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00)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건 곤란해. 우리는 가급적 관계자 실명을 다 공개하고 있잖아. 그런 식으로 실명을 밝히지 않으면 독자들은 기자의 뇌피셜로 쓴 소설이라고 의심하게 될 거야. 내가 몇 번이나 한국 언론의 고질병이라고 지적했던 문제이고.”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동안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혜원이 내게 괜찮다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슬아 언니가 평소에 저희를 얼마나 챙기고 도와주시는데요. 그렇게까지 하면서까지 언니한테 피해를 주는 건 싫어요.”

“혜원아…….”

“세진이 오빠는 슬아 언니까지 인터뷰할 필요 없어요. 충분히 구린 구석이 많은 사람이니까 저희가 드리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이슬아의 한마디면 더 쉽게 갈 수 있는 문제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여배우 아니던가.

게다가 토닉 엔터의 대표 주자.

그녀가 꺼낸 말 한마디는 기사 1,000개 이상의 위력을 가졌다.

나는 아쉬운 표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둘한테는 정말 미안해. 일분일초가 소중할 텐데. 그리고 갑자기 불편한 이야기 꺼내서 미안하다. 우린 이만 들어가 볼 테니까 즐거운 시간 보내.”

안재영과 이슬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말했다.

“아냐. 알려 줘서 고맙다. 세진아.”

“세진이 오빠. 오늘 좋은 이야기 들려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제 입장도 이해 부탁드릴게요.”

“물론이지. 그럼 혜원아 우린 이만 빠지자.”

“네, 언니랑 오빠 즐거운 시간 보내요.”

나는 김혜원을 숙소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조수석에 탄 김혜원이 내게 미안하다며 말했다.

“오빠 저 때문에 괜히 미안해요.”

“뭘. 슬아가 인터뷰 안 해 줘도 우리가 이 문제는 제대로 다뤄 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물론이죠. 오프라인에서 기사화해준다고 해서 너무 든든해요.”

“그래. 너도 그렇고 멤버들도 그렇고, 정철 씨한테도 잘 이야기해 줘. 괜히 다른 곳에 이야기하지 말고 이 문제는 우리 오프라인하고만 이야기하기로. 정보가 새어 나가면 토닉 엔터 쪽에서 대응책을 마련할지도 모르니까.”

“네, 걱정 마세요. 어디에도 말한 적 없으니까.”

이수빈을 팀장으로 하여 연예 기획사의 불공정 사태에 대해 다룬 TF는 곧 그 첫 번째 기사를 오프라인에 노출하였다.

<연예 기획사와 연예인 사이의 노예계약을 아시나요?>

그런데 어째 반응이 이상했다.

분명 수많은 취재와 정보를 바탕으로 만든 기사였음에도 댓글은 뜨뜻미지근했던 것이다.

이후 내보낸 후속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예 계약한 연예인들 안 되긴 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들 듣보잡들만 사례로 나오니까 공감 안 됨. 제일 유명한 애들이 화이트스노우? 완전 첨듣.>

<이게 연예계 전체 얘기도 아닐 텐데 오프라인에서 오버한 거 같음>

<연예 뉴스 보려고 오프라인에 접속한 거 아닙니다. 다른 기사 내주세요>

오프라인에서 그동안 연예계 뉴스를 거의 다루지 않았던 탓이 컸다.

또한 처음 기사를 써 보는 이수빈의 의욕이 너무 과했던 관계로 무리수를 둔 영향도 있었다.

그녀는 기사 대부분을 인지도가 높은 유명 연예인들보다는 연습생 위주로 편성했다.

그녀 본인이 연예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아직 힘이 없는 연습생들을 보호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연예계와 연습생들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는 역효과가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연습생들이 연예 기획사 노예 계약의 가장 크고 많은 피해자라서 그들 위주로 기사를 다뤘더니 대중의 공감을 사지 못한 것 같아요.”

“아녜요, 괜찮습니다. 이 본부장님에게 TF를 맡으라고 지시한 건 저니까요.”

그녀는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고는 방에서 나갔다.

별다른 변화 없이 잠잠하던 연예계가 뚤뚤 뭉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대형 연예 기획사의 대표들이 합동하여 기자 회견을 연 것이다.

토닉 엔터의 김대진 대표는 자기 차례가 오자 마스크를 잡고는 힘을 주어 말했다.

“국민 여러분! 며칠 전 오프라인이 발표한 기사를 읽고 연예 기획사 대표로서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아직 군소 연예 기획사에서는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그런 불공정 계약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 토닉 엔터에서는 앞으로 표준계약서를 통해 연예인들과 계약을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수많은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한 연예 매체의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김 대표님. 오프라인에서는 토닉 엔터의 화이트스노우가 불공정 계약을 맺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가 왜 저희 가족분들에게 그런 짓을 벌이겠습니까.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청렴결백의 대명사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갑이 아니라 을입니다, 을! 얼마나 그분들을 떠받들어 모시는데요.”

그의 넉살에 기자회견장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이후 질문은 대부분 표준계약서의 내용과 형태에 대한 것들이 주였다.

그만큼 연예계의 표준전속계약서 도입은 오래된 논쟁이었고, 토닉 엔터의 표준계약서 도입 발표는 큰 사건이었다.

기자회견 이후.

화이트스노우의 불공정 계약에 대한 문제는 전혀 이슈화되지 않은 채 오히려 연예 매체에서 오프라인을 까는 기사가 늘었다.

<오프라인, 이제는 연예계까지 진출 속셈?>

<“연예 기사는 저열하다” 발언 우세진 사장…… 오프라인이 갑자기 연예계를 저격한 이유는?>

<화이트스노우가 뜨지 못한 이유…… 멤버들 불화 논란>

포털에 올라온 연예 매체의 기사를 보니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단순히 오프라인을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이트스노우에 대한 근거 없는 모략까지.

홍지혜 역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연예 기획사고 기자고 다들 한통속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네요.”

“김대진 대표가 뒤에서 손을 썼을 가능성이 있어요. 광고 줄 테니까 기사 좀 써 달라고. 연예계 큰손이기도 하고.”

“어쩌죠. 저희가 이 문제를 다시 기사화한다고 하더라도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수빈 본부장님도 요즘 너무 어깨가 축 처져 있어요.”

“홍 본부장님이 잘 좀 케어해 주세요. 이 본부장님 탓이 아니라고요.”

“네. 그나저나 화이트스노우 멤버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은데 어쩌죠.”

홍지혜가 유독 내 표정을 살피며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아래에 있는 문서를 보고는 담담히 말했다.

“조금 더 두고 봐야죠. 표준계약서 도입은 나름 좋은 영향인 것 같고요.”

“네. 그럼 다행이고요.”

홍지혜가 나간 뒤 나는 문서에 담긴 내용을 다시 살폈다.

오프라인이 낸 기사의 영향을 측정하여 통계를 낸 보고서였다.

안타깝게도 이번 연예 기획사 불공정 계약 건은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우리가 낸 전체 기사는 총 5건. 총조회 수는 5만에 미치지 못하고, 다른 언론사에서 비슷한 뉘앙스의 기사가 나온 것 역시 3건에 불과하다. 오히려 토닉 엔터의 입장이 들어간 기사가 무려 180개. 이 정도면 실패라고 봐도 무방하겠는걸.’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문서를 내려놓았다.

이수빈에게도.

화이트스노우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 *

오프라인이 쓴 기사 중 유일하게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사례로 남는가 싶었던 이번 사건은.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갑작스러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주로 경찰 쪽 기사를 다루던 주전영이 이런 정보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토닉 엔터 김대진 대표, ‘강제 추행’ 혐의 긴급 체포>

메일에는 자세한 설명 없이 그저 김대진 대표가 체포되어 경찰서에 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나는 즉시 주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우 사장님! 주전영입니다.

“주 기자님. 방금 인트라넷에 올린 정보 보고 봤습니다. 이게 무슨 내용인가요?”

-김대진 대표가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집 종업원을 강제로 추행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경찰에 고소하면서 지금 경찰서에 긴급 체포된 상태입니다.

“그래요? 보통 현장에서 체포되는 경우는 잘 없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하더라고요. 만취 상태라서 바로 현장에 출동한 경찰한테 체포당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요?”

-토닉 엔터 간부가 두 명 더 있는데 둘 다 만취 상태입니다. 아 참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담당 경찰이 그러는데 김대진 대표가 술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더군요.

“어떤?”

-오프라인이 자기편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공격해서 놀랐다고. 그런데 알고 보니 별거 없어서 괜히 쫄았다고요.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요?”

-네, 경찰 조사에서 강제 추행을 당한 피해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서 저한테 살짝 이야기해 주더라고요.

“그렇군요. 지금 해당 경찰서에는 주 기자님이 나가 있는 상태인가요?”

-네네. 현장에는 지금 제가 나와 있습니다.

“오케이. 계속 정보 보고하면서 기사도 써 주세요.”

-넵! 사장님!

전화를 끊고 오래지 않아.

퇴근한 이수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갸우뚱거리며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내게 먼저 전화를 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이 본부장님. 우세진입니다.”

-사장님! 이 건 제가 끝까지 취재하고 싶습니다!

“네?”

-지금 김대진 대표 기사 나온 거요! 제가 꼭 끝까지 파헤치고 싶습니다. 불안하시겠지만 이번 한 번만 더 저를 믿어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목소리에선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지금 취재본부의 주전영 기자가 현장에 나가 있으니 그와 상의해서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오래지 않아 CMS에는 이수빈과 주전영의 공동 바이라인이 달린 기사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토닉엔터 김대진 대표, 단란주점에서 ‘강제 추행’ 혐의 현행범 체포>

<피해자 여성 “김대진 대표 이번이 처음 아냐…… 악질 중의 악질”>

<‘강제 추행’ 혐의 김대진 대표는 누구인가>

이수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예계 지식을 총동원하여 흥미로운 정보를 전했고.

주전영은 이를 말끔하게 가다듬고 경찰서에서 입수한 정보를 조합하여 깊이 있는 기사로 만들었다.

새벽 내내 이수빈, 주전영 듀오가 쓴 기사는 대한민국의 출근길을 뜨겁게 달궜다.

댓글은 이제 김대진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찼다.

<얼마 전에 기자 회견하면서 지입으로 스스로 청렴결백하다고 한 사람 아님?>

<증권가 찌라시 보면 예전부터 유명한 놈이었음. 여자 밝히기로>

<그러면 오프라인이 말했던 내용이 진짠가? 화이트스노우가 피해자라는 거>

다른 언론사 역시 김대진 대표의 긴급 체포를 빠르게 다루기 시작했다.

우리가 연예 기획사의 불공정 계약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건 이면에 있는 복잡한 문제에 대해 다루기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가벼운 이슈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할 뿐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슬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슬아야.”

-기사 봤어, 오빠.

“그래. 너희 사장이 요즘 기분이 좋았는지 정신줄을 잠깐 놓은 것 같더라.

-그러게. 회사에서도 아주 오프라인 별거 아니라고 깔보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무슨 일이야? 전화를 다 주고.”

-나 결심했어.

“뭘?”

-인터뷰할게. 이왕 할 거 생방송으로 하자. 평양에서 김정일 때 했던 것처럼.

“생방송?”

-그래. 나 지금 메이크업 중인데 이따 사무실에 들르면 돼?

“오늘 바로 오려고?”

-응,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들어서 꾹 참고 살았는데 더는 창피해서 여기 못 있을 거 같아.

“알았어. 세팅하고 있을게. 도착하기 전에 연락 줘.”

나는 즉시 영상부에 이 소식을 전하고 스튜디오를 정리했다.

오래지 않아 이슬아가 나타났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미모는 일반인의 수준이 아니었다.

풀메이크업에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이슬아를 오프라인의 전 직원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성별에 상관없이.

“그래. 준비는 됐나요?”

“물론이죠. 어디로 가면 되나요?”

이슬아가 단단히 마음먹었다는 듯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준비한 대로 유튜브 라이브를 열고는 모든 채널에 소식을 전했다.

곧 수많은 이들이 접속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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