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세연 씨가요?”
<제주 4.3사건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오프라인 내부 시사회>
위와 같은 문구가 적힌 A4 용지가 한 회의실 앞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회의실 안에는 총 11명이 자리에 앉아 빔프로젝터가 쏘아내는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감독의 의도에 따라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운데.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긴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되려 하였다.
향이 꺼지고 제사가 끝나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
“흐흐흑.”
몇몇이 소리 없이 몸을 가늘게 떨며 흐느꼈다.
몇몇의 눈망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있었다.
회의실 안의 공기는 가라앉다 못해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이덕오가 말했다.
“젠장. 진짜 너무 슬프네요.”
그 한마디에 영화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각본을 쓴 민정희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는 일어나 회의실에 불을 켰다.
“분위기 어색한데 죄송합니다. 모두 어떠셨나요?”
그녀의 어색한 말투에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보였다.
“좋았습니다. 진짜로요!”
“민 작가님, 너무 좋았어요. 영화 보는 내내 운 것 같네요. 원래 영화 보면서 이렇게 우는 사람이 아닌데.”
“휴. 장난 아닌데요. 이렇게 슬픈 사건인 줄 꿈에도 몰랐어요.”
“이건 진짜 국가 차원에서라도 널리 알려야 될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역사에…….”
모두가 감상 소감을 한마디씩 나누는 가운데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 아이디어인 줄은 모르겠지만 영화가 한 편의 위령제처럼 느껴졌어요. 그때 희생된 분들에게 영화를 통해 제(祭)를 올리는.”
강세영이었다.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개인적으로 아는 지인이라고 소개하고는 이날 시사회에 참석시켰기에 그녀의 정체에 대해 모두 궁금해하고 있었다.
박창후가 나와 강세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대표님. 대표님 지인인 건 알겠는데 어떤 분인지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감독으로서 외부 유출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라서.”
박창후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영화의 편집이 디지털로 전환된 이후, 극장 상영도 되기 전에 편집본이 외부로 유출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부장들 앞에서 그녀를 소개했다.
“갤러리 졸리메종의 강세연 관장님이십니다. 예술과 문화에 조예가 깊으셔서 제가 오늘 특별히 게스트로 모셨습니다. 인사들 나누시죠.”
“반갑습니다. 여러분. 강세연입니다.”
내가 소개를 하자 강세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미소로 정중히 인사했다.
그녀의 미소에는 거역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본부장들도 따라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숙이며 간단히 자신들을 소개했다.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박창후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졸리메종이라면 그 조계사 건너편에 있는.”
“네, 맞습니다.”
“거기 TP 문화재단에서 만든…….”
“네, 맞습니다.”
“한국 예술계의 큰손이라는…….”
“그렇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박창후는 납득했다는 듯 그녀에 대해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영화가 어땠냐고 물었다.
“좋았습니다. 스토리텔링도 좋고 연출이나 색감. 배우들의 연기력도 뛰어나더군요. 연기자 대부분이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비전공자라는 게 정말인가요?”
“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제주도 현지 분들을 많이 캐스팅했습니다.”
“대단합니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이건 뭐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이 전면에 드러나는 영화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영화 제목이 왜 도세기죠?”
내 물음에 박창후는 그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도세기가 돼지를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인데요. 영화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영화에 돼지가 자주 등장하잖아요?”
“그렇죠. 주민들이 산으로 피신하자 마을에 돼지들만이 홀로 남고 나중에는 돼지들이 우리를 탈출해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잔인한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배가 고파 우리를 탈출한 돼지들은 학살되어 방치된 시신들을 먹고는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네, 그걸 다시 토벌대가 맛나게 잡아먹죠. 이 비극을 보여 주는 데 돼지만큼 더 극적이고 아이러니한 매개체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랬군요. 박 본부장님 생각인가요 아니면 실제로?”
“네, 슬프게도 실제 사건입니다.”
“끔찍한 현실이로군요. 그래서 개봉일이 언제라고요?”
“다음 달 중순입니다.”
“배급사가 어디라고 그랬죠?”
“독립 영화 위주로 배급하는 곳인데 한바탕이라고 이쪽 바닥에서는 나름 유명한 곳입니다.”
“저 한바탕 알아요. 국내외 독립 영화를 자주 유통하고 자체 영화관도 가지고 있지 않나요?”
“맞아요. 독립 영화계에서는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죠.”
박창후가 뿌듯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그러자 강세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손을 들었다.
“한바탕이 유명한 건 맞는데 그럼 상영관 잡기가 만만치 않겠는데요?”
“배급사 한바탕은 독립 영화 쪽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곳입니다. 독립 영화에 대한 애정도 깊은 곳이고요.”
“네,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독립 영화에 한해서잖아요? 이 영화를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흠. 뭐 좋은 수라도 있습니까?”
박창후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강세연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제가 실례가 되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는 단지 이 영화가 보다 많은 분께 알려지려면 배급사를 다른 곳으로 교체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지 감독님을 불편하게 하려던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강세연의 태도와 말투에서는 한 톨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박창후 역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처음 뵙는 분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같아서 저도 좀 흥분했네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희도 계약을 맺은 게 있어서 갑자기 배급사를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계약 때문이라면 제가 해결해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네?”
“한바탕 대표님이랑은 잘 아는 사이거든요. 사정을 설명해 드리면 흔쾌히 수락해 주실 것 같아요.”
“뭐라고요?”
박창후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선 그녀를 바라보았다.
배급사를 결정할 때 박창후는 무조건 ‘한바탕’이랑 해야 한다며 그쪽과 무수히 많은 미팅을 진행하고 수많은 메일을 보냈다.
그에게는 ‘한바탕’이 곧 독립 영화 배급사의 끝판왕이라는 인식이 있는듯했다.
매달리다시피 해서 따낸 계약인데 이걸 이렇게나 쉽게 교체할 수 있다는 말에 잠시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나는 강세연에게 물었다.
“그럼 강 관장님은 배급사를 어디로 바꾸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적어도 국내 영화 배급사 빅3와 계약을 해야 많은 상영관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셋 중에서 하나를 뽑으라면 ‘라이언 시네마’가 독립 영화에 관심이 많은 곳이고요. 필요하시면 소개해 드릴 수도 있어요.”
나는 멍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는 박창후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박 본부장님. 라이언 시네마는 어떠신가요?”
“아 네네. 좋죠. 라이언. 라이언은 사자. 하하.”
“그럼 배급사 교체 건은 강 관장님 도움을 받기로 하고. 혹시 또 다른 의견 있으신가요?”
내 말에 최루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슬아 씨가 그런 역할로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러게요. 저도 박 본부장님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서 오늘 영화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 사장님은 언제 찍으신 거예요? 제주도에서 촬영한 적은 없으시잖아요?”
그녀는 내가 카메오로 출연한 부분에 대해 궁금증을 보였다.
나는 박창후에게 답을 해 줘도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라이언 시네마. 사자 시네마. 아니 사자 영화인가? 하하.”
“박 본부장님은 안 되겠네요. 잠시 쉬셔야 할 것 같고. 저희 북한에 갔을 때 잠깐 제 방에서 촬영했습니다.”
“네? 그게 북한에서 촬영한 신이라고요?!”
“네, 다행히 필요한 도구는 김설송 측에서 마련해 줬죠.”
“그랬구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우 사장님이 그런 식으로 등장할 줄은.”
“어땠나요? 나름 연기자 같았나요?”
“하하. 워낙 짧아서 그런 걸 느낄 틈은 없었지만 적어도 어색하진 않았던 것 같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 * *
시사회를 마친 나는 강세연을 로비까지 바래다준 다음 집무실로 돌아와 민정희를 내 방으로 불렀다.
“부르셨어요?”
“네, 오늘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기대 이상의 작품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제 한시름 던 것 같아요.”
“왜요. 앞으로 계속 만드셔야죠.”
“네? 저 이거 만든 거로 계약 종료인데요?”
“그래서 말인데.”
나는 민정희 쪽으로 몸을 당겼다.
민정희의 입에서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희 씨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만간 오프라인에서 조직 개편이 있습니다.”
“해외 지사장 발령 나는 거요?”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네, 박 감독님한테 들었어요. 고민이 많으시더라고요.”
“맞아요.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죠.”
“그러게요. 제가 박 감독님 입장이라도 정말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오프라인에서도 그분들을 대체할 인력을 뽑기 위해서 면접을 진행 중입니다. 한 분 한 분이 가지는 조직 내 위상이 크니까 빨리 좋은 분들을 뽑아야죠.”
“들었어요. 엄청난 인재분들이 지원을 하셨다고요.”
“혹시 민 작가님은 생각 없으신가요?”
“네?! 제가요?”
“제가 보았을 땐 글도 잘 쓰시고 오프라인에서 기자를 하는 게 꿈이라는 말도 하신 거로 기억합니다만.”
“아하하. 그건 그런데 갑자기 본부장급은 무리인데요.”
민정희가 정말로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본부장급은 아니고 이번에 마케팅부 산하에 홍보팀을 하나 마련하려고 합니다.”
“홍보팀이요?”
“네, 한국 언론사는 대부분 홍보팀을 따로 두고 있진 않지만, 저희는 저희 역할을 언론으로만 규정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브랜딩이나 마케팅을 위해서라도 조직에 홍보팀을 하나 두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요?”
“거기 팀장으로 민정희 씨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어떠신가요.”
“네? 저를요?!”
“홍보팀에서 제일 중요한 게 회사가 외부에 알릴 메시지를 정리하는 일이랑 보도 자료를 작성하는 일인데 정희 씨라면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저 한 번도 그런 일은 안 해봐서.”
“저라고 뭐 대표 일을 배우고 시작했겠습니까. 다 하면서 배우는 거죠.”
“그래도 저는…….”
“아무튼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저는 정희 씨가 그 역할을 잘할 것 같으니까.”
“아하하. 네에.”
민정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는 내 방을 나갔다.
국내 언론사 중 내부에 홍보팀을 갖추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오프라인은 단순 언론사에 그칠 생각이 없었다.
전 세계 최고 언론사.
그리고 IT 기반 플랫폼 기업을 지향하지 않던가.
이제는 기사 못지않게 회사의 대외 메시지와 외부에 뿌릴 보도 자료 등을 관리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