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200)

“심정석 사단장이 너희를 옆에 앉히고는 술을 주던데, 괜찮니?”

“네? 뭐가요?”

“아니, 그게 뭔가 장난을 친다거나 그런 건 아닌가 싶어서.”

“에?”

김혜원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뭐야. 지금 오빠 무슨 생각 하신 거예요?”

“응? 나는 혹시나 해서.”

“휴. 잠시만요. 진짜 웃기다. 이거 사단장님이 아시면 화낼지도 모르겠네요.”

김혜원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내게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사실 저희가 위문열차에 이렇게 자주 등장할 수 있게 해 주신 분이 바로 심정석 사단장님이에요.”

“그래?”

“네, 저희가 데뷔한 지 1년 되었거든요.”

“벌써?”

“네, 저희가 그렇게 막 신인 그룹은 아니에요. 데뷔하고 처음으로 했던 공연이 여기 청성부대 위문열차 공연이었는데, 그때 사단장님이 저희 공연을 좋게 봐주시고 여기저기 추천해 주셨어요.”

“아하.”

“덕분에 위문열차 공연에 단골손님이 될 수 있었고요. 저희한테는 너무 고마운 분이죠.”

“그랬구나. 그것도 모르고 미안하다.”

“아네요. 저희 걱정해 주셔서 그런 거잖아요. 괜찮아요.”

김혜원은 활짝 웃으며 나를 보다가 갑자기 굳은 표정이 되어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오빠.”

“응?”

“저기 정말 미안한데요.”

“괜찮으니까 말해 봐.”

“저랑 같이…… 화장실 좀 가 주시면 안 될까요?”

김혜원이 구슬처럼 커다란 두 눈동자를 깜빡이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 *

김혜원과 함께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간부 식당으로 돌아오자.

그새 만취한 박창후가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여! 우 사장님. 어디 가셨어요! 그렇게 찾았는데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화장실에요.”

“아 진짜 혼자만 가고, 서운하게!”

“내일 촬영도 있는데 적당히 드시고 들어가시죠.”

“에이. 우 사장님은 제 술도 한 잔 안 받으시고! 서운합니다. 진짜.”

“저 속 안 좋은 건 박 본부장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또 왜 그러세요.”

“아 진짜, 제가 우 사장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말이죠. 제가…….”

갑자기 말을 하던 도중에 박창후가 식탁에 코를 박고는 쓰러졌다.

원래 이렇게 술이 약한 사람은 아닌데 어제 DMZ 근무로 날을 샌 덕분인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오전에 부대 복귀해서도 쉴 때 잠은 안 자고 촬영한 영상을 살피는 것 같더니만.’

나는 주변에 양해를 구한 뒤 그를 이끌고 간부 숙소에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만취한 그를 침대에 눕히고 다시 간부 식당으로 돌아오자 주변이 시끄러웠다.

검은색 승합차가 서 있는 가운데 심정석과 장교들은 물론 화이트스노우 멤버들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다가서며 묻자 화이트스노우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 상태가 안 좋아서요. 올 때는 괜찮았는데 또 이러네요.”

“어떻게 안 좋은데요?”

내 말에 김혜원이 답했다.

“시동을 켜면 막 핸드폰 진동 온 것처럼 차가 부르르 떨려요.”

그러자 막내인 친구가 입술을 죽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그러게 오빠! 내가 전에도 차 바꾸자고 그랬잖아요. 진짜 무서워요.”

“미안하다. 내가 차 수리를 한다는 걸 깜빡했네. 이번엔 꼭 고칠게.”

조폭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덩치의 남자가 10대 소녀에게 꾸지람을 당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나는 차를 살피며 물었다.

“이대로 가기에는 위험한 것 같은데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머리 아프네요.”

“내일 정비소 부르고 오늘 하루는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됩니까? 사단장님도 그 정도는 이해해주실 것 같은데요.”

그러자 매니저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휴. 안 됩니다. 내일 오전에 라디오 생방송 일정이 잡혔거든요. 그거 펑크 나면 우리 화이트스노우 큰일 납니다. 어떻게 잡은 일정인데요.”

어쩐지 김혜원을 비롯한 화이트스노우 멤버 모두 단순 차량 이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네요. 제 차에 타시죠.”

밤 10시가 넘은 시각.

사방이 어둠으로 자욱한 왕복 2차선 국도에 전조등을 켠 차량 한 대가 지나갔다.

날렵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어쩐지 움직임이 둔하다 싶었는데.

안에는 차량 정원을 넘긴 성인 여섯 명이 꽉 들이차 있었다.

앞자리엔 두 명의 남성.

뒷자리엔 네 명의 여성.

그중 조수석에 탄 덩치가 산만 한 남성이 큰 소리로 웃었다.

“으하하! 그놈의 정체는 분명 팅커벨이었을 겁니다.”

화이트스노우의 매니저 문정철이 김혜원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의 말이 맞을 거라며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뒷좌석 가운데에 앉은 김혜원이 앞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팅커벨이요?”

“응. 전방에서 근무했던 남자라면 다들 잘 알 텐데, 팅커벨이라고 사람 얼굴만 한 사이즈의 나방이 있어.”

“그게 나방이었어요?”

“아마도? 주먹보다 크고 날개가 있다고 그랬지? 그리고 어둠 속에서 막 달려들었다며?”

“네.”

“그럼 팅커벨 중에서도 제왕급인 산왕물결나방이었겠네. 보통 날벌레들은 빛을 좋아하잖아? 근데 그 녀석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거든.”

“진짜 깜짝 놀랐다고요! 너무 무서웠어요.”

“크크. 군인들도 똑같아. 그 거대한 녀석이 얼굴 쪽을 향해 날아온다고 생각해봐. 온 신경이 곤두서면서 극한의 공포를 느끼지.”

“꺄아! 진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아!”

김혜원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나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후방에선 생전 보질 못한 녀석인데 그게 말로만 듣던 팅커벨이었군.’

나도 모르게 조금 전 공포가 떠오르며 등골이 오싹했다.

“그나저나 우 사장님. 정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우 사장님은 저희 화이트스노우의 구세주세요!”

“뭘요. 초면도 아닌데 서로 도우며 살아야죠.”

“그러고 보니 전에 신림동 골목길에 데려다줄 때 오프라인 기자분들 만난다고 했는데 그때 우 사장님도 계신 건가요?”

“네, 저도 그때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셨구나. 저희 토닉 엔터랑 오프라인이랑 엄청 친하다고 하던데 진짠가 봐요?”

토닉 엔터는 이슬아와 화이트스노우가 소속된 연예 기획사로 국내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사 중 하나였다.

문정철이 감격에 겨운 듯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이슬아와 안재영이 사귄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이슬아 씨가 자기가 오프라인 기자들 잘 안다고, 화이트스노우도 소개해 줘야겠다고 말씀 주시더라고요.”

“그러셨군요.”

“정말 너무 고마운 분이에요. 소속사 내에서 유일하게 저희 친구들 챙겨 주시는 분이기도 하고요.”

내가 알기로는 토닉 엔터 소속 연예인들이 10팀은 넘을 텐데 유일하게 챙겨 준다는 말이 이상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문정철이 말을 이었다.

“저희 친구들 잘 좀 부탁드릴게요. 제가 봤을 때 진짜로 예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뭣보다 정말 마음씨 착하고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거든요! 그런데 데뷔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 이름조차 알리지 못해서 매니저로서 너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문정철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뒤에 타고 있던 화이트스노우 멤버들이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아냐, 왜 오빠가 미안해해. 다 우리 잘못이지.”

“맞아. 정철이 오빠가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거 우리 다 알아.”

“그래! 오빠 없으면 우리도 이렇게 절대 못 해. 그러니까 그런 소리는 다시는 하지 마! 응?”

모두가 문정철을 응원하는 가운데 백미러를 통해 본 김혜원의 몸이 조금씩 들썩거렸다.

“어, 언니! 울지 마! 언니까지 진짜 왜 그래!”

“혜원이 언니!”

모두가 한 가족처럼 김혜원을 부둥켜안더니 이내 차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걸그룹이라고 하면 왠지 싸가지 없고 개인플레이만 할 것 같은데 이 친구들은 케미가 좋구나.’

이미 이덕오의 집에서 같이 술을 마실 때도 느꼈던 점이었지만 오늘 또 이런 모습을 보니 화이트스노우의 동료애는 절대 가식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인기가 없나요? 다들 재능도 있고 열심히 하고 무엇보다 소속사도 유명한 곳이잖아요?”

그러자 문정철이 울고 있는 뒷좌석을 돌아보더니 입에 손가락을 대고 말했다.

“이거 진짜 비밀인데요…….”

* * *

화이트스노우 멤버들을 숙소에 데려다준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와! 진짜 저만 버리고 그렇게 가실 수 있는 겁니까?

혼자 장교 숙소에서 일어난 박창후는 일어나자마자 내게 전화를 걸더니 불만을 토로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화이트스노우 차량이 고장 나서요.”

-아니, 우 사장님은 걔들이 중요해요, 아니면 제가 중요해요?

“당연히 박 본부장님이 더 중요하죠.”

-아니, 그런데 저한테는 말 한마디도 없이 혼자 가시고! 저 짐도 많은데 말이죠.

“긴급을 요하는 건이었으니 박 본부장님이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돈 얼마 나와도 상관없으니 택시 불러서 서울로 오세요.”

-네?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업무로 가신 건데요.”

-하하. 네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럼 이따 사무실 들어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박창후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애교 섞인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박창후에게는 미안하지만, 덕분에 화이트스노우는 오늘 아침 예정되어 있던 7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무사히 도착해 생방송에 출연할 수 있었다.

“오늘 게스트는 특히 군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분들입니다. 군통령! 화이트스노우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상큼 발랄 걸그룹 화이트스노우입니다!”

새벽에 숙소에 도착했을 텐데도 그런 내색 하나 없이 목소리에 활력이 가득 담긴 걸그룹 특유의 인사말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내 차에 타고 있던 이들의 목소리가 차량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게 신기했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는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은 TV만큼의 영향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은 회사에 일찍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활력 충전소라 할 만큼 DJ와 게스트의 재미난 입담과 활력이 중요한 자리였다.

‘아침 기분이 하루를 좌우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화이트스노우가 군통령이라고 불리는 이유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인 가운데.

MC가 짓궂은 말투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데뷔한 지 1년이나 되었으면 이제 신인 걸그룹이라고 하기는 좀 애매하네요?”

하지만 이런 질문에는 이골이 났는지 김혜원이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네. 그래서 저희는 스스로를 중고 신인이라고 부르는데요. 진짜 신인은 아니지만, 마음만큼은 여전히 신인이랍니다. 청취자 여러분! 저희 화이트스노우 많이 사랑해 주세요!”

“오호! 중고 신인 좋은데요? 좋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고 신인들이 부르는 노래를 잠시 듣고 오시죠! 화이트스노우가 부릅니다. 무제한!”

곧 위문열차에서 들었던 화이트스노우의 타이틀곡, ‘무제한’이 차 안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경쾌한 댄스곡인 무제한은 흥겨운 멜로디와 함께 중독성 있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곡이었다.

‘어젯밤, 문정철한테 그 이야기를 안 들었다면 도대체 왜 얘네들이 못 뜨는 건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겠지.’

나는 노래에 집중하며 문정철이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를 되뇌었다.

* * *

“혜원이가 대표님한테 찍혔거든요.”

“대표님이요?”

“네. 저희 토닉 엔터 김대진 대표님이요.”

본인이 가수 출신이기도 한 김대진은 타고난 사업 수완으로 연예 기획사를 설립, 회사를 빠르게 키운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증권가 연예계 찌라시에 등장하는 그에 관한 소식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투성이였다.

‘밤의 황제라거나 소속사 여자 연예인들에게 장난을 치는 일이 많다던데.’

실제로 몇 년 전 토닉 엔터 출신의 모 여배우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업계에서는 김대진 대표가 그녀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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