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프라인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언론 시사회를 열었다.
영화관에 모인 기자들은 2시간에 걸쳐 ‘도세기’를 관람하고는.
모두 눈물을 펑펑 흘린 채 상영관을 나섰다.
센터 일보 문화부의 나혜나 기자가 쓴 기사가 이들이 얼마나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도세기. 도세기는 돼지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주인을 잃은 돼지는 배가 고파 죽은 주인의 시체를 잡아먹는다. 그리고 이를 다시 토벌대가 잡아먹는다. 누군가는 먹고 누군가는 먹힌다. 왜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람을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들어 학대하고 못살게 구는 것일까. 영화는 그 철학적인 물음에 대한 박창후 감독의 대답이다. 그가 마련한 위령제를 통해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들이 부디 영면하시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부디 당부하건대. 영화를 보시는 분들은 꼭 배우 이슬아와 우세진 사장을 찾아보시길. 깜짝 놀랄 것이다.>
대다수의 매체에서 도세기에 관한 긍정적인 기사를 써 준 가운데.
대망의 개봉일이 다가왔다.
to be continued
# 1장 도세기
6월의 제주.
남쪽 나라 제주에는 어느덧 여름이 찾아오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수국이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트린 가운데 그저 그걸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치유를 받는 것 같은 포근하고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휴.”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이 남자는 나와는 전혀 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긴장돼요?”
“긴장은 뭘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박창후의 얼굴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첫 개봉에 앞서 전날 제주에 도착한 나와 박창후는 아침 일찍 제주 시내의 대형 상영관을 찾았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6시 반이니까. 아직 30분 남았네요.”
“그러게요. 시간도 조금 남았는데 뭐 간단히 요기라도 하실래요?”
“저는 아침을 챙겨 먹진 않아서 괜찮습니다.”
“제가 배가 고파서요. 젠장. 극장 오기 전에 근처 국밥집에서 아침을 먹고 올 걸 그랬네요.”
박창후는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초조한 모습으로 주변을 살폈다.
에스컬레이터가 상영관이 있는 7층에 도착했을 무렵.
아래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이 드문 시간대였다.
그러나 극장 로비는 마치 지금이 주말 오후나 된 듯 젊은이들로 붐볐다.
혼자 온 사람.
친구끼리 온 사람.
연인과 함께 온 사람 등.
도저히 새벽 시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인파.
나는 매표소 전면에 붙어 있는 시간표를 확인하며 물었다.
“박 본부장님 이 시간에 저희 영화 말고 또 다른 영화가 있나요?”
“아뇨 없을 텐데…….”
박창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시간표를 확인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둘 다 환한 얼굴로 동시에 소리쳤다.
“저희 관객이네요!”
오전 7시 첫 상영.
<도세기>는 제주의 아픔을 그린 영화인 만큼 전국 동시 개봉이 아니라 제주에서 하루 먼저 상영하기로 하였고 지금이 바로 첫 시간이었다.
영화관 로비를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박창후가 헐레벌떡 매표소로 달려갔다.
그는 매표소 직원에게 소리쳤다.
“저기 지금 좌석이 몇 개나 남았나요?!”
갑작스러운 외침에 젊은 직원은 잔뜩 겁을 먹고는 답했다.
“다…… 다 매진인데요?”
“참말로?!”
“네. 매, 매진입니다. 표 없어요.”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옆에 있는 남자 동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박창후를 슬쩍 바라보더니 반대 방향으로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직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는 그를 이끌고 극장 밖으로 나왔다.
“확인했으니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애먼 사람 괴롭히지 말고.”
* * *
극장 인근의 한 해장국 집에 들른 우리는 해장국 두 그릇을 시켰다.
박창후는 한껏 감동한 표정을 짓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님! 보셨죠?”
“네. 봤습니다. 첫 상영부터 전 좌석 매진이라니. 기대 이상의 결과네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새벽 7시라고요, 7시!”
“아까는 너무 일찍 상영하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셨잖아요.”
“제가 언제요. 이야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제주도민 최고예요!”
곧 주문한 해장국이 나왔다.
뜨거운 국물을 입안으로 집어넣자 내장이 살아나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켜는 게 느껴졌다.
박창후는 내 얼굴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체인점이라 그런지 맛은 대표님네 가게에는 못 미치네요.”
“뭘요. 이 정도면 평타죠.”
“근처였으면 바로 갔을 텐데 아쉽네요.”
“오늘 저희 부모님도 저녁에 장사 마치고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식겠네요. 어서 드시죠.”
나와 박창후는 빠르게 해장국 한 뚝배기를 해치우고는 식당을 나왔다.
아침 내내 초조해하던 박창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두둑해진 배를 두들기며 휘파람을 불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물었다.
“오늘 총 몇 회 상영이죠?”
“9회 상영입니다. 2시간 간격마다 계속 상영하니까 오전 7시, 9시, 11시, 오후 1시, 3시, 5시, 7시, 9시, 11시. 이렇게요.”
“좋네요. 시간대도 촘촘하고.”
“마음 같아서는 종일 도세기만 상영하면 좋을 텐데. 이 정도로 만족해야죠.”
“그래도 강세연 관장의 힘이 컸습니다.”
“맞아요! 원래 계획은 배급사에서 운영하는 인디 극장에서 첫 상영을 하고 멀티플렉스 쪽은 상황을 봐서 상영하는 거였는데. 강 관장님 인맥이 어마어마하던데요?”
“그러게요. 배급사 바꾸는 일이랑 영화관 뚫는 게 전화 한 통으로 이렇게 쉽게 되는 일인지 저도 몰랐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거든요. 그날 제가 강 관장님에게 좀 실례를 한 것 같은데 잘 좀 이야기해 주세요.”
“실례까지야.”
“그런데.”
박창후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물었다.
“두 분 무슨 사입니까?”
“네?”
“아니, 그날 회의 끝나고 배웅해 드리는 것도 그렇고 보통 사이가 아니신 것 같던데요.”
“그냥 보통 사이입니다.”
“에이. 남녀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제가 그날 회사에서 미니 시사회 할 때 보니까 강 관장님이 영화를 보는 틈틈이 대표님 쪽을 쳐다보던데.”
“그랬나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휴. 진짜 돌부처가 따로 없다니까요! 그런데 두 분이 어떻게 아시게 된 거예요?”
“지강원 기자 사진전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네? 사진전에서 처음 봤는데 그런 사이가 됐다고요?”
“어쩌다 보니.”
“이야. 역시 우리 대표님 보통이 아닙니다. 보통이 아니에요.”
* * *
아침을 먹은 나는 박창후와 헤어져 부모님 가게로 향했다.
아침 시간임에도 가게는 제법 손님들로 붐볐다.
“장사 잘되네요. 아침 먹었던 다른 해장국 가게에는 저랑 박 본부장 둘뿐이었는데.”
“응? 해장국을 다른 가게에서 먹었어?”
“아. 박 본부장이랑 같이 먹으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요.”
“아이고. 그냥 차로 오면 거기서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을 텐데 여기 와서 먹지 그랬니.”
“박 본부장 바빠요. 높으신 분들 의전도 해야 하고요. 숙소를 극장 인근에 있는 호텔로 잡은 것도 그 때문인데요.”
“그래도 밥은 먹여 보내야 하는데.”
“둘이서 해장국 먹었다니까요.”
“그러니까! 아니 너는 어떻게 엄마 아빠 가게를 놔두고 다른 집에서 해장국을 먹을 생각을 할 수 있니? 가게가 쉬는 것도 아닌데!”
“아니, 앞에 말씀드렸…….”
“됐다, 됐어!”
원래 엄마가 이런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진해장국이 워낙에 장사가 잘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자부심이 생긴 모양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차려 주는 해장국 한 그릇을 다시 비워야만 했다.
“요즘 어때요?”
“맨날 바쁘지 뭐.”
“아빠는요?”
“일이 있어서 부산에 가셨거든. 이따 오후에 바로 극장으로 오실 거야.”
“별일 없으시죠?”
“별일이야 있겠니. 가게 장사도 잘되고 우리 아들도 이렇게 늠름하고, 엄마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농장 주인아저씨는 요즘 어때요?”
“민 씨 아저씨? 말도 마라. 요즘 맨날 점심은 우리 집에 와서 해장국 드시고 가신다.”
“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그 집 딸을 너희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업시켜 주려 한다며?”
“아저씨랑 그런 이야기도 해요? 정희 씨에게 자리를 제안하기는 했는데 막상 본인은 부담스럽다던데.”
“그래? 민 씨 아저씨는 취업하는 거로 알고 있던데?”
“제가 서울 가서 다시 물어볼게요.”
“그런데 세진아.”
갑자기 엄마가 의자를 빼서 내 앞자리에 앉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희 씬 어떠니?”
“정희 씨요? 잘해요. 능력도 좋고, 성격도 좋고.”
“그래? 저번에 보니까 얼굴도 예쁘고 싹싹하던데.”
“네, 뭐 미인인 편이죠.”
내가 잠시 그녀를 생각하며 답하자 엄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체 ‘편이죠’는 무슨 뜻이니. 너 아직도 여자 친구 없어?”
“엄마. 저 회사 대표예요. 여자 친구 사귈 시간이 어딨어요. 얼마나 바쁜데요.”
“아니 대표는 사람 아니니!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잖니. 민 씨 아저씨는 정희 씨랑 너랑 엄청 친한 것처럼 이야기하던데.”
“네? 안 친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이는 전혀 아닙니다.”
나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른들의 부풀리기란.
엄마는 아쉽다는 듯 다행이라는 듯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지혜 씨는? 지혜 씨는 잘 있지?”
“아, 홍 본부장이요? 물론 잘 있죠.”
“아니, 지혜 씨는 어떠냐고.”
“어떻고 저떻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저번에 내가 보니까 지혜 씨가 너한테 마음이 있던 것 같던데?”
“제발 넘겨짚지 말아 주실래요.”
“어휴. 우리 아들이지만 정말로 여자 마음을 모르는구나. 엄마는 딱 보니까 척 알겠던데.”
“그런 거 아니에요.”
“지혜 씨는 아닌 것 같던데?”
“지혜 씨는 여름에 미국으로 떠나요.”
“미국에? 거긴 왜? 설마 오프라인 관두는 거야?”
엄마의 눈이 솔방울처럼 커졌다.
“아뇨. 미국에 지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홍 본부장 말고는 거기에 믿고 보낼 만한 사람이 없거든요.”
“저런. 아쉬워서 어쩌니.”