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200)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나 있던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진정이 되었는지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리고 더 이상 뱉을 말이 떨어지자.

그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를 다독이며 말했다.

“어르신, 하실 말씀은 다 끝나셨습니까?”

그는 대답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흐느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더니 부축해 주겠다는 우리를 뿌리치고는 임시 스튜디오를 나섰다.

비틀거리며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슬퍼 보였다.

그를 바라보던 경찰관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제는 좀 속이 시원해지셨을까요. 깽판 치는 노인네인 줄만 알았는데 저런 사연이 있을 줄이야…… 가슴이 아프네요. 가슴이.”

갈 길이 멀었다.

많은 이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기 위해서는 오프라인이 더욱 커지고 영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각계 분야의 인터뷰를 마친 우리는 마지막 순서로 군부대를 찾았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가장 큰 변화를 보일 곳이 바로 국방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정일과 이국대는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음을 전 세계에 선포하였다.

또한 군사적 긴장을 일으킬 수 있는 일체의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한 만큼 최전방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랐다.

오프라인에서는 조를 나눠 최전방 부대를 방문, 인터뷰에 나섰다.

나와 박창후는 그중에서도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제6보병사단을 방문했다.

카메라 장비를 잔뜩 짊어지고 온 박창후가 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키야.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박 본부장님, 여기 철원에서 근무하셨다고요?”

“네. 제가 여기 청성부대에서 근무했다, 아닙니까! 우 사장님도 아시죠? 대한민국 군부대에서 가장 빡신 곳이 바로 여기 청성부대라는 거?”

“그런가요? 저는 공군을 나와서 육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3월인데도 이렇게 추운 거 보면 겨울에는 정말 추울 것 같군요.”

박창후가 싫은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벌벌 떨더니 말했다.

“으…… 맞습니다. 한겨울 체감온도가 영하 40, 50도는 우습죠. 손발은 꽁꽁 어는데 야밤에 밖에서 계속 순찰해야 합니다. 자대 배치를 여기로 받으면 다들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박창후가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여기 들어온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하하. 무시무시한 곳이군요.”

오후 무렵 철원에 도착한 우리는 사단장과 인사를 나누고 청성부대의 GOP 근무를 직접 체험하기로 하였다.

이제 곧 GP가 철거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마지막 기록을 남기자는 의미였다.

“DMZ 내에서 GP를 공동 철수시키면 DMZ는 정말로 평화의 비무장 지대로 바뀔 수 있겠군요.”

내 말에 제6사단 사단장인 심정석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비무장 지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지금까지는 남과 북 모두 중화기를 반입하여 경계를 서고 있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네. 저희도 기대가 큽니다. 그런데 사단장님, GOP 철책 근무는 오늘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가 맞나요?”

“네. 비무장 지대에서 밤을 새우며 경계 근무를 하는 일정입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괜찮겠습니까?”

“역사를 기록하는 현장이니까요. 다음 달이면 GP가 철거되는데 그 마지막 모습을 남기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취재를 오신다고 해서 사단장인 저도 감회가 남다릅니다.”

“그리고 여기 박창후 본부장님이 청성부대 출신이라고 하니 GOP 근무를 하는 데 있어 제가 많은 도움을 받을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박창후가 심정석을 향해 빠르게 거수경례하였다.

“필승! 걱정 마십시오, 사단장님. 제가 DMZ 선배로서 오늘 우세진 사장님을 옆에서 잘 모시겠습니다. 1분 1초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커피도 엄청나게 마시고 왔습니다.”

“하하. 든든합니다. 오프라인 분들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저희 부대 촬영도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단장과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민간인 출입통제선 검문소를 통과한 뒤 최전방으로 이동하였다.

최전방에 도착하자 오늘 우리를 인솔할 박경원 상사가 장비를 내주었다.

“비무장 지대지만 개인화기는 반입이 가능하죠?”

내 물음에 박경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소총이나 권총 등은 반입이 가능합니다만 다음 달 GP가 철거되면 이후에는 개인화기도 반입을 금지한다고 하더군요.”

“네. 이번 정상회담에서 체결한 합의서에 따르면요.”

곧 실탄이 지급되고 우리와 함께 GOP 근무에 나설 부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신고합니다! 상사 박경원 등 14명은 GOP 완전 경계 작전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이어서 서로의 장비를 점검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병사들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서로를 살펴보았다.

“저 검은색 물건은 뭡니까?”

“야간 감시할 때 쓰는 조준경입니다. 밤에는 어두우니까 저걸 써서 목표물을 볼 수 있게 빛을 증폭시켜 주는 거죠.”

이윽고 어둠이 서서히 깔리는 가운데 우리는 철책을 지나 DMZ로 진입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이병에게 말을 걸었다.

“부대 전입한 지 일주일 됐다고요?”

“네! 이병 박병만! 그렇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DMZ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자 제일 앞에 있던 박경원 상사가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주의를 줬다.

나는 조용히 말해도 괜찮으니 작게 말하라고 이야기한 다음 다시 그에게 물었다.

“DMZ는 뭔가 밖과는 다른 세상 같은 느낌이 드네요. 어떠신가요?”

“이병 박병만! 오늘 여기 처음 들어왔습니다! 조금 무섭습니다!”

“오? 오늘 첫 DMZ 근무야? 헤헤. 오금 지리지 마라.”

박창후가 박병만을 놀리듯 말했다.

“병만 씨는 고향이 어딥니까?”

“네! 강원도 원주입니다!”

“그럼 강원도에서 강원도로 온 거군요. 고향을 지키는 기분도 들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무섭지만 고향과 부모님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사명감도 듭니다!”

“멋지네요.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보셨나요?”

“네! 봤습니다!”

“어땠나요?”

“곧 통일이 될 것도 같고, 최전방 부대원으로서 좋은 결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앞으로 북한하고 더 사이가 좋아지면 군대 가는 일도 조금…….”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흐렸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 모르겠는가.

‘1분 1초가 아까운 청춘의 아쉬운 시간을 더는 버리지 않아도 될 테니.’

곧 우리는 전방에 보이는 한 작은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초소 안에는 나와 박창후.

그리고 곧 전역을 앞둔 병장 최인상과 이병 박병만이 함께였다.

한밤의 DMZ는 그야말로 고요 그 자체였다.

적막한 가운데 철책을 따라 경계등이 내뿜는 주황빛이 마치 띠처럼 멀리 이어져 있는 풍경이 실로 장관이었다.

일정 시간마다 초소를 지키다 다른 초소로 옮기는 일이 이어졌다.

졸릴 법도 한데 최인상과 박병만의 두 눈은 여전히 초롱초롱했다.

“드르렁…….”

오히려 내게 GOP 근무의 삼엄함에 관해 이야기하며 절대 잠을 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던 박창후는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최인상에게 물었다.

“최 병장님은 전역이 얼마 안 남았다고요?”

“네. 이제 한 달 뒤면 전역입니다. 너무 기분 좋습니다.”

“그렇겠네요. 곧 자유인이 될 테니.”

“그것도 그렇지만 우세진 사장님을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이지 행복합니다.”

“네? 저를요?”

“네! 제가 신방과를 다니는데 오프라인은 저의 워너비입니다! 졸업하면 꼭 오프라인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해서 꼭 와 주셨으면 좋겠네요.”

나는 경계 근무를 서면서 최인상과 박병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20대라서 그랬을까.

처음에는 나를 경계하던 두 사람도 어느덧 나를 친한 형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그럼 우 사장님. 저 제대하고 오프라인 놀러 가도 괜찮습니까?”

“그래요. 꼭 연락 주세요.”

“야호! 동기들에게 이야기하면 절대 안 믿을 겁니다. 우 사장님하고 같은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섰다고 하면요. GOP 근무도 이번 달이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정말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신방과 대학생들에게 오프라인은 매력적인 곳인가요?”

“물론이죠! 요즘 누가 신문 보나요. 다 오프라인 보죠. 제 친구도 원래 꿈이 시사 프로그램 PD였는데, 오프라인에 기자로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건 왜죠? 저희는 시사 프로그램은 따로 안 만드는데.”

“아뇨, 아뇨. 다큐멘터리 영화로 해외에서 상도 타고, 김정일 위원장 인터뷰도 따고! 방송국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잖습니까. PD 지망생이든 기자 지망생이든 죄다 오프라인 가고 싶어 합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요!”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있던 박병만도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최 병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오프라인은 가장 취업하고 싶은 회사 1순위입니다!”

“다행이네요. 저희가 가는 방향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기분 좋게 웃는 사이.

최인상이 박병만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어이, 박병만이.”

“네! 이병 박! 병! 만!”

“어디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이병 나부랭이가 끼어드나?”

“이병 박! 병! 만! 시정하겠습니다!”

“크크크. 농담이다, 농담. 난 이제 곧 제댄데 무슨 병정놀이도 아니고. 그나저나 우 사장님 내일까지 여기 계시는 거면 위문열차 촬영도 하시는 겁니까?”

“위문열차요?”

“네. 군통령이 오거든요!”

“군통령?”

* * *

“와아아아!!”

“화이트스노우!! 화이트스노우!!”

공연장을 꽉 채운 부대원들이 무대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모두 4명이었다.

하늘하늘한 미니스커트와 배꼽이 드러난 상의가 귀여우면서도 섹시했다.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바로 얼마 전 함께 안재영의 별장을 다녀온 화이트스노우의 리더 김혜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부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저희 타이틀곡 이름이 뭐죠?”

그러자 부대원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소리쳤다.

“무제한!”

“딩동댕! 아시죠? 다 같이 후렴구 따라 해 주시는 거?”

“네에에에!!!!”

함성과 함께 이윽고 4인조 걸그룹 화이트스노우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최전방 군부대 공연이라 그런지 조명이나 음향 등 많은 부분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화이트스노우의 자세는 남달랐다.

그 누구보다도 환한 웃음과 함께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도 그녀들의 팬이 될 것 같았다.

‘노래도 좋고,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인지도가 별로 없지?’

이덕오가 화이트스노우의 진성팬이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룹은 아니었다.

그런데 위문열차에서는 군통령이라고 불리다니 신기할 일이었다.

어젯밤 최인상 병장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밖에서는 잘 모르는 그룹이지만, 위문열차에서는 늘 볼 수 있는 팀이거든요. 육해공 가리지 않고 어디든 달려와 주는데 군인들이 미워할 수가 있나요!”

박창후가 카메라로 그들의 무대를 담으며 중얼거렸다.

“이야. 쟤네 누구죠? 쩌는데요?”

“화이트스노우라고 이덕오 이사가 좋아하는 신인 걸그룹입니다.”

“이 이사님이요? 그나저나 저도 나름 걸그룹 좋아하는 삼촌팬인데, 쟤네들은 처음 보네요.”

“어제 초소에 있던 최 병장이 그러더군요. 군통령이라고요.”

“초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요?”

“박 본부장님 주무실 때 많은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헉! 제가 초소에서 잠을 잤다고요?”

“기억 안 나세요? 코까지 골면서 주무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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