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보고 가야 하는데 작품들에 빠져 있어서 그만.”
“후후. 저도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서더니 코트를 털었다.
얼음처럼 새하얀 피부에 봄에 핀 벚꽃을 닮은 듯 연한 분홍빛 입술.
국내 최고의 미녀라 불리는 이슬아과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없는 미모였다.
내가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아닌가.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소리쳤다.
“설마 오프라인 우세진 사장님?!”
“네, 제가 우세진입니다만.”
“어머 어떡해!”
그녀는 어쩔 줄 모르며 핸드백에서 펜과 다이어리를 꺼내 내게 건넸다.
핸드백도 그렇고 펜과 다이어리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평소 세진 님 팬이었어요! 정말 너무 반가워요.”
“별말씀을요. 성함이?”
“세연. 강세연이에요.”
“세연이라. 예쁜 이름이시네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했다.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저희 회사 직원분이 사진전을 열었다길래 한번 와 봤습니다.”
“아! 지강원 기자님이 오프라인 평양 특파원이시죠?!”
“네, 맞습니다.”
“그렇구나. 북한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작가님 소속을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러고 보니 저기 저 사진은 우세진 사장님 아니신가요?”
그녀가 백화관 영빈관 안에서 업무를 지시하는 내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네, 맞아요. 제 사진입니다.”
“우와 신기해요! 사진에 나온 사람을 실물로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녀는 잠시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사진 밑에 쓰인 설명을 읽었다.
그러고는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사진 설명을 보니 총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인가 본데 저렇게 침착하시다고요?”
“아뇨. 저도 당시에는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어요. 다만 업무를 지시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죠.”
“그 누구나 저런 긴박한 상황에서 사진에 나온 것처럼 냉철하게 업무를 지시하지는 못할 거예요. 정말 대단하세요!”
“뭘요. 그런데 세연 씨는 사진을 좋아하시나 보죠?”
“네. 사진도 좋아하고 그림이나 도자기 등 미술 작품들은 다 좋아해요. 소설이나 영화도 좋아하고요.”
“그렇군요. 저도 전시회에 자주 오는 건 아닙니다만 가끔 오면 좋은 기운을 얻고 가곤 합니다.”
“그렇죠? 예술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기분이 들곤 해요. 신기하다니까요.”
그녀와 나는 초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강원의 사진은 북한의 일상을 생생하고도 따뜻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이건 작가님이 일부러 이런 구도로 찍으신 거 같네요.”
“일부러?”
“네, 만약 이걸 정면으로 저 소녀만 클로즈업해서 찍었다면 저희가 TV 매체에서 흔히 보았던 불쌍한 북한의 소녀, 북한의 현실 이런 제목이 어울렸을 거예요.”
“으흠.”
“그런데 이걸 뒤쪽에서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엄마와 함께 찍으니까 느낌이 다르잖아요? 가난하지만 북한도 우리와 같은 사람 사는 곳이다. 이런 느낌으로요.”
우리는 어느덧 함께 사진을 둘러보며 걷다가 작품을 모두 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둘 다 멋쩍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작품을 다 보았네요.”
“그러게요.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즐거웠어요, 우 사장님.”
“저도요.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해봤는데 세연 씨가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의도나 의미 등을 소개해 주셔서 새롭고 신선했습니다.”
“그냥 제 개인의 생각이니 어디 가서 이야기하진 말아 주세요.”
“겸손하시네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강세연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우 사장님. 혹시 점심…… 드셨어요?”
* * *
우리는 갤러리 인근에 위치한 안동국시집을 방문하였다.
그녀가 이 집을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님도 안동국시 좋아하세요?”
“네. 좋아합니다. 평소에도 자주 먹어요.”
“다행이네요. 이 근처에서는 이 집이 안동국시를 가장 잘하거든요.”
주문한 안동국시 두 그릇이 나왔다.
뽀얀 국물에 잘게 다진 파와 단호박 그리고 고기가 먹음직스러웠다.
정작 안동 사람들은 안동국시를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안동국시는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였다.
깊은 국물맛과 더불어 밀가루와 콩가루가 적절히 배합된 면은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그뿐이랴.
새콤한 깻잎무침과 함께 면을 입안으로 넘기면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이 가히 일품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가끔 미칠 듯이 먹고 싶은 날이 있을 정도로.
“의외네요.”
“응? 뭐가요?”
“세연 씨는 이런 토속 음식 말고 서양 음식 좋아할 거 같았거든요.”
“하하. 왜요? 저 순댓국도 잘 먹고 족발이나 닭발도 좋아해요.”
“그래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후훗. 언론사에 다니시는 분이 편견이 있으시네요. 아 맞다! 혹시 오프라인에는 사진 기자님들이 많으신가요?”
“사진 기자요?”
영상본부에는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기자들이 몇 명 있었다.
또한 주 업무가 아니더라도 사진을 취미로 하는 이들은 꽤 많았다.
“몇 명 있습니다만. 왜요?”
“오늘 지강원 기자님 사진을 봤더니 너무 좋아서요. 오프라인 기자님들은 다 사진을 잘 찍으실 것 같은데 이걸 모아서 전시회를 열어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오프라인 기자가 찍은 사진으로요?”
“네! 오프라인은 요즘 인지도도 높고 한국 최고의 언론사라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전시회를 열면 사람들도 많이 방문할 것 같아서요.”
“실례지만 세연 씨는 혹시 그쪽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음. 비슷해요. 저 근처에 자그마한 갤러리를 하나 운영하고 있거든요.”
“갤러리요?”
그녀는 내게 금색으로 된 명함을 한 장 건넸다.
<졸리메종 갤러리. 관장 강세연>
나는 깜짝 놀라 그녀와 명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졸리메종이라면 조계사 너머 대로변에 있는 5층짜리 대형 갤러리 아닌가요?”
“맞아요! 잘 아시네요?”
“거기 관장이시라고요?”
“네, 제가 거기 관장이에요.”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
‘자그마한 갤러리는 무슨.’
졸리메종은 국내 3대 재벌 중 하나인 TP 그룹에서 만든 갤러리로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수시로 전시하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TP 그룹의 창업자 강인찬 회장의 부인인 이권아는 미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녀가 강인찬 회장을 설득해 만든 것이 바로 졸리메종이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TP 그룹의?”
“맞아요. 제 아버지가 강규현 회장님이세요.”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설마하니 TP 그룹 오너의 하나뿐인 딸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저렇게 어린 나이에 졸리메종의 관장이라니.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스물아홉이에요. 그러는 우 사장님은요?”
“저는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어머! 그럼 저보다 한 살 동생이시네요.”
“아부가 아니라 정말로 저보다 동생인 줄 알았습니다. 많아 봐야 스물여섯 정도로 봤는데…….”
“호호. 그런 이야기는 자주 듣지만 우 사장님에게 들으니 더 기분 좋네요. 고맙습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강세연이 소개한 인근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점심은 우 사장님이 사셨으니 차는 제가 살게요.”
“감사합니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선호하시는 원두가 따로 있으세요?”
“케냐 AA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네. 저기 여기 케냐 AA 원두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카페 라테 한 잔 주세요.”
커피 원두까지 고려해 주는 사람은 김희철에 이어 그녀가 두 번째였다.
창가 자리에 앉은 나는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넓은 공간에 깔끔한 인테리어와 조경에도 불구하고 카페는 유독 한산했다.
평일 주말 상관없이 사람들로 붐비는 인사동에서 말이다.
강세연이 그런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여기 무척 조용하죠?”
“네, 인사동엔 자주 오는 편인데 여기에 이렇게 한적한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죠? 앞에 안동국시 먹었던 건물이 여기를 가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냥 막혀 있는 곳인 줄로만 아는지 잘 모르더라고요. 덕분에 저만의 비밀 아지트가 되었지만.”
곧 진동벨이 울렸고 나는 주문한 차를 자리로 가져왔다.
나는 가볍게 커피를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커피 맛도 좋네요.”
“네. 여기 사장님이 커피 마니아라서 아프리카와 남미 등에서 직접 농장주를 만나 원두를 수입한다고 해요. 대단하죠?”
“저희 건물 1층에 있는 카페 사장님도 커피 마니아신데 여기 한번 소개해 드려야겠네요.”
“오프라인 건물 1층이라면. 종로센터요?”
“네, 맞아요.”
“거기 1층 카페면 오프(off) 말씀인가요?”
“오! 맞아요. 잘 아시는군요?”
강세연은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 집도 커피 참 잘하죠. 저도 종종 들러요.”
“그랬군요. 오시면 연락 주세요.”
“음. 저는 아까 명함 드린 것 같은데 아직 우 사장님 명함은 못 받았네요.”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내 명함을 건넸다.
“졸리메종 관장이라는 명함을 받고 놀라서 제 명함 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뭐 그럴 수 있죠. 그런데 혹시 최근에 제주도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도 찍지 않으셨어요?”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왜긴요. 제가 나름 한국 예술계에 아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녀의 할머니이자 졸리메종의 초대 관장인 이권아는 한국 미술계의 대모로 불린 사람이었다.
‘나이는 젊지만, 그녀도 한국 예술계의 큰손이란 말이로군.’
나는 숨겨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네, 최근에 제주도 4.3사건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크랭크업했습니다. 아마 곧 극장에서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주 4.3사건이라. 쉽지 않은 주제를 택하셨네요.”
“제작진들의 의지가 강했거든요. 감독과 각본 모두 제주도 분들이고요.”
“제작진의 의지가 어찌 되었든 결단을 내리는 것은 결국 대표니까요. 멋지세요.”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강세연은 묘하게 내 마음을 휘감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덤덤히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낮임에도 앞 건물에 가려서 생긴 그늘이 시원해 보였다.
그녀는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물었다.
“곧 개봉이라면 내부에서 시사회 같은 건 하셨어요?”
“아뇨. 하지만 곧 할 예정입니다.”
“그렇구나. 괜찮으시면 혹시 저도 참석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