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00)

내 말에 박창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흠흠. 아무튼 저 친구들 정말 잘하네요. 곧 뜨겠어요. 뜨겠어.”

“그럼 좋죠.”

“네? 뭐가요?”

“아닙니다.”

나는 그녀들의 공연을 끝까지 감상하였다.

노래와 안무도 좋지만, 무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녀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어서 그녀들은 두 번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박창후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위문열차는 공연해 봤자 수당이 크진 않을 텐데, 뭘 저렇게 열심히 하나 모르겠네요.”

“페이가 많이 낮나 보죠?”

“그럼요. 여기 나와 봤자 저 친구들이 받아 가는 돈은 일 인당 10만 원도 채 안 될 겁니다.”

“그 정도인가요? 공연 오는 게 손해인 거 같은데요?”

“위문 공연이잖아요. 그래서 A급 걸그룹들은 잘 안 오는 곳이기도 하고, 오는 친구들도 대충 행사만 때우고 가는 경우가 많죠. HBS에 있을 때 몇 번 촬영 온 적이 있는데 저렇게 열심히 하는 친구들은 저도 처음이네요.”

공연장의 장병 모두가 화이트스노우의 노래를 마치 자신들의 노래인 것처럼 열창했다.

비록 아름다운 화음은 아니었지만.

* * *

위문열차 공연이 끝나고.

사단장의 초대를 받은 우리는 청성부대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간부 식당으로 이동했다.

심정석 사단장은 우리를 위해 어딘가에서 멧돼지를 잡아 왔다.

“DMZ 근무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철원에서 직접 잡은 멧돼지 통구이 드시면서 어제의 피로를 푸시죠!”

절반으로 자른 드럼통 밑에는 숯불이 가득한 가운데.

그 위로 털가죽이 벗겨진 멧돼지가 쇠꼬챙이에 꽂힌 채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박창후가 침을 흘리며 말했다.

“역시 청성부대! 클래스가 다릅니다.”

“하하. 고기뿐 아니라 술도 잔뜩 준비해 놨으니 같이 즐기시길 바랍니다.”

심정석의 말처럼 식탁 위에는 소주부터 맥주, 위스키까지 다양한 종류의 술들이 가득했다.

박창후가 기분 좋게 술을 살피는 사이.

간부 식당 입구 쪽에서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화이트스노우 멤버들이 들어왔다.

심정석이 그녀들을 내게 소개하며 웃었다.

“조금 전에 공연 보셨겠지만, 군대에서는 대통령보다 인기가 많은 친구들입니다. 화이트스노우라고 제가 특별히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셨습니다.”

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사이.

나와 눈이 마주친 김혜원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 4장 어둠의 습격자

나는 뒷걸음치는 김혜원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오, 오빠가 여길 어떻게?”

김혜원은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와 김혜원이 인사를 나누자 주변에서 의아함을 표했다.

특히 박창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 우 사장님? 이분들 아세요?”

“아 네. 우연찮은 기회로 알게 된 동생입니다.”

“이런 기막힌 인연이! 아 참. 오프라인에서 영상을 총괄하고 있는 박창후라고 합니다. 아까 공연 너무 좋던데요?”

“감사합니다. 화이트스노우 리더인 김혜원입니다.”

이런 게 걸그룹의 자세인 걸까.

김혜원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박창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화이트스노우 멤버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각자 자리에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잘 익은 멧돼지 통구이가 한눈에 보기에도 기가 막혔다.

박창후는 산적처럼 한 손으로 고기를 우적우적 뜯으며 만족감을 보였다.

“으아. 진짜 죽이네요, 이거. 청정지역 DMZ에서 나고 자라 그런지 아주 육질이 기가 막혀요!”

그 소리를 들은 심정석 사단장이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DMZ에서 잡은 건 아니지만 철원에서 잡은 건 맞으니 깨끗한 놈이긴 합니다.”

박창후는 무안했는지 갑자기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더니 건배 제의를 했다.

그는 빠르게 폭탄주를 말더니 모두에게 돌렸다.

“자! 모두 술잔을 높이 들어 주세요!”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모두 술잔을 든 것을 확인하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수사불패!”

그러자 모두의 입에서 박창후의 말에 화답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청성투혼!!”

나는 자리에 앉은 박창후에게 살며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비록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패하지 않는 청성의 투혼이라는 뜻인데, 제6사단 구호입니다.”

“박 본부장님이 여기 출신인 건 확실하네요.”

“그럼요. 설마 제가 출신 부대를 속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기분 좋게 술과 음식을 먹으며 이날 식사 자리를 즐겼다.

나는 술잔을 함께 들긴 했지만, 전날 먹은 음식이 체했는지 속이 좋지 않아 술 한 모금 입에 댈 수 없었다.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는데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건 나름의 고역이었다.

박창후가 나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진짜 안 드십니까?”

“네, 속이 별로 안 좋네요. 제 몫까지 박 본부장님이 많이 드세요.”

“크윽. 정말 안타깝네요.”

나는 심정석의 옆에 앉으면 불편할 것 같아 일부러 제일 먼 자리에 앉았는데 박창후는 그게 불만이었던 것 같다.

“사장님은 오늘 우리가 주인공인 저녁 자리인데, 왜 이렇게 먼 자리에 앉으셨어요?”

“사단장 옆에 앉으면 불편할 것 같아 그랬죠.”

“휴. 저기 보세요. 저희가 저 자리에 앉지 않으니까 어린 여성분들이 고생이시잖아요.”

심정석은 자신의 주변에 화이트스노우 멤버 넷을 앉히고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막내를 뺀 넷에게 술잔을 돌렸다.

박창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거저거, 좀 위험한 거 아닙니까?”

“뭐가요?”

“아니, 무슨 황제도 아니고 걸그룹 멤버 네 명을 자기 주변에 앉히고 술을 따르다니요.”

“왜요? 제가 보기에는 아빠와 딸처럼 화기애애한 것 같습니다만.”

“아빠와 딸은 무슨요. 저희가 있으니까 그런 거겠죠. 아까 리더인 친구와는 우 사장님도 아는 사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따 살짝 물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늘 막 팬이 되었는데 삼촌이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알았으니까 박 본부장님도 오늘 적당히 드세요. 이거 끝나면 다시 제주도 촬영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 맞다. 그러네요. 제주도에 가야 하는구나…….”

박창후의 표정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내가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영화가 생각만큼 잘 안 찍히나요?”

“아니오. 그런 건 아닌데…… 찍을수록 화가 나서요.”

“네?”

“제가 작품에 너무 몰입한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시절에 제주도민들이 잔학하게 살해당한 걸 머릿속으로 상상하다 보면 기분이 좀 그렇더라고요. 울적해지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이번 작품이 그분들에게 위령제가 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주세요. 박 본부장님도 감정 컨트롤 잘하시고요.”

“네네. 아무튼 이번에 내려가면 당분간 서울에는 못 올라올 것 같은데 괜찮겠죠?”

“네, 그동안 서울이랑 제주도랑 왔다 갔다 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작품 막바지인 만큼 그쪽에 보다 신경을 써 주세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박창후가 찍고 있는 4.3사건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는 올해 여름에 개봉하는 것을 목표로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제주도에서 영화 촬영에만 집중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의 손길이 필요한 일이 많았다.

‘촬영 쪽은 취재나 SNS, 번역 등과는 다르게 조금 더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이다 보니 박 본부장이 고생이 많네.’

가끔 입이 험할 때도 있었지만 따뜻한 마음씨에 속은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결코 오프라인이 오늘만큼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

그와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요의를 느낀 나는 근처에 있는 장교에게 화장실 위치를 물었다.

“아 화장실이요? 여기가 오래된 곳이다 보니 좀 먼 데 있습니다. 간부 식당 나가셔서 오른쪽으로 돈 다음 죽 직진하시다가 모퉁이를 돌면 나올 겁니다. 잘 모르겠으면 같이 가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그렇게 간부 식당을 나와서 주변을 걷다 보니 화장실이 보였다.

‘어제 GOP 근무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철원의 3월은 무척이나 춥구나.’

봄인데도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마치 한겨울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

볼 일을 마친 나는 추위를 느끼며 서둘러 간부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누군가 모퉁이 앞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꺄아!”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지만, 여성은 무언가 거대한 물체와 싸우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여성 쪽으로 몸을 움직여 거대한 물체를 손으로 뿌리쳤다.

무언가 둔탁하면서도 물컹한.

무척 기분 나쁜 감촉이었다.

주먹보다 큰 물체는 내 손을 맞고도 계속해서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제기랄! 이게 뭐지?’

나도 모르게 속에서 욕이 나올 뻔했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무언가가 사정없이 움직이는데 남자인 나도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여성의 손을 냅다 잡고는 간부 식당 쪽으로 뛰었다.

다행히 정체불명의 생물체는 더는 우리를 쫓아오지 않았다.

간부 식당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숨을 돌리며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였다.

“헉헉…… 뭐야! 혜원이잖아?”

“하아 하아…… 응? 세, 세진이 오빠?!”

나는 서둘러 혜원의 손을 놓았다.

“아,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아뇨. 저도 정말 놀라서…… 그런데 저게 뭐죠?”

“나도 잘 모르겠네. 박쥐인가 아님 나방? 뭔가 엄청 크던데 분명한 건 날개가 있더라.”

“그렇죠?! 화장실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저한테 달려들어서 정말 놀랐어요. 고마워요, 오빠.”

“뭘. 사실 나도 깜짝 놀랐어. 어둠 속에서 막 튀어나오는데 암살자 같아서 무섭더라고.”

“헤에. 오빠도요? 다 큰 남잔데?”

“크크. 나는 사람 아니냐?”

극한의 공포에서 해방된 탓일까.

우리는 서로 동지애를 느끼며 안도감에 웃음을 보였다.

김혜원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세진이 오빠. 여긴 무슨 일이에요? 오빠 얼마 전까지 평양에 있었잖아요?”

“아. 취재하려고 방문했지.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으니 최전방 부대에도 뭔가 변화가 있지 않겠어?”

“그렇구나. 아까 오빠보고 깜짝 놀랐어요. 어?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하고요.”

“하하. 뭐 못 볼 사람도 아니고. 그나저나 너흰 여긴 자주 와?”

“아 여기요?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은 아니에요.”

“그래? 군인들이 너희보고 군통령이라고 하더라. 인기가 장난 아니던데?”

내 말에 김혜원의 두 볼이 벚꽃처럼 물들었다.

“공연 보셨어요?”

“물론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 정말 잘하더라. 군인들도 좋아라하고.”

“아네요. 군대에서만 그렇지 밖에서는 전혀 인기 없어요.”

“뭘. 덕오도 그랬잖아. 라이징 스타라고.”

“그건 덕오 오빠가 우릴 잘 봐줘서 그렇고요.”

갑자기 조금 전 박창후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김혜원에게 물었다.

“저기 혜원아.”

“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