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대표님이 인성이 좋은 편은 아니시거든요. 또 여자를 좀 밝히기도…….”
문정철이 뒤에 있는 김혜원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김혜원과 화이트스노우 멤버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창밖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희 내부에서는 간택이라고 하는데…….”
“간택이요?”
“네, 그…… 아직 인기를 얻지 못한 여배우나 가수를 대표님 집으로 불러서…….”
“불러서?”
“어휴. 그 이상은 제 입으로 차마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아무튼 좀 그래요.”
“그래서요?”
“데뷔 초기에 대표님이 혜원이를 한 번 부른 적이 있었는데, 혜원이가 단칼에 거절했거든요.”
김혜원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불쾌한 표정을 짓고는 두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얻거나 언론에 제보할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그게 계약이 좀 복잡해요. 그리고 괜히 문제 일으켰다가 이쪽 업계에서 매장될지도 모르고요.”
“휴. 그런데 대표에게 찍혔으면 그룹을 해체할 수도 있을 텐데 그건 왜?”
“아. 김대진 대표가 좀 성격이 이상한 양반이에요. 변태스러운 면이 있죠.”
“변태스럽다고요?”
“그러니까 멤버들 모두 그만두겠다는 한마디 없이 악으로 깡으로 버티니까 회사 지원 없이 니들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지켜보겠다며 저래요. 지원은 하나도 안 해 주고요. 아니, 지원이 뭐야! 훼방만 놓지.”
“그거 참. 이상한 양반이네요.”
“저희 차량 보셨죠? 그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구형 승합차를 타고 다니는 건 저희 기획사 소속 연예인 중에서는 우리 화이트스노우가 유일해요.”
“고생이 많네요.”
“뭘요. 저야 다 큰 성인이니까 다른 일자리 알아보면 그만이지만, 저희 멤버들은 다들 어리고…… 또 이 바닥에서 괜히 나쁜 이야기 돌아서 좋을 거 없으니까요. 진짜 악바리처럼 버티는 거예요.”
나는 그의 이야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 연예계는 무척이나 좁았다.
한 다리 건너면 서로 모르는 사이가 없고, 괜히 안 좋은 소문이 돌면 유명했던 이들조차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저번에 이슬아 씨 말로는 자기가 아끼는 후배들이라고 하던데, 그럼 슬아 씨도 김대진 대표와 사이가 안 좋은 건가요?”
“아뇨. 슬아 씨는 저희 소속사에서 가장 잘나가는 연예인이니까요. 김대진 대표도 함부로 못 하죠. 슬아 씨도 김대진 대표가 저희 친구들 미워하는 걸 아니까 더 챙겨 주시는 거고요. 늘 고마워요.”
문정철이 절대 아니라는 듯 두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계약이 언제까지인데요?”
“올해까지요. 걱정이에요. 대표님이 올해까지도 차트 10위 안에 못 들면 그동안 투자한 금액 다 뱉어놓고 나가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거든요.”
“네? 기획사가 소속 연예인에게 투자를 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걸 뱉어내라고요?”
“그게. 계약서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조항들이 있어서…….”
“아니,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사인을 했어요?”
내 말에 문정철과 화이트스노우 멤버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갑자기 내 바로 뒷자리에 앉은 막내가 울분을 토하며 말했다.
“저희도 그런 조항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냥 대표님이 다 저희 좋은 것만 있으니까 걱정 말고 도장 찍으라고 해서…….”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모두가 그녀를 부둥켜안고 뒷좌석은 다시 한번 눈물바다가 되었다.
한밤중 어둠을 달리는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강원도 산골을 공허하게 메웠다.
* * *
평양에 오프라인의 북한 지사가 설립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평양 지국장에 임명된 안재영은 3명의 현지 기자를 채용하여 빠르게 기사를 생성했다.
특히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김정일의 집을 취재하여 공개한 것은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무슨 궁전인지 알았습니다.”
“하하. 저도요. 동행한 북한 기자들이 정말이지 엄청나게 감격하더라고요.”
“지도자의 집을 직접 방문해서?”
“그렇죠. 평소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내부 언론에도 공개한 적이 없었는데요.”
“김정일이 자기 집도 공개하고, 일종의 유화 제스처 중 하나겠죠.”
“맞아요. 이번 정상회담이 단순히 쇼가 아니다. 우린 이렇게 열려 있고 변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죠.”
한 달 만에 지강원 기자와 함께 남한으로 귀환한 안재영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언론사 평양 지국장인 것은 물론 그동안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김정일의 집을 직접 취재한 장본인.
뿌듯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리라.
“어떤가요? 평양 생활은?”
“전기가 수시로 나가서 5층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할 일이 많지만, 신변의 안전을 위협받거나 하는 일은 없네요.”
“다행이네요. 북한에 있을 때 총격전이 있어서 걱정했거든요. 김설송은 잘 도와줍니까?”
“네, 며칠 전에도 사무실을 방문해서 격려해 주고 갔습니다. 기사 좋다면서요.”
“현지 채용한 기자들은 어때요?”
“네, 처음에는 대화가 잘 안 통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조금씩 맞춰가고 있습니다. 글도 잘 쓰고 눈치도 빠르고요. 셋 다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의 인재들입니다.”
“그밖에 공유할 만한 건 없습니까?”
“흠. 김정은은 첩첩 산골인 자강도 어딘가로 유배를 보냈다는데 정확한 위치는 절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옥류관 냉면을 매일 먹고 있습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안재영은 자타공인 평양냉면 마니아였다.
평양냉면의 성지인 옥류관 냉면을 매일 먹을 수 있다니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있을까.
그의 표정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하하. 즐거우시겠네요.”
“네. 그것만으로 평양행은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박 본부장님이 안 보이시네요?”
그는 주변을 살피며 박창후의 부재를 지적했다.
백철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박 본부장님은 다큐멘터리 마무리한다고 제주도에 내려갔습니다. 아마 한동안 못 올라올 겁니다.”
“이런. 3일 이따가 바로 평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쉽지만 이번에는 못 뵙고 가겠네요.”
그의 말에 이덕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안 본부장님. 박 본부장님을 찾기보다는 여친을 찾아야 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 오랫동안 못 봤는데 외롭진 않았어요?”
“아. 슬아요?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외롭거나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래요?”
“네. 영상통화도 매일 하고 전화도 자주 해요. 남한에 있을 때랑 별 차이 없습니다.”
이슬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며칠 전 있었던 화이트스노우의 불공정 계약 건이 생각났다.
마침 안재영은 환하게 웃더니 이슬아에게 전화가 왔다며 잠시 사무실을 비웠다.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앞으로 허리를 숙이고는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가 최근에 제보를 하나 받았습니다.”
“제보요?”
모두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화이트스노우라고 이슬아 씨가 소속되어 있는 토닉 엔터의 걸그룹이 있는데 그들이 무척이나 불공정한 계약에 힘들어하고 있다더군요.”
“네? 얼마 전에 같이 술 마셨던 걔네들이요?”
이덕오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홍지혜와 최루리가 눈살을 찌푸렸고, 그 옆에 앉은 이수빈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토닉 엔터의 김대진 대표는 업계에서 이상한 쪽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에요. 화이트스노우라는 걸그룹은 잘 모르지만, 그들이 어려움을 호소했다면 분명 김대진 대표와 엮인 일일 것 같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거 우리가 파볼 수 있을까요?”
“연예 기획사의 불공정 계약에 대한걸요?”
“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문제가 많더라고요.”
“음. 연예 기획사의 갑질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니까요.”
“이수빈 본부장님이 이쪽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TF 하나 구성하셔서 파 보시죠. 어때요?”
“네? 제가요?”
“저희 모두 기자잖아요. 사람은 붙여 줄 테니까 한번 해 보세요.”
“아니, 그래도 저는 디자이너인데…….”
“저희는 개발이고 디자인이고 촬영이고 모두 기자인 거 아시면서.”
내 말에 이수빈이 황당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 * *
그날 저녁.
나는 안재영에게 부탁하여 이슬아, 김혜원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안재영은 호텔 식당에 딸린 프라이빗룸을 예약하고는 우리를 불렀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둘이서 오붓이 데이트하고 싶었을 텐데 무리한 요구를 해서 미안해.”
“뭘. 그나저나 네가 이렇게 다 간곡히 부탁을 하고 무슨 일이 있긴 하구나?”
안재영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내게 물었다.
나는 김혜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슬아도 알고 있는 일이긴 할 텐데, 화이트스노우 멤버들이 소속사 내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 말에 이슬아가 김혜원의 얼굴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문제가 있긴 있죠.”
“문제라니 어떤 문제?”
“오빠한테는 따로 이야기 안 했는데 우리 소속사 사장이 좀 변태 같은 놈이거든.”
“그래? 전혀 몰랐는데!”
“내가 이야기한 적 없으니까.”
“그런데 너는 그럼 왜 거기 그대로 있는 거야? 사장이 이상하면 당장 나오면 되잖아?”
“그게…….”
그녀는 김혜원의 표정을 살짝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나한테는 귀찮게 하지 않고, 잘 대해 줘. 그런데 내가 여기 나가면 혜원이랑 다른 친구들한테 해코지할 것 같아서 차마 못 나가는 것도 있어.”
“뭐? 진짜로 그런 이유로 못 나가고 있는 거라고?!”
안재영은 조금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
그는 이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남자친구가 대한민국 최고 언론사의 본부장인데 왜 그런 말을 안 해 줬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잖아!”
“미안해 자기. 그래도 이건 생각보다 더 복잡해. 이쪽 바닥이 무척이나 좁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녀는 안재영의 두 손을 꼭 잡고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소 화가 누그러진 안재영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넌 뭘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아까도 네가 없을 때 다른 본부장들하고는 이야기를 나누긴 했는데 우리가 이쪽의 불공정 계약에 대해 시리즈로 다루는 기사를 내볼까 해.”
“시리즈 기사?”
“응. 살펴봤더니 화이트스노우 말고도 연예 기획사의 불공정한 갑질이 무척 많더라고. 이걸 전부 까발릴까 싶어.”
“흠. 그거 괜찮은데? 그런데 화이트스노우는 어떤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
나는 문정철이 내게 전한 이야기를 안재영에게 해주었다.
“뭐?! 그놈 완전 개쓰레기 아냐?! 슬아야 안 되겠다, 너 당장 거기 나와! 진짜 미친놈 아냐!”
“진정해. 슬아한테는 안 그런다고 하니까.”
“와, 진짜 완전 빡치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전에 한 번 찾아가서는 우리 슬아 잘 부탁한다고 인사도 했는데, 그런 쓰레기였어?”
“뭐야, 김대진 만난 적 있어?”
“한번. 소속사 대표한테는 슬아랑 사귄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랬지.”
“뭐래?”
“비굴한 얼굴을 하면서 그러던데. 아휴. 우리 본부장님. 슬아랑 저희 토닉 엔터 기사에 잘 좀 써 주세요. 하고.”
“너는 곧 평양에 돌아가야 하니까 이 일에는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마.”
“그럼 오늘 이 자리에는 왜 불렀는데?”
“슬아 도움을 얻고 싶어서 그랬지.”
“네? 제 도움이요?”
이슬아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응, 조직이나 업계의 비리를 밝히는 데 있어 내부 구성원의 제보와 목소리만큼 소중한 정보가 없거든.”
“그건 좀…….”
이슬아는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나도 잘 알아. 그 바닥이 얼마나 좁은지. 그렇지만 아까 너도 분명히 이야기했잖아. 여기 떠나면 화이트스노우 멤버들한테 피해가 갈까 봐 차마 못 떠나고 있다고. 그럴 바에는 제대로 지원 사격을 해 주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내 말에 이슬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내부에서 김대진을 견제하는 거랑 외부에서 기사로 터지는 거랑은 영향력이 전혀 다르잖아요. 제가 혜원이랑 화이트스노우 멤버들을 아끼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좀 곤란해요.”
안재영이 도중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럼 소속이랑 실명을 밝히지 않고 비공개로 하면 어떨까? ㅇㅇ 기획사 A 배우는 이런 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