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200)

“하긴.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그저 종로가 정치 1번지이기 때문에 출마를 결심했다는 말에는 저도 조금 감명받았어요.”

“부수호도 박전명도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5선, 6선이라는 수식어가 그들의 경력을 증명해 주죠.”

“네. 오히려 그런 이들 틈 사이에서 저만큼 선전하고 있는 백 사장님이 저는 더 대단한 것 같기도 해요.”

“동감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집무실 밖을 살펴보았다.

오프라인 대다수 인원이 늦은 시간임에도 퇴근을 하지 않은 채 자기 자리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거나 삼삼오오 TV 앞에 모여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백 사장님. 오프라인 모두가 응원하고 있습니다. 부디 힘내시길.’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사무실 풍경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담았다.

치열한 3자 대결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시간여가 지난 뒤였다.

TV 뉴스 화면 아래 이런 자막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종로, 무소속 백철웅 당선 유력>

* * *

종로센터의 대다수 층이 불이 꺼진 가운데.

오프라인이 있는 2층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 왔다.

“와아아아!!”

마치 월드컵 본선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역전 골을 넣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오른손을 하늘로 올리며 벌떡 일어섰고 최루리와 홍지혜는 서로를 껴안고는 방방 뛰었다.

오래지 않아 자막은 당선 유력에서 당선 확실로 변했다.

나는 즉시 백철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축하드립니다, 백 사장님. 아니 백 의원님!”

-하하하하. 고맙습니다. 우 사장. 설마 지금까지 회사에 계신 건 아니죠?

“당연히 회사입니다. 잠시만요.”

나는 다톡으로 그에게 조금 전 찍었던 사무실 풍경 사진을 보냈다.

“현재 사무실 모습입니다. 오프라인 전 직원이 백 사장님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거 참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백철웅은 목이 메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 정신없으실 거 같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고 푹 쉬세요.”

-우 사장도요. 고맙습니다. 모두.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오프라인 직원들은 사무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집에 바로 가는 이들도 있었고 삼삼오오 모여 종각 인근의 술집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가 사무실을 떠난 가운데.

나는 홀로 집무실에 남아 불야성을 이루는 종로 1번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회귀한 지 2년 하고도 4개월 12일.’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토록 바랐던 메이저 매체에 당당히 합격하였지만 굳은 결심을 안고 오프라인에 재입사.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2년 만에 오프라인을 국내 최정상의 언론사로 이끌어 왔다.

게다가 공동 사장인 백철웅은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나도 모르게 마음속 한편으로는 백철웅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오프라인의 설립자일 뿐.

실제로 일은 다 내가 하고 있다고.

그런데 오늘 백철웅이 그 불가능할 것 같았던 도전에 성공하자.

고마움과 존경심.

그리고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하면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금 내 꿈을 되 살펴보았다.

‘세계 최고 언론사 겸 IT 플랫폼.’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 *

4월을 맞은 원화성의 집 정원에는 그야말로 봄이 가득 찾아와 있었다.

벚꽃과 목련을 비롯.

영산홍과 모란, 튤립과 수선화 등 각종 꽃들이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개량 한복을 입은 원화성은 나와 백철웅이 정원 깊숙이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꽃과 나무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부인인 정해지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원화성을 부르자 그제야 이쪽을 돌아보았다.

“어이쿠야. 죄송합니다. 두 분 오신 줄도 모르고 꽃놀이에 정신이 빠져 있었네요.”

“꽃놀이는 뭘요. 이 넓은 정원을 설마 혼자서 관리하시는 겁니까?”

백철웅의 말에 원화성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부인이랑도 하고 자식들도 주말에는 와서 도와줍니다.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백 의원님.”

원화성은 흙이 잔뜩 묻은 장갑을 벗더니 손을 탁탁 털고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백철웅이 환하게 웃으며 그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제가 고맙죠. 정말 노고 많으셨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다.”

인사를 마친 우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앉아 있는 사이 정해지가 차를 내왔다.

방 안은 곧 꽃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향기가 정말 좋습니다. 무슨 차인가요?”

“정원에서 방금 딴 매화꽃차입니다. 머리를 맑게 해 주죠.”

은은한 향에 이어 단맛과 신맛이 연이어 올라오며 차의 밸런스를 맞췄다.

“맛이 기가 막히네요.”

“많이 드세요.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시고요.”

정해지가 아름다운 미소를 보이며 방을 나갔다.

원화성은 매화꽃차를 한입 들이켜더니 백철웅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선 소감이 어떠십니까?”

“얼떨떨합니다. 설마 될 줄은 몰랐거든요.”

“하하. 그러게 참 왜 거기에 나가서 사서 고생하신 겁니까? 그것도 무소속으로요.”

“제 진정성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진정성이라. 참 멋진 말이긴 한데 남에게 보여 주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죠.”

“네, 회장님. 다행히 이번에는 주민분들이 제 진정성을 알아주신 것 같아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솔직히 당선 확률을 어느 정도로 보셨습니까?”

원화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묻자 백철웅이 고민하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으흠……. 3%?”

“허허. 겨우 그 정도의 가능성만으로 도전을 하셨다고요?”

“네. 적어도 1%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우세진 사장이 종각역으로 찾아왔던 날 말입니다.”

“제가 캔커피 건넨 날이로군요.”

“맞아요. 그날 왠지 당선될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왔습니다. 묘하죠?”

“이 얘기. 원화성 회장님을 처음 뵌 날이랑 비슷한데요.”

“응? 그게 무슨 말이죠?”

나는 내가 오프라인에 합류한 첫날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 주었다.

“제가 여기 합류한 첫날, 백 사장님이 저를 이끌고 어디론가 데려가셨죠.”

“아! 원화성 회장님과의 미팅 때?”

“맞습니다. 저희가 원 회장님으로부터 첫 투자를 받아낸 날이기도 하고요.”

“기억납니다! 벌써 2년 정도 지난 일이죠? 아직도 새록새록 하네요. 하하.”

나는 잠시 차를 한 잔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날 미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제가 백 사장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기억나시나요?”

“뭐라 하셨죠? 그날 술을 많이 마신 기억은 나는데.”

“원화성 회장님에게 투자받을 확률을 어느 정도로 보셨나고요.”

“응? 그런 이야기를 했나요?”

“네. 그때 백 사장님은 지금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시더니 5%? 아니 10%라고 하시더군요.”

“하하하. 그랬었나요? 기억이 안 나는군요.”

“그러다가 제가 합류하면서 생각이 바뀌셨다고 그랬습니다.”

“어떻게요?”

원화성도 궁금하다는 듯 몸을 내 쪽으로 가까이 붙이며 물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숫자 7을 펼치며 말했다.

“70%라고요.”

“엄청난 수직 상승이로군요.”

“네. 갑자기 그때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러게요. 뭔가 비슷한 느낌이네요.”

“제게 우 사장은 정말 행운의 부적인가 봅니다. 하하.”

한동안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분명 이곳을 방문한 시간은 한낮이었는데.

창문 너머로 햇빛이 점점 기울더니 어느덧 어둠이 내려왔다.

이제 방 안에는 꽃향기 대신 스모키한 향이 가득 올라왔다.

“기분입니다. 이거 진짜 제가 아끼고 아끼던 술인데 오늘 이 자리에 딱이로군요.”

그가 꺼낸 술은 술병 모양조차 예사롭지 않았다.

종 모양으로 된 병에는 갈색이 짙다 못해 핏빛인 위스키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병의 목 부분에는 달모어 62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1962년산 위스키인가요?”

“아니요. 달모어에선 그해에 위스키를 생산하지 않았습니다. 1942년에 만들어졌고, 4가지 빈티지를 숙성해서 딱 12병만 만든 술이죠.”

“아니, 12병만 생산했다면 가격이 엄청 비쌀 것 같은데요?”

“몇 년 전에 산 거라서 정확하지는 않은데…… 대략 2, 3억 정도 될 겁니다.”

“네? 이거 한 병에 2, 3억이라고요?!”

나와 백철웅은 기겁을 하며 위스키를 다시 바라보았다.

원화성이 웃으며 우리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바로 이런 날 마시기 위해 산 거죠. 자! 백철웅 의원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옆에서 우 사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렇게 2억이 넘는 술이 허공으로 절반 정도 사라졌을 무렵.

갑자기 백철웅이 내 손을 붙잡고는 말했다.

“우 사장. 내 오늘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백 사장님.”

“저는 이제 국회의원이 되었고. 더는 오프라인에 신경을 쓰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해서 말인데.”

백철웅은 비어 있는 내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자신과 원화성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저는 오프라인 사장을 그만두겠습니다.”

“국회법 때문에 그러신 건가요?”

국회법 제29조에서는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국회의원의 겸직을 금지하고 있었다.

백철웅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이쪽에 전념을 해야겠지요. 오프라인은 제가 없어도 우 사장이 있으니 전혀 걱정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설립자신데 뭔가 아쉽네요.”

“하하. 아쉽긴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오프라인은 제가 키운 게 아니라 우 사장이 키운 거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백 사장님이 안 계셨다면 절대로 오늘의 오프라인은 없었습니다.”

내 말에 원화성도 공감하며 말을 보탰다.

“그렇습니다. 백 사장님이 오프라인을 설립하지 않았다면 우 사장도 못 만났을 테고, 저와도 인연이 없었겠죠.”

“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이런 제안을 던졌다.

“그럼 명예 회장직은 어떻습니까?”

“명예 회장이요?”

“네, 회사에서 보수를 받거나 아래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직위가 아니라 단순히 이름만 있는 겁니다.”

“이름만?”

“네, 설립자이신 건 사실이니 명예 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시는 게 맞는 것 같고요.”

“명예 회장이라. 국회법으로 가능한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네, 갑자기 이렇게 두부 자르듯이 나가시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네요. 드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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