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200)

안개에 뒤덮인 거대한 건축물이 눈에 보였다.

“아니, 저 피라미드 모양의 건물은 대체 뭡니까?”

“류경 호텔이라고 100층이 넘는 마천루입니다. 북한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죠.”

“그래요? 엄청 높군요. 호텔이라면 우리도 이번에 저기에 묵었으면 좋았으련만.”

“그게 현재는 이용을 못 하거든요.”

“이용을 못 해요?”

백철웅의 물음에 안재영이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기네스북에는 텅텅 비어 있는. 그러니까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가장 높은 건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체제 선전용이죠.”

백철웅이 뜨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김설송이 내게 와서는 속삭였다.

“잘 아시겠지만, 묵고 계시는 숙소는 당의 감시 대상입네다. 들어가시기 전에 직원들에게 조용히 주의를 주시라우.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설송 님.”

“말씀하시라우.”

“혹시 오늘 저녁을 옥류관에서 먹을 수 있습니까?”

내 말에 김설송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우세진 동무, 옥류관 평양냉면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가 봅네다!”

“네. 여기 오니 또 먹고 싶네요. 저희 직원들에게도 소개해 주면 참 좋아할 것 같습니다.”

“하하. 날래 알아보갔소. 난 또 뭐라고.”

김설송의 배려로 우리는 그날 저녁을 옥류관에서 먹을 수 있었다.

대표단의 표정은 두 개로 갈렸다.

감격했다는 표정이 하나.

그리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인지 경악스럽다는 표정이 또 하나.

백철웅은 감격파의 하나였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훌륭하네요. 그래서 저희 내일 일정은 어찌 됩니까?”

“간단히 평양 투어를 하기로 했습니다.”

“오. 좋네요. 그럼 귀환하는 건 내일모레?”

“네. 그런데 잘하면…… 내일 김정일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네? 김정일을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에 옥류관에 있던 모두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김설송이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먹고 숙소로 돌아온 뒤.

백철웅과 함께 방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김금철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급한 일입네다. 날래날래 따라오시라우.”

“지금이요?”

그의 재촉에 서둘러 옷을 입고 호텔 밖으로 나오자 로비에 김설송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김금철은 나에게 차로 타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차에 타니 김설송 혼자 있었다.

그녀는 차 안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말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오프라인 평양지국 개국을 축하하며 이런 편지를 전하셨습네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살피고는 품 안에서 꾸깃꾸깃 접어든 종이를 내게 건넸다.

편지를 읽은 나는 편지와 김설송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편지에 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런 거라면 저희가 오기 전에 미리 알려 주셨으면 좋지 않습니까? 지금 갑자기 이러시면.”

“김정일 동지께서 몸이 편치 않으십네다. 고민을 많이 하시다가 조금 전에 저한테 이 편지를 전하신 겝니다.”

나는 좌석에 몸을 기대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김정일의 친필 편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의 평양 지국 개설을 축하합니다. (중략) 이를 기념해서 북남정상회담이 조속히 추진되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김정일 金正日>

“조속히라는 게 도대체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김설송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네다. 지금 당장에라도.”

“당장이요?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가능하게 해야디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한의 대통령도 그렇고 북한의 위원장도 그렇고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건지.’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말했다.

“보아하니 남의 눈을 살피는 것 같은데 남한 정부에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걸.”

그녀는 핸드백 안에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무전기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위성전화기입네다. 5분 이내의 짧은 통화라면 도청에서 자유롭습네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청와대 직통전화를 누르고 발신 버튼을 눌렀다.

오래지 않아 비서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긴급하게 상황을 알리고 이국대를 바꿔 달라 말했다.

김설송이 5분 이내라고 한 말이 마음에 걸려 통화 연결음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행히 곧 이국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이 한밤중에.

“급한 건입니다. 오래 전화 못 합니다. 김일성이 대통령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네? 김일성이 나를?!

“네. 남북정상회담을 조속히 하자고 저한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네. 가능하면 저희 오프라인이 북한에 와 있는 동안 했으면 한다고 합니다.”

-뭐? 무슨 그런 억지를!!

“보안상의 이유로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빠른 결정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화는 이쪽으로 해 주세요. 그럼.”

-우세…… 뚜뚜뚜.

나는 시계를 살피며 정확히 4분 59초에 전화를 끊었다.

김설송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건넨 무선기를 다시 자신의 핸드백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능하겠습네까?”

“모르겠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도 작은 트러블이 있어서…… 그래도 현재 임기 말이라 뭔가 국면을 전환할 모멘텀이 필요할 텐데 남북정상회담이라면 엄청나게 끌리는 아이템이긴 할 겁니다.”

“이번 회담은 그런 애들 장난 같은 일이 아닙네다! 우리는 일분일초가 급합네다!”

“왜 그렇게 재촉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너무 보채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내가 따지자 김설송이 속으로 말을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네다. 아무튼, 이 일은 당분간 우세진 동무만 알고 있어야 되는 겝니다.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극비 사항입네다. 극비요. 그리고 내일 김정일 동지를 만나는 건 어렵게 됐으니 그리 아시라우.”

“아니 왜요?”

“백철웅 동지가 옥류관에서 그리 큰 목소리로 내뱉지 않았습네까. 경솔하기는.”

내가 차에서 내리자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금철이 다가와서는 운전석에 탔다.

그는 창문을 살짝 내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들어가시라우. 티 내지 말고.”

그 한마디를 남긴 그는 차를 몰고는 빠르게 호텔에서 사라졌다.

나는 사라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김설송 정도 되는 인물이 도청에 신경을 쓴다라…… 지금 북한 내부 문제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닌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호텔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나오더니 어서 방으로 돌아가라며 성화를 부렸다.

* * *

다음날 오후.

버스를 타고 평양 투어를 하고 있는데 김설송이 급하게 나를 찾았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차로 부르더니 다시 어제의 그 무전기를 꺼냈다.

“이국대 대통령에게 전화가 왔습네다.”

“진짜요? 뭐라던가요?”

“우세진 동무를 찾습디다. 당신이 아니면 말할 수 없다며.”

“다시 전화를 걸어도 괜찮은 겁니까?”

“어차피 위성 통화를 쓰면 어디서 걸어서 어디와 통화를 하고 있는지는 숨길 수 없습네다. 상대가 다 아는 게죠.”

“그럼?”

“통화 내용을 막는 겁네다. 5분 안에는 뭘 해도 도청이 불가능합네다.”

잘은 모르겠지만 북한 내부에서도 김설송과 대립하는 파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숨은 실세인 김설송은 물론이고 최고지도자인 김정일의 의지와도 반대되는 세력이 있을 수 있나.’

나는 다시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곧바로 이국대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 주셨다고요.”

-그렇소. 하기로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대통령님!”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아직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논의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군사 보안을 유지하듯 하는 이유가 뭡니까? 김정일의 지시라면 이렇게 비밀스럽게 할 필요가 없을 텐데?

“저도 자세한 내용은 잘 모릅니다만 상대가 장난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조심하세요. 우 사장 있는 그곳은 북한입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김설송이 내게 물었다.

“뭐랍네까? 하겠답네까?”

“네. 하겠답니다.”

“아! 다행입네다! 정말 다행입네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급하게 진행하는 겁니까? 마치 누군가의 감시를 피하듯 보안을 요구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그것이…….”

그녀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내 귀에 자신의 입을 바짝 대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버지 건강이 많이 안 좋습네다. 그래서 정은이 녀석이 아주 벼르고 있습네다.”

“네?”

내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자 그녀가 조용히 하라는 듯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평양 한 바퀴 돌고 나서 호텔에서 대기하고 계시라우.”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나를 차 밖으로 내리고는 다시 사라졌다.

버스에 다시 오르자 오프라인 직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왔다 갔다 하시는 거예요?”

나는 괜찮다며 모두에게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말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옆에 앉은 백철웅이 풀이 죽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저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어제 식당에서 김정일 위원장 이름을 크게 불러서?”

“그럴 리가요. 전혀 아닙니다.”

“그래요? 난 또 나 때문에 우 사장이 계속 그렇게 불려 다니나 싶어서 마음이 영 편치가 않네요.”

“아닙니다. 백 사장님. 절대 그런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투어를 마친 차량이 숙소로 돌아오자 아침에 떠났을 때와는 다르게 여러 대의 차량이 양각도 국제 호텔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버스에서 내리니 대기하고 있던 김금철이 내게 와서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세진 동무만 저를 따라오고 다른 사람들은 호텔 안에서 얌전히 대기하라고 전하라우.”

나는 직원들에게 호텔 안에서 대기하라고 전한 뒤 김금철을 따라 이동했다.

그는 나를 김설송의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김설송이 나를 반기며 말했다.

“오프라인 평양 지국의 첫 번째 뉴스입네다.”

“네?”

“북남정상회담이 내일 개최된다는 뉴스를 지금 바로 송고하시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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