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윤은 빠르게 프린트를 해 오더니 그걸 나와 최루리에게 건넸다.
“공직선거법 제8조입니다. 언론기관의 공정 보도 의무에는 방송과 신문 그리고 저희와 같은 인터넷 언론사가 정당 정책이나 후보자에 대해 보도할 때 공정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저희가 방송사는 아니지만, 방송법 제6조에서도 방송에 의한 보도는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요.”
최루리는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정당 또는 후보에 대해 공개 지지를 하면 안 된다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데요?”
“기자가 개인 신분으로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언론사가 공개적인 기사나 사설을 통해 표명하는 건 앞서 말씀드린 공직선거법 공정 보도 의무에 반한다는 게 선관위의 유권 해석입니다.”
“유권 해석?”
“네. 그러니까 공개 지지를 하지 말라는 말은 법조문 어디에도 없지만, 선관위는 이를 좁게 해석해서 금지하고 있는 거죠.”
나는 이세윤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애매하군요.”
“그리고 제가 신방과 출신이잖아요? 언론의 특정 후보 공개 지지 여부는 중요한 아젠다라서 수업 때에도 찬반 논란이 뜨거웠어요.”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나왔나요?”
“다들 그 필요성과 의미는 인정하지만, 법적으로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어요.”
그때였다.
최루리가 굳은 표정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녀는 잠시 외진 구석으로 가서 전화하고는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은 의기양양해 있었다.
“방금 선관위에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았는데요.”
“선관위예요?”
이세윤이 혀를 내둘렀다.
오프라인의 가장 큰 장점이자 원동력이 바로 기자 개개인의 빠른 행동력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이 기자 말대로 공정 보도 의무에 반하는 거라곤 하는데, 명확한 판단은 어렵다면서 말을 흐리네요.”
“어렵다라. 그러니까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선관위의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선관위 쪽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어요.”
“어떤?”
“과거 2002년 대선 때 한국 언론 중에서도 특정 후보를 공개 지지하려고 움직임을 보인 곳이 있다고 해요.”
“네? 한국에서요?”
“다들 아시는 곳일 거예요. 모든 시민이 기자라는 모토로 기사를 쓰는 인터넷 언론사 올시티즌 뉴스요.”
“아.”
올시티즌 뉴스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진보 언론 중 하나로 정식 기자를 채용하여 기사를 쓰는 이외에 시민기자가 직접 기사를 써서 올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움직임을 보였다는 건 결국은 못 했다는 건가요?”
“네. 우 사장님. 올시티즌 뉴스가 종이 매체로도 등록 신청을 하면서 법적으로 어려웠다고 하네요.”
“오프라인은 인터넷 언론사니까 그럼 법적으로도 괜찮다는 뜻인가요?”
나의 물음에 이세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지금은 인터넷 신문사도 신문법에 따라서 언론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어려울 겁니다.”
“중요한 건 선관위에서도 명확하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절대 하지 말라고 금지한 게 아니고요.”
이세윤과 최루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앞서 내가 개입하여 진정시켰던 주전영 때와는 문제가 달랐다.
‘회사 방향성의 문제가 아니라 현행법상 제약의 문제니 쉬이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구나.’
나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 * *
종각역 4번 출구.
보신각 바로 앞으로 나오는 이곳에는 지하철 1호선을 이용하려는 이들과 종각으로 빠져나오는 이들로 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거대한 인파가 파도가 치고 빠지듯 어지러이 움직이는 가운데.
지나가는 이들에게 익숙한 얼굴이 초록색 명함을 나눠 주고 있었다.
기호 8번.
백철웅이었다.
나는 그에게 캔커피를 건넸다.
“더우시죠? 시원한 캔커피 한 잔 드세요.”
그제야 무표정하게 지나가던 이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이쪽을 향해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얼굴 가득 땀방울이 맺힌 백철웅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연락도 없이 여긴 웬일입니까?”
“백 사장님 보고 싶어서 왔죠.”
“농담은. 그나저나 우 사장이 오니까 이제야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네요.”
“뭘요. 잠시 저쪽 그늘로 가서 이야기 좀 나누시죠.”
우리는 보신각과 건물 사이에 난 좁은 골목길로 이동했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와 건물 그림자로 한낮임에도 어둡고 시원했다.
“고생 많으십니다. 늘 이렇게 혼자 하시는 거예요?”
“아뇨. 이 시간대만 그렇고 다른 시간대에는 지지자분들이 도와주고 계세요.”
“지지자요?”
“하하. 내가 나이가 50이 넘었습니다. 설마하니 친구들이 없겠습니까. 게다가.”
그는 목이 말랐는지 내가 건넨 캔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입가에 묻은 커피를 손으로 닦았다.
“오프라인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제 글에 공감해 주시는 분들도 꽤 생겼어요. 그분들이 가끔 유세 지원을 해 주시기도 합니다.”
“다행이군요. 저랑 오프라인에서 자주 못 와서 죄송합니다.”
“뭘요. 우 사장이나 다른 분들이 저 유세하는 데 오는 건 아마 선거법상 어려울 겁니다.”
“알고 계셨군요?”
“이야기 들었습니다. 내부에서 저에 대한 공개 지지로 한참 토론이 뜨겁다고요.”
“네, 저도 참 고민스럽습니다.”
“저 때문에 괜히 논란거리를 만들진 마세요. 저는 이대로 충분합니다.”
“그나저나 계속 여기서 명함 나눠 주시는 거예요?”
나는 그가 건넨 명함을 바라보며 물었다.
녹색으로 된 명함에는 커다란 글씨로 기호 8번 백철웅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재미있었던 건 거기 쓰인 홍보문구였다.
“언론이 바뀌어야 대한민국이 바뀐다?”
“물론이죠. 그것 때문에 출마를 결심한 거니까요.”
“그래도 사람들에게 확 와닿는 문구는 아니잖아요?”
“제가 믿고 따르는 걸 실천할 뿐입니다.”
그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존경스럽습니다, 백 사장님.”
“하하. 이제는 사장이 아니라 후보입니다. 1번과 2번만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저 말고도 좋은 공약을 내거신 후보자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분들도 많이 조명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아참. 우 사장 혹시 오늘 시간 괜찮습니까?”
백철웅은 종각역에서 30여 분간 더 명함을 나눠 주더니 나와 함께 길을 걸어 탑골공원 옆에 위치한 낙원 악기 상가로 이동했다.
그러자 상가 아래에 녹색으로 칠해진 유세 차량이 보였다.
또한 녹색 조끼를 입고 있는 지지자들이 우리를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와! 우세진 사장님이 오셨다!”
“우 사장님 팬입니다! 저희 후보자님 많이 도와주세요!”
“우 사장님 실물 처음 보는데, TV보다 더 미남이신데요?”
지지자들이 모두 반기는 가운데 3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내게 불만 섞인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우 사장님. 저 백 후보자님 지지자인데 좀 서운합니다.”
“네?”
“아니, 오프라인은 백 후보자님의 가장 큰 아군 아닙니까! 그런데 왜 집중 보도해 주지 않는 겁니까?”
“그건…….”
나는 그에게 공정 보도의 중요성과 선거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이미 기성 언론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자기들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나 후보에 대해서는 미친 듯이 빨아주고, 상대 후보는 파렴치한으로 몰아가고.”
“저희는 그들과는 다르니까요. 백 후보자님도 그런 모습에 환멸을 느껴서 출마를 결심하신 거고요.”
“네에.”
백철웅이 우리 이야기를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늘 우 사장을 여기 부른 건 멋진 분들이 지원 유세를 와 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소개해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멋진 분들이요?”
“곧 도착한다고 하는데…… 아 저기 오는군요!”
그가 인사동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섯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이쪽을 향해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누구지?’
나는 그쪽을 자세히 살피다가 깜짝 놀라 나도 몰래 헉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 * *
“안녕하십니까! 종로 시민 여러분. 성공회대 교수 신국기입니다.”
신국기라는 말에 지나가는 이들이 이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신국기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위상 탓이다.
그가 누구던가.
우리 시대의 지성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많은 이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대한민국의 대표 지성인이었다.
“저는 우리 백철웅 후보자가 이번 선거에서 당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죠? 한국 언론 문제 많다는 거요.”
그의 말에 멈춰서 이야기를 듣던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시 우리 시민들이 가장 똑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이 이름 요즘 참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바로 오프라인이라는 매체를요.”
오프라인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오프라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곳이 오프라인이라던데?”
신국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그 오프라인을 만드신 분이 바로 기호 8번. 여기 계신 백철웅 선생입니다. 그보다 더 언론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요?”
신국기는 백철웅이 반드시 당선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섯 가지를 뽑으며 하나하나 상세히 소개했다.
‘역시 대한민국의 스승이라 불리는 사람이로구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명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어.’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유세 차량 앞에 모여서 신영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공감을 표하고 있었다.
한참을 지원 유세를 펼친 신국기가 이번에는 다른 이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남성이 웃으며 마이크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신국기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공단보 인사드립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몇몇 사람들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단보라면 대표적인 보수 경제학자잖아?”
“그러게. 신국기 선생과는 정반대 쪽에 위치한 학자일 텐데.”
그런 이야기를 의식했는지 공단보가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오른쪽에, 신국기 선생님은 왼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 같이 나오는 경우는 잘 없죠.”
그가 잠시 말을 끊고는 좌중을 쓱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저와 신 선생님 모두 백철웅 후보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민 정책을 100% 응원하고 있고요.”
공단보 역시 신국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백철웅을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3가지로 간단히 밝혔다.
“첫째는 지금 대한민국 언론이 너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백철웅 후보자의 진정성을 믿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그가 오프라인을 빠른 시간 안에 국내 최고의 언론사로 키운 능력 때문입니다.”
공단보에 이어서 유명 인문학자, 뇌과학자, 천문학자들이 차례로 백철웅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들답게 설득력이 남달랐다.
어느새 낙원 악기 상가는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 * *
저녁 7시까지 이어진 유세가 끝나자 이날 백철웅을 지원하려 출동한 학자들과의 술자리가 인사동 입구의 한 전통 주점에서 열렸다.
회사로 돌아가 밀린 업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지만.
‘신국기와 공단보 선생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한 번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분들이다. 이번 기회에 안면을 터 두는 건 나쁘지 않겠지.’
나는 그들에게 동동주를 한 잔씩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들.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한마디 여쭙습니다.”
“응? 말해 보세요.”
신국기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다섯 학자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살피고는 천천히 말했다.
“백 사장님이 정말 멋진 분이라는 건 그동안 저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언제 눈치채신 겁니까?”
학자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체면도 잊은 채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무게를 잔뜩 잡은 탓에 무언가 무거운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던 모양이다.
공단보가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