겼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이국대 대통령만이 청와대 깊은 곳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 * *

DC 소프트와 기술 교류 MOU를 맺은 지도 벌써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덕오는 좋은 소식이 있다며 내 집무실로 들어왔다.

“우 사장님, 드디어 첫 번째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결과물? 뭐 말이죠?”

“DC 소프트와 기술 교류한 거 말이에요.”

“아! AI가 기사 쓰는 거요?”

DC 소프트와 우리는 첫 번째 기술 교류 과제로 AI 기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간단한 스포츠 경기 결과나 날씨, 증시 현황 등에 대한 기사는 사람이 쓰는 것보다 기계가 쓰는 게 더 유리했다.

기자의 시간이 절약되는 것은 물론 단순 반복적인 업무였기 때문이다.

“이거 한번 보실래요?”

이덕오는 내게 자신의 아이패드를 건네며 말했다.

그가 건넨 아이패드에는 한 스포츠 기사가 적혀 있었다.

<백호, 청룡에 10-0 압승…… 김기원 감독 “내 필승 전략이 먹힌 것”>

백호가 청룡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백호는 이날 주요 선수들이 부상으로 빠진 가운데 상대적인 열세가 예측되었지만 그런 비난을 비웃기라도 하듯 큰 점수 차로 승리했다. (중략) 백호의 김기원 감독은 “내가 준비한 필승 전략이 그대로 들어맞았다.”라며 “다음 경기에서도 전략으로 승부를 보겠다.”라고 밝혔다.

“설마 이게 AI가 썼다는 건가요?”

내 물음에 이덕오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리즘에 따라 100% AI가 쓴 기사예요. 사람의 손은 전혀 거치지 않고요!”

“퀄리티가 좋네요. 이 정도면 지금 바로 기사화해서 내보내도 전혀 무리가 없겠는데요?”

나는 이덕오에게 AI 기사의 한계와 가능성 등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는 즉시 취재본부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 넷을 집무실로 불렀다.

그들에게 AI가 쓴 기사를 보여 주었더니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 사장님? 이게 진짜 로봇인 쓴 기사라고요? 사람이 쓴 게 아니고요?”

“허허. 이거 제가 쓴 거보다 깔끔한데요.”

“압도적인 승리라는 표현을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한 기자의 물음에 이덕오가 웃으며 답했다.

“AI가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엄청난 양의 관련 기사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그러고 나서 이를 학습하고 해석해서 자기만의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니까 기존에 있는 수많은 기사를 보고 그에 걸맞은 표현을 스스로 찾았다는 건가요?”

“그렇죠. 정확합니다. 이 상황에선 이런 표현이 적합하다는 걸 스스로 판단해서 쓴 겁니다. 사람하고 똑같아요.”

“휴……. 놀랍긴 한데 좀 무섭네요.”

“네? 뭐가요?”

이덕오는 물음에 스포츠 담당 기자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답했다.

“벌써 이런 수준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AI가 저보다 더 기사를 잘 쓰는 거 아닐까요? 그러면 저는 더 이상 기사를 쓸 필요가 없어지는 거고요.”

“김 선배 말에 동의합니다. 이건 뭐 제 밥그릇을 로봇한테 빼앗기는 심정인데요.”

“서글프지만 저도 21세기판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싶네요. 에혀.”

그들은 모두 AI가 쓴 기사에 큰 우려를 표했다.

나 역시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회귀 전에 자주 작성했던 기사 중 하나가 바로 로봇이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다는 기사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이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해당 주제는 늘 높은 트래픽을 기록했다.

실제로 로봇과 인공 지능이 현장에 도입되면서 공장에서 근로하거나 식당 서빙, 화물 배송 등 육체노동을 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대량 실업에 대한 우려가 커져 갔다.

하지만 AI 기사는 블루칼라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화이트칼라 직업인 기자조차 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AI 기사에 대한 내 생각을 밝혔다.

“여러분들의 우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다만 AI 기사가 여러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째서죠? 지금 보여 준 수준으로도 충분히 저를 대체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하하. AI가 어떻게 여러분 같은 고급 인력을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AI 기사는 장점도 많지만, 아직 한계도 명확해요.”

“한계요?”

“네, 이덕오 이사님. 이건 이 이사님이 설명해 주시죠.”

내가 이덕오를 가리키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AI 기사의 한계에 관해 설명했다.

“AI 기사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해요. 자연어 처리라고 하는데, 컴퓨터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이를 표기하는 기능이죠. 이게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기술이거든요.”

“그래요? 그런 것 치고는 AI 기사가 쓴 글 수준이 무척 높던데요?”

“음. 그건 AI한테 야구 기사만 주야장천 학습시킨 결과인데요. 다른 분야는 좀 달라요.”

“어떤?”

“예를 들어 배가 떠 있다는 표현을 해 보죠. 여러분들은 이 배가 어떤 배일 것 같나요?”

갑작스러운 이덕오의 질문에 네 명의 기자 모두 멀뚱하게 서 있다가 동시에 답했다.

“물 위에 뜨는 배요.”

“그렇죠? 인간은 문맥에 따라서 ‘배’라는 단어가 어떤 식으로 쓰이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해요. 이게 물에 뜨는 배인지, 아니면 먹는 배인지, 아니면 인간의 배를 가리키는지요.”

이덕오가 자신의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AI에게는 이게 너무 어려워요. 왜 같은 단어인데 뜻이 다른지. 어떨 때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이해를 못 하는 거죠.”

“그래요? 그래도 너무 잘 썼던데…….”

“그건 좀 노가다 작업을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해를 시킨 게 아니라 그냥 무작정 암기를 시킨 거예요. 이럴 땐 이렇게 쓰라고요. 제가 보여 드린 기사가 무척 잘 쓰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또 다른 기사를 보면 거의 비슷한 문장을 반복해서 사용한다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AI가 썼다는 다른 야구 경기 결과 기사를 보여 주었다.

모두 인간이 쓴 것처럼 깔끔하고 매끄러운 기사였지만, 어쩐지 뭔가 틀에 박힌 듯 비슷한 표현이 반복되었다.

“아! 이걸 보니 좀 안심이 되네요. 아직은 좀 어색한 느낌도 있고, 뭐랄까 기계적인 느낌이 있는데요?”

“기계니까요. 아직은 인간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어요. 그러려면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고요.”

걱정 가득했던 기자들의 얼굴에서 이제야 안도감이 보였다.

나는 이어서 말을 보탰다.

“우선 여러분들에게 야구 기사를 보여 준 이유도 경제나 사회, 정치 등 복잡한 영역은 아직 AI로 기사를 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분야 역시도 간단한 경기 결과 정도를 분석하는 게 한계이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요?”

“네, 앞으로 경기 결과에 대한 기사를 AI가 쓰게 되면 보다 심층적인 내용의 기사를 쓰는 데 힘을 써 주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획 기사나 인터뷰 기사 같은 건 말이죠.”

“아. 그러니까 AI가 쓸 수 있는 간단한 기사를 이제 안 써도 되니까 그 시간에 조금 더 의미 있는 기사를 쓰라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역할은 보다 의미 있고 좋은 기사를 쓰는 데 쓰여야 하니까요.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은 AI에게 넘기고요.”

“이해했습니다. 뭔가 사기가 오르는데요. 더 좋은 기사를 써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이죠. 그러려고 만든 AI 기사니까요. 지금도 잘해 주고 계시지만 분발해 주세요.”

“네, 사장님!”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이덕오도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별다른 반발 없이 수용해 줬어요.”

“아직은 AI가 해야 할 부분은 인간의 서포터니까요.”

“아직은?”

“앞으로 이 이사가 꾸준히 더 개발해서 언젠가는 AI가 직접 모든 분야의 깊이 있는 기사를 쓰는 수준까지 발전시켜야죠.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조금 더 빨리해 봐요. 죽고 나서 성과가 나오면 아쉽지 않겠어요?”

“네, 우 사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나중에 진짜 AI가 모든 영역에 완벽한 기사를 쓰게 된다면…… 조금 전에 기자들이 우려했던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나는 팔짱을 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술의 발전이란 그런 거니까요. 과거 자동차가 보급되자 마차의 마부들이 강하게 불만을 제기했다고 하죠. 하지만 지금은 어디 관광지 같은 데에서야 마부들이 있지, 평소에는 볼 수 있나요? 다들 자동차 끌고 다니지. 시대가 바뀌면 또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거고, 그만큼 인간의 삶은 더 윤택한 방향으로 흐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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